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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윤헌 Dec 27. 2023

범부(凡夫)의 즐거움

범부(凡夫)의 즐거움


 고통을 피하고 즐거움을 찾는 것이, 모든 동, 식물의 생존 방식에 최고의 가치로 설정해도 그리 잘못된 표현은 아닐 것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탁월한 지적 능력을 지닌 인간들은 ‘쾌락은 선(善)이고 고통을 악(惡)으로 규정’하여 선을 추구하고 악을 피하는 것이 인생의 궁극 목표인 행복에 도달하는 지름길임을 신봉하며 실천하고 있다. 쾌락이란 무엇인가? 감성의 만족이나 욕망의 충족에서 오는 유쾌한 감정이라고 한다. 쾌락에는 ‘감정’ ‘욕망의 충족’이 등장한다. 감정이나 욕망은 사람마다 차이가 나고 다양하다. 감정과 욕망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 쾌락의 양(量)과 질(質)이 결정된다. 어떤 방법으로 감정을 조절하고 욕망을 자제할 수 있을까?      

 고대 그리스 사상가들은 미래를 예측하기 힘들기에 현세적인 쾌락 즉 순간적, 육체적 쾌락이 중요하다고 설파한다. 더 나아가 현실에서 적극적 쾌락을 획득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고통을 피하는 것이, 쾌락을 유지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영원한 쾌락은 죽음으로서 가능하다는 염세주의에 빠지게 된다. 또한 순간적 육체적 쾌락은 곧 ‘쾌락의 역설’에 직면하게 된다. 쾌락의 역설을 극복하기 위해 영원한 정신적 쾌락을 추구하는 방향 전환을 한다. 여기서도 정신적 쾌락을 얻기 위해서는 고통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통은 비자연적이고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를 충족하려는 데서 생겨난다고 본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치를 멀리하고 검소한 식사를 하면서, 건강을 지키고, 명예와 명성에 대한 욕구에서 벗어나 걱정거리를 제거하는 마음의 평상심을 유지하는 것만이 바람직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인이 추구하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볼 수 있다.     

 고대인의 개인 쾌락 추구보다 현대인의 개인 쾌락 추구는 훨씬 복잡하고 미묘하다. 서로 간의 ‘이익 충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산업 사회가 발달하면서 농업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산업체의 공동작업에서 오는 개인적인 행위는 갈등이 많이 일어난다. 농업적인 공동체는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일을 진행하고 완성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개인적인 이익을 자제하며 공동체 이익을 추구하나 산업체의 협동은 자신의 몫을 다하면 그 몫이 이루어져 제품을 완성하기 때문에 상대와의 협동보다는 자신의 이익과 안락을 우선시하는 개인주의가 발달한다. 그래서 갈등과 반목이 심하기에 서로서로 이익이 되는 합치점을 만들어야 한다. 합치점의 잣대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란 원리이다. 공동체의 이익과 개인의 쾌락을 조화시키는 필수 덕목으로 동정심, 인애(仁愛)가 필요하다. 동정심과 인애의 덕목을 바탕으로 범부(凡夫)의 일상적인 즐거움은 어떤 것이 있을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범부(凡夫)들의 기쁨, 쾌락은 당연히 돈 버는 것이다. 돈 버는 즐거움의 적용 범위는 아주 어린 나이부터 연세가 많은 노인에게 적용할 수 있다. 무슨 일을 하든 돈이 되면 기쁨이다. 자신의 노력에 상응하는 보수를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즐거움이 커진다. 인간의 욕심 때문인지 자신의 노력 결과에 만족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으리라고 추측된다. ‘진인사 대천명(盡人事 對天命)’의 자세로 살아가는 삶이 행복해진다고 교육받아 왔지만, 그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판단한다. 오히려 노동의 대가(代價)에 대한 합당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보다, 늘 상대성을 강조한다. 노력의 대가(代價)가 남들보다 높으면 자신이 하는 일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우수하다고 자부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장의 조건도 일의 내용보다는 연봉이 얼마나 많은지에 따라 좋은 직장이라고 판단한다. 돈의 가치가 그만큼 크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래서 나보다 남이 많이 벌거나 수당을 많이 받으면 배가 아프고 질투가 난다. 작금(昨今)의 현실이 청년 실업이 증가하고 노인들이 연금으로 생활하는 것이 갈수록 어렵다. 그래서 수입이 적어도 돈을 벌 수 있다면 즐겁다.


