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로 치열하게 살 수 밖에 없을거란 말들
여행을 다닌다는 티를 내는 걸 정말 싫어했다.
나는 여행을 대체 뭘로 봤던 건가-싶다.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에 완벽하게 녹아들어 어떻게든, 침착맨이 말한대로 ‘이물질’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근데 사실 이물질이 맞기 때문에 이물질처럼 안 보이려고 노력할수록 이물질인 티가 더 나는 느낌이 들어서 이물감이 든달까.
일본은,
정말 많이 다녔다.
하지만 갈 때마다 어쩐지 그 이물감이 더 크게 든다. 런던이나 캐나다를 갔을 때와는 달리, 생김새가 비슷하고 내가 이제 어느 정도 일본어도 잘 하니 더 그런 것 같다. 영미권에서는 스스로를 숨길 필요 없이 더 즐겁게 대화하고 더 빠르게 어울려서 펍도 가고 이웃이랑도 친해지기도 했는데.
일본은 어쩐지 다른 자물쇠에 꼽히기는 하지만 돌려지지는 않는 열쇠와 같은 느낌이 든다. 그때의 당혹감이나 이물감은 애초에 맞지도 않는 열쇠를 자물쇠에 비적거릴 때와는 다른 강렬하게 불쾌한 느낌을 준다.
지금 여행에서 불쾌함을 느꼈다는 건 아니다.
모두 친절하고 놀러운 경험들을 하고 있다.
다만 뭔가 더 넓어진 자유에서 더 큰 답답함을 느끼는 기분.
이민이야 생각해본 적 없지만,
배로 치열하게 살 수 밖에 없을거란 이민자들의 말이 다가온다.
여행이 끝나고 난 뒤에는 항상 옅은 쓸쓸함 같은 게 다가왔는데,
지금은 그런 건 없다.
오히려 그냥 옅은 헛구역질들이 난다.
작년에는 한 선생님 강연 촬영을 갔는데, 그때 그 분이 그런 말을 했다.
“내년에는 진짜 힘들어질 겁니다.”
“아무리 짜증나고 화가 나더라도 사업을 하시는 분이라면 끝까지 살리시고, 직장을 다니시는 분이라면 붙어 계세요. 모든 지표가 내년은 최악이라는 걸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때 덜컥 겁이 나서 몇 개월을 더 열심히 회사를 다녔던 것으로 기억한다. 결국에는 이렇게 됐지만.
친구랑 오늘 귀국하면서 길게 대화를 나눴다. 한국의 가장 큰 문제점이 뭘까. (그 친구는 신혼여행으로 미국과 독일을 다녀온 터였다.)
나는 아무래도 작은 땅덩어리라고 생각한다고 전했고 그 친구도 동의했다. 땅이 작으니까 서로 누울 자리가 없는데, 서로 경쟁은 또 해야하고. 그러다 스스로 죽거나 죽이거나.
친구가 선진국의 기준은 생각보다 ‘실패에 관대한 분위기’라고 하던데, 우리나라는 실패하는 순간 끝장이다. 일본이라고 다르진 않지만 그들은 겉으로는 존중하려는 애를 쓰기는 한다.
지금 나는 헛구역질은 뭔가 결국 내가 돌아온 곳은 여기고 나는 이 땅에서 사실은 더 살고 싶다는 마음 때문인 것 같다. 용기나 겁과 같은 개념과는 조금 다르게, 코스모폴리탄이라는 것 자체가 내게 맞지 않는 것 같다.
대학교 때 배운 게 정말 평생 가는 것 같은 게 결국 또 장소와 장소상실이라는 책에 대해 기억이 난다. 아래는 그 글의 일부를 내가 요약한 것이다.
공간과 장소가 의미하는 것은 좀 다른데, 장소는 손에 잡히는 것이고 공간은 그저 개념이다. 이 공간을 형성하는데 장소감이나 장소 개념이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원초적 공간과는 다르게, 지각 공간이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개인이 지각해서 직면하는 ‘자아 중심적’인 공간을 뜻한다. 개인의 경험과 의도로부터 분리될 수 없기에 내용과 의미를 가지는 것인데, 인간의 지각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주관적이고 한정적이며 이질적, 상대적이다.
