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과 현재의 차이점
5년 전, 테라스하우스를 열렬히 시청했다.
원래는 일본어 듣기랑 구어체에 익숙해지려고 보기 시작한 일본의 예능 프로그램인데, 당시 나름대로 이 프로그램 자체에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이런 종류의 예능프로, 그러니까 남의 연애나 중매과정 같은 걸 자극적으로 보여주려는 프로그램, 정말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나-싶을 정도로 집중해서 보고 있다. 좋은 현상은 아닌 것 같다. 뭔가 관음증 비슷한 것이 생긴 듯한 느낌이다. 근데 사실 '오직 목표는 연애!'로 설정하고 시작한 그런 프로그램들과는 조금 다르다. (물론 당시에는 '나는 솔로'라던가 한국에서 인기 있는 연애 프로그램이 전무할 시기였다. '짝'의 비극적인 사태가 있었기 때문에)
시즌이 몇 개까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당시 16년도 여름부터 시작한 시즌을 보고 있었다. 부제는 '도시남녀'. 직전 시즌에는 어디 하와이에서도 하고 숲 속에 멋진 숙소를 잡아 놓고 짝짓기 게임을 했나본데, 이번에는 출연자 모두가 도쿄에서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지속하며 입주하여 공동생활을 하는 방식이다. 그러니까 뭐 특별한 기분도 나겠지만 생각보다 일상에서 (상대적으로)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생활하는 것이다.
처음 만나는 남자 셋과 여자 셋이 한 집에 모여서 산다. 좋은 집과 차가 무료로 제공되고 단지 출연자들은 그 안에서 자기 할 일들을 하면 된다. 기본적인 짝짓기 게임의 포맷이지만 생각보다 테라스 하우스에 출연자들이 들어오게 된 이유가 다양해서 신선하다. 정말 연애를 하기 위해서 들어온 사람이 있고 자신을 이 프로그램을 통해 변화시키고 싶어서, 신선한 자극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아서, 지방에 사는 사람 중에는 도쿄에서 생활해보고 싶어서 지원했다고도 한다. ^리얼^ 버라이어티 예능이 화두가 된 지 꽤나 오래됐지만 여전히 '대본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며 출연자들의 자연스럽고 예상하지 못한 일들을 (물론 엄청 편집하겠지만)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 그리고 단지 3대3 짝짓기가 아니라 출연자들이 자신의 인생을 대하는 태도, 자신의 직업이나 삶의 가치관을 피력하고 나름의 관계망을 형성해가며 싸우고 울고 웃는 모습을 통해 시청자도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는 것에 매력이 있었다(지극히 주관적인 판단). 그 당시 친구들을 만나면 항상 테라스 하우스 이야기를 내가 한 번 이상은 언급했는데 19년도 어느날 밤에 만났 친구들과는 또 다른 생각을 했나본지, 핸드폰 구석에 남겨놓은 기록을 발견했다. 그 기록은 아래와 같다.
문화컨텐츠를 생산하는, 그것도 내러티브가 있는 컨텐츠의 생산과 검토를 직업으로 삼고 있는 친구와 술자리를 가졌는데 그 친구가 말하기를, 아직 이쪽 분야의 기획자들이 굉장히 경직되고 보수적인 사고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격하게 동의했다. 넷플릭스에 올라오는 드라마를 면면만 정말 주마간산처럼 살펴봐도 한국발 드라마와는 확실히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입체적인 캐릭터가 등장한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인데, 한국은 아직도 어떤 주제에 매몰되면 그 주제에 맞춰서 작동하는 기계와 같은 캐릭터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여성은 남성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고 극 속에서 여성 캐릭터의 존재이유가 남성 캐릭터의 내러티브가 진행되는데 있어서 필요한 부속품으로 등장한다는 것. 그것이 아무리 필수적인 요소라 할 지라도 어쨌든 주체적 위치에 설 수는 없는 거다. 1987의 김태리 배우분이 맡은 역할만 해도 그 캐릭터가 나중에 어떤 각성을 맞이하여 새로운 전환이 일어나 주체적인 선택을 이어간다고 해도 결국 그 캐릭터가 운동에 참여하게 된 건 남성 선배를 좋아해서였고, SKY캐슬이 아무리 여성서사로 주목받고 누군가 주장하더라도 결국 결말은 남편들의 각성에 더 스포트라이트가 주어지고 여성이 기존의 부조리한 질서를 깨부수는 것이 아니라 기존질서가 유지되는 상황에서 그냥 모두가 다시 즐겁고 행복해진다는 것에 그친다. 그렇다고 딱히 남성들이 입체적인 것만도 아니다. 한 주제가 있으면 그 주제라는 거푸집 모양으로만 태어난 캐릭터들만 날고 긴다.