 두 번째는 자신의 주체적 의지로 무엇을 실천하는 일이다. 생업과 연결된 것도 있을 수 있고 직업과 연관된 것도 있지만 보통은 취미생활이나 놀이문화로 표출된다. 어느 대기업에 임원으로 근무하다가 퇴직한 친구의 모습이다. 퇴직하자마자 농업에 관한 연수를 받기 시작한다. 내가 주말마다 아내의 농사일을 거들어 준 경험으로 “농사는 너무 힘든 일이니, 시작하지 말라.”라고 충고해도 아주 열심히 연수에 참여했다. 최근에 30평 규모의 텃밭에 15평의 비닐하우스와 작은 농막을 짓고 고추, 상추 등 모종을 심었다고 자랑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 “난생처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여 너무 기쁘다.”라고 한다. 고대 그리스의 에피쿠로스가 옆에 있었다면 ‘엄지 척’을 했을 것이다. 생업이나 직업은 먹고사는 문제이면 취미생활은 인생의 품위와 멋, 만족을 주는 것이기에 누구나 한두 개 정도는 준비해야 즐거움으로 살아갈 것이다.     

 세 번째는 ‘일탈’이다. 일탈이 잘못되면 범죄 행위가 되기에 참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한다. 교직에 근무하다 보니 청소년의 유행도 많이 변한다. 20년 전쯤으로 생각되는데 그 당시에 학생들이 슈퍼마켓이나 남의 가게에서 물건 훔치기가 유행했다. 우리 반 여학생이 마트에서 컵라면 두 개 훔치다가 점원에게 들켜서 경찰서에 있다고 학생 담임 선생님으로 있는 나에게 경찰서 와서 학생 인도해 가라고 하여 경찰서 갔더니 여학생들이 학생들끼리 누가 간이 큰가 내기였다고 한다. 내기에 동참하지 않으면, 바보 취급받는다며 내기를 했다고 강변한다. 학생들 데리고 마트 점주에게 공손히 사과하고 왔던 기억이 있다. 지금이면 바로 신문에 날 일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청소년의 일탈에 너그럽게 대처한 것 같다. 성인들의 일탈은 어떤 것이 있을까? 일탈을 위해 친구가 꼭 필요하다. 약간의 견제가 필요하면서 즐거움을 만끽하는데 일탈을 인정해 줄 친구가 있어야 진정한 일탈이다. 어릴 적 ‘수박 서리’ 비슷한 것이다. 혼자 하면 도둑질이 되지만, 친구와 같이하면 재미도 있고 추억도 남기 때문이다. 범죄에는 연루되지 않고 약간의 비도덕성이 곁들어 있는 일탈인데 최근 유행하는 말로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내로남불)이다. 남에게 손가락질받을 정도는 아니고 그렇다고 도덕적으로 완벽한 행동은 아니다. 유아든 성인이든 일탈이 즐거운 이유는 무엇일까? 긴장감이 수반되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 젊은 세대의 즐거움의 종류는 좀 다양할 것이다. 어느 드라마에 40대 초반의 직장인이 고가(高價)의 자전거와 어릴 적 좋아하던 로봇 장난감을 모텔에 숨겨두고 슈퍼맨 복장을 하고 장난감으로 1~2시간 즐기다 퇴근하는 모습에서 신선한 충격을 경험했다. 제목을 범부(凡夫)의 즐거움이 아니라 장년층의 즐거움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면서 글을 맺는다.     

                                   2021. 4. 21 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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