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자신의 '권리'를 계속 주장하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권리'는 없고 '의무'만 남은 사람입니다.
보통 부모님은 '의무'가 많고, 자녀들은 '권리'가 많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이 권리를 주장할 때 아이들이 부모의 의무를 가져와야 합니다. 그렇게 슬픔은 시작됩니다.
저는 '권리'를 추구하고 주장하고 살았습니다.
더 좋은 대학 가서 무시당하지 않을 권리, 좋은 회사에서 좋은 대우를 받을 권리, 부자가 될 권리를 추구했고 주장해 왔습니다. 제 부모님들이 해야 할 의무를, 할 수 있는 선에서 다 하셨기 때문에 주장하고 사는 거 같습니다.
그녀를 만났습니다.
'의무'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교재비를 스스로 감당해야 할 의무, 돈을 스스로 모아서 결혼해야 할 의무 등요.
의무가 많은 사람은 권리가 많은 사람 앞에서 어느덧 주장하는 법을 잊었습니다.
자기가 먹고 싶은 걸 먹을 권리, 쉬고 싶으면 쉴 권리, 좋은 곳에 여행을 갈 권리를요…
'권리'가 많은 사람은 '의무'만 남은 사람이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왜 주장하지 않는 거지? 진짜로 원한다면 노력해서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권리를 주장해야 하는 것 아닌가?
굳이 알아서 챙겨줘야 하는 건가?
하지만 남자 주부가 되어 아이들 육아를 전담해 보고 알았습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권리를 죽이고 의무를 다하는 사람이 있어야 '권리'가 태어난다는 것을요.
또 '의무'가 많은 사람은 세월과 함께 '권리'를 주장하는 법을 잊는다는 것을요.
'의무'가 많은 사람은 '권리'가 많은 사람이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보다 안정된 미래를 설계를 해야 할 텐데 부자가 될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이 이해가 잘 안되었습니다.
육아에 힘써야 할 때 세미나를 가려고 하고, 공부를 자꾸만 더하려는 사람이 이상해 보입니다.
부자는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교육은 대학교에서 끝났고, 나는 내 의무에 힘써야 하니까요. 그렇게 권리를 주장하는 법은 의무에 짓눌려 잊어버렸습니다.
나에게도 분명히 행복할 권리가 있는데, 잊었다는 사실조차 잊었습니다.
위로는 그 자리에 같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나도 그 자리에 있어봤다.' '나도 너만큼 아파봤다'라는 말을 들을 때 마음에 따스한 위로의 햇살이
비춤을 알았습니다.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위로가 될 수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사람만큼 아프지 않고는 위로를 할 수 없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그래, 나도 아파봤어. 너만큼"
그 말을 해줄 수 없는 인생이라면, 그냥 옆에서 말없이 있어주는 것이 천 마디 말보다 나은 위로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평생 네 곁에 있을게.
내가 네 의무를 좀 가져갈게.
그러니 내가 가져가는 의무만큼,
네 권리를 주장하고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