매번 빻은 여성관에 대해 별다른 성찰이 없어 보이는 일본 방송계에도 '언내추럴'과 같은 굉장한 드라마가 등장하는데 한국은 아직 무소식이다. 당장 넷플릭스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드라마들인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이나 '러시아 인형처럼' 같은 드라마만 봐도, 그 친구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정말 '사람'같은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다. 남성과의 종속적 관계에 굴복하는 지리한 연애서사 따위 없어도 충분히 엄청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뽑아져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친구는 자신의 앞에 놓여진,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사무실 책상에 입성한 시나리오들에 절대 이런 이야기들이 없다고 말했다. 나름 여성서사에 신경 쓴 티가 팍팍 나지만 여전히 남성이 주를 이루는 서사에서 탈피할 수 없고 아니면 그냥 또 선배 보고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가 대다수란다. 아니면 마약 이야기하거나. 남자들이 서로 죽고 죽이거나. 문제는 기획자들이 이런 것들을 보면, 이미 세계 기준에서는 등 뒤의 이야기, 즉 오래되고 구린 이야기로 머물러 있는 시나리오들인데 심지어 그런 이야기들에까지 오히려 '너무 여성만을 의식한 이야기 같아서 재미가 없다' 거나 '논란이 될 것 같다'거나 하면서 더 겁을 집어먹는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하면 트위터에서 대차게 까인다'거나 '요새는 무슨 이야기를 해도 걸고 넘어지니까 할 이야기가 없다'거나 하는 식의 말들, 즉 노력할 마음조차 없이 자신들만 억울하게 욕을 먹고 코너에 몰린다는 듯한 생각들을 친구에게 한다고. 어이가 없다. 문화컨텐츠를 선도하는 사람들이라면 적어도 가장 감각이 예민의 첨단에 가 닿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하는데.
그 친구와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레 내가 테라스 하우스에 대해 많이 언급하니 그 쪽 이야기를 잠깐 하게 되었다. 어차피 극을 쓰는 사람들은 포인트를 잡고 쓰는 중심 서사가 있고 거기에 배치할 캐릭터를 조성할텐데, 이런 예능은 어떨까 궁금했다. 물론 예능도 작가가 캐릭터를 주조하고 편집을 통해 편집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극을 운용하겠지만 '리얼'이 강조되는 상황에서는 아무래도 그걸 조정할 방식이 조금 그들 마음대로 수월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을 확률이 높을 것이다. 남자 셋, 여자 셋 중에 작가나 편집자가 원하는 것은 어떤 갈등을 유발하고 조장해줄 사람과 그것에 맞대응할 사람 혹은 그런 갈등이 있으면 바로 조정해줄 캐릭터들을 서류나 면접을 통해 가려뽑을 것이 확실한데, 그게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 경우도 있다. 나는 거기에 흥미가 있었다. 나름대로 캐릭터들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는 것.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있다. 테라스 하우스는 일본 예능의 대다수가 그렇듯 하우스 내의 출연자들이 벌인 일들에 대해 스튜디오에 따로 방송인들을 모아 그 일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그에 따른 반응들을 보여준다. 시청자는 그런 패널들의 반응에 공감하거나 반대하면서 방송에 더욱 깊게 몰입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 패널들 중에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 짓궂은 말들을 뱉는 캐릭터를 두세명 씩 배치를 하는데 (대부분 중년 남성 개그맨들) 그 말들이 하나같이 빻아서 가루가 된 내용들이란 것이다. 출연자들이 처음 집에 들어와 '물론 요리는 여성이 하는 것이겠죠?' 라고 물으면 여성 출연자 세 명 중 딱 한 명 만이 '에, 왜요?' 라고 되묻는다. 그러나 웃으면서 되묻고 뭐, 당연히 요리는 여성 몫이지, 하는 기류가 자연스레 형성된다. 패널들 중에 여성 출연진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저 '데쇼네~' 하고 동의 하며 끝난다. 남성 출연자가 여성 출연자와 연애를 하게 되었더니 자연스레 남성은 여성에게 '배고파요, 뭐 만들어주세요' 이지랄한다. 그럼 여성 출연자는 '뭐먹고싶어요?' 하더니 뚝딱 만들어주신다. 그럼 황송히 먹어도 모자랄 판에 남성은 '아 좀 미묘한 맛이네요' 같은 말이나 하면 여성은 '미안해요' 라고 말한다. 그럼 중년 일남 패널들은 '아, 요리를 좀 잘했으면 더 점수를 딸 수 있었을텐데요, 여성들은~' 같은 말을 하고 여성 패널들은 '그렇지요~ 아무래도~' 라는 식으로 마무리한다. ?