지각 공간에서 개인을 둘러싼 세계를 이제 개인은 ‘지배 영역’으로 여기는데, 이것은 개인의 의도나 새로운 거주지로 이사하는 등의 환경 변화로 바뀐다.
지각 공간과 같이 개인적인 공간 경험이 바로 환경과 경관이 우리에게 부여하는 많은 의미의 기초가 된다고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실존 공간, 즉 생활의 공간이 나타난다.
한 문화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세계를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공간, 즉 문화를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정의되면 그 공간이 장소가 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위치, 활동, 건물들이 의미를 가지고 또 잃으며 성장과 번영, 쇠퇴하게 된다.
현재의 장소는 이전 장소에서 성장하거나 과거의 장소를 대체하면서 그런 의미들을 진전시켜온 것이다.
그러니 이미 압도적인 시간을 이 나라에서 살아온 내게 전세계를 끊임없이 유영하며 돌아다닌다는 것은
그동안 쌓아온 장소로서의 무거운 세이브파일을 들고 계속 운영체제가 다른 컴퓨터로 접속해야하는 외장하드로서 살아가는 것과 크게 다를게 없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 전환이 빠른 사람들이 부럽다.
결국 여행에 가서,
여기는 구파발 닮았네,
여기는 로데오거리랑 똑같은데?
이 골목은 완전 대흥에서 서강대로 넘어가는 길 같다 등등
이런 말이 튀어나오는 것 자체가 우리들의 장소는 여전히 문화로서 살아숨쉬고 있다는 것인데, 30살이 넘어가니 이제는 무언갈 계속 받아들이기보다 구축된 문화의 레퍼런스로서 다시금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순간들이 많아졌다는 거다.
일본은 실존의 공간으로서 내게 맞지 않다.
사랑하는 문화들은 있지만 알멩이는 없는 외피만을 그리워하는 것들이다. 경험해보지 못한 노스탤지어를 갖게 만드는 곳.
한국은 스스로의 장소를 만들고 실존하는 공간을 경험하며 스스로를 구축해나가기에 너무 좁고 뜨겁고 서로를 미워한다. 그게 나의 장소 경험이 되어버리는 순간, 아이러니하게 그게 내 아이덴티티가 되어버려, 다혈질이 되고 부딪치게 되는 거라고 나는 감히 생각한다.
일본에 간 건 무작정이었건만,
그 안에서 나는 나의 장소를 더욱 강하게 되새겼다.
나의 사랑하는 팀원들이 줄줄이 퇴사를 하며, 그 마음들의 조각들 사이에서 이런 면면들을 아쉽게도 보게 되며, 그들에게 해주는 말들은 결국 그들과 다르지 않은 내게 하는 말과도 같다.
고생했다,
수고했다,
너는 걱정없다 등등
정작 우리에게 필요했던 그 말조차
교보문고 가판대의 어딘가에서 본 경험으로,
만원 지하철 안에서 본 인스타그램의 한 문구로,
그 경험이 장소로 전유되어 나의 아이덴티티가 되는 순간,
위로의 말도 힘을 잃는다.
그건 이미 마케팅의 한 공간을 양껏 차지해버렸기에.
우리 그러지 말자고, 나는 전해주고 싶었다.
그 말을 듣고 그 말을 하는 그 순간과 그 공간에서의 경험을,
우리만의 장소로 각인시켜 내일도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가 떠나는 여행은 그래야만 한다.
섬광은 그 순간에 휘발되지만, 그 섬광의 찰나가 스쳐지나간 그 시공간을 우리의 장소로 만들자. 내일 또 살아갈 수 있도록.
멋진 신세계를 살아갈 섬광소녀들에게!
(가사는 이렇다)
오늘, 지금이 확실하다면 만사형통이겠지
내일은 완전히 까먹어버려도 돼
어제의 예상은 이제 감이 죽어버린거지
앞서나갈 필요 없어
지금 이 순간을 최대치로 흘려보내보자
내일까지 배터리를 남겨놀 생각따윈 하지말자고
어제의 오해로 왜곡되어버린 핀트는
새롭게 맞춰서 잘라내버려, 한 순간의 빛으로
사진기는 필요하지 않잖아?
오감을 가지고 나가보자고
나는 지금밖에 몰라
당신의 지금 이 순간에 섬광처럼 빛나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