근데 그러다보니 정말 다른 다채로운 인간관계에서 서로가 갈등을 빚는 장면이나 자신의 삶과 연애를 제외한 가치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때는 '아, 사람들이 정말 입체적이구나' 하는데 딱 연애관계로 넘어와 버리면 갑자기 그렇게 살아서 펄떡 뛰던 여남 캐릭터들이 마치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반응들을 보이는 기계들이 되어 버린다. 연애만 하면 이분법적 관계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여성은 요리, 남성은 일, 여성은 울면서 상담(여성이 남성보다 더 의젓하면 아주머니 혹은 사스가 OL이네~, 똑 부러져서 이런 여성은 좀 대하기 두렵고 힘들 것 같아요~, 중년 일남 曰 : 나라면 저런 여자랑은 결혼 안해요 따위, 언제나 여성은 순종적이어야 호감임), 그런 여성에게 남성은 의젓하게 반응(그렇지 못하면 남자답지 못한 것, 어린애같은 것, '여성스럽다'는 말 자체도 웃기지만 동시에 그런 말이 남성에게는 낙인처럼 찍히는 것) 하는 것 따위의 반복들.
운전은 남성의 전유물, 소소한 축하 이벤트를 계획하는 것 역시 여성의 전매특허. 6인체제에 그 어떤 캐릭터가 들어와도 모두가 연애나 썸의 과정에 있어서만큼은 무신경을 넘어 정말 감각자체가 없다고 할 정도로 단순한 흐름이다. 거기서 그냥 주목하는 것은 이 여성이 다른 여성과는 어떻게 다르게 예쁜지, 얼마나 드센지, 나이가 많고 적고, 그 사람이 혼혈(Half라고 표현하더라 난 이것도 좀 어이없었다 나같으면 모욕적이라고 받아들일 것 같지만 내가 혼혈은 아니니까 발언권은 없다고 생각한다. 친구는 이것에 대해 '더블'로 표현하지 않으면서 '하프'로 표현하는 것도 그냥 정상인들이라고 생각하는 범주에서 이상하니까 붙여진 별칭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인가 순수혈통인가 등, 정말 오로지 외모에 맹목적으로 집중하는 모습들.
사회가 인간을 이미 찍어 만든지 오래라는 걸 알지만 에,, 2010년 후반기에도 여전히 이런 게 통한단 말야? 하면서 어이가 없었다. (물론 지금 그 극을 나름대로 즐겁게 소비하고 있는 입장에서 얼굴을 붉히면서 말하는 수준이다.) 아무리 대본이 없다고 해도 이미 인간이 태어난 사회가 그 인간에게 평면의 캐릭터성을 부여하고 있으니 여전히 예능에서도 어떤 한 영역에서는 그 인물들에게 절대적인 평면성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보면 이게 뭐 대단한 성찰도 아닌 건데 나는 어쩐지 다른 사람들이 리뷰로 남겨놓은 말들에 적잖이 기대를 한 것 같다.
그렇다면 적어도 드라마나 극에서만큼은 이런 모습을 보이면 안 되는 것 아닌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했다는 것에 호평을 받는 작품들도 있고 물론 그것도 나름의 의미는 있다. (기억을 생생히 재구성하고 잊지 않으려는 작업은 언제나 역사를 망각하지 않는다는 존재가치가 부여되니까. 극적인 요소를 통해 부정적인 효과도 얻겠지만 동시에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효과도 있으니.) 그러나 한국 영화나 드라마 대부분이 반영하는 현실은 부조리를 인식하고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 제시한다기 보다는 '자연스러움'이라는 미명 하에 끊임없이 재상산 되고 있지않나? 현실에 여전히 '남성에게서 존재의의를 찾고 여성스럽다는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이거나 남성 선배가 멋져서 들어간 동아리에서 자신의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 여성'이 분명 있을 수 있다. 근데 시청자들이 이런 인간상을 제시하는데 있어서 비판을 가할 때, '아니, 현실에 있는데 왜 그래요? 난 현실반영을 한 것 뿐인데'라고 말한다면 그건 어떤 파급을 만들어내는 사람으로써의 의식따위가 없는 것 아닐까? 부끄러움을 느껴야 되지 않나? 그럴 거면 정말 있는 그대로 사진을 찍어 내러티브의 판단은 관객들에게 맡기는 식으로 작업을 하든가, 아니면 뭔가를 전달하는 데 있어 현실감각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제발 이런 분야에 종사하는 것을 그만 두든가. 문화 선도라면 이런 부조리를 변화하는데 앞장서야한다고 개인적으로 여기는 바라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할 건 아니지만서도 누가 누군가를 착취하는 구조를 강화하는데 있어서 내러티브가 들어간 영상이나 글들이 매우 강력한 기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제발 이런 일을 했으면 좋겠다. 일본이고 한국이고 미국이고를 떠나서 그냥 사람에 대해서 쓰고 찍고 만드는 사람들이라면 말이다.
어찌됐건 난 거의 다 봤다. 테라스하우스에 들어와 자극을 받고 자신만의 모자 브랜드를 런칭하며 하릴없이 연애만 하자고 껄떡대는 하와이 남자로부터 꿈과 일 때문에 연애 생각은 없어요- 라고 말하는 '아리사'씨가 제일 좋았다. 꿈을 쫓아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데서 행복을 찾으려는 사람들 사이에 일어난 갈등과 대화, 화해의 과정도 좋았다. 판에 박힌 관계가 되어버리는 썸과 연애의 과정이나(이걸 바꾸긴 힘들겠지, 하지만 그걸 바꾸고 싶어하고 보편적으로 굳어진 관계의 단면도를 변화시킬 캐릭터를 지닌 사람을 제작진이 고심해서 고르고 골랐다면, 그걸로 완벽히 해결되지는 않아도 적어도 그정도는 노력해야 한다고 본다) 그걸 바라보고 비웃는 패널들의 생각 없는 말들만 없다면 정말 출연자들이 알아서 이끌어가며 다채로운 인간군상의 모습을 보여준 멋진 예능이라고 칭송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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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까지가 내가 19년도에 적었던 감상이다.
그때까지는 내가 이 콘텐츠에 얽힌 불미스러운 일을 알지 못했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다고 해서 소비하지 못할 것은 아니지만, 약관의 나이도 지나지 않은 여성 출연자가 이 예능 프로그램이 방영된 뒤 타인으로부터 받는 비난과 그로 인해 피어오르는 슬픔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있었다.
어디까지나 카메라 뒤에, 화면 뒤에 사람이 있다는 걸 망각한 사람들은 편집기를 잡으면 안 된다. 출연자가 가졌던 목적, 명성과 유명세, 화제성과 인기를 위해 이 프로그램에 참가했다고 해도, 적어도 권력을 가진 자가 그러한 출연자의 심리를 이용하여 마음껏 그들을 찰흙 주무르듯 변형시킬 권리는 사실, 이걸 지적하는 데에도 활자가 아까울 정도로 없다. 하지만 진리는 정말 단순하기 때문에 또한 가끔씩 망각하고 선을 넘고 싶은 게 현실이다. 하지만 당신이 잠깐 선을 넘을 때, 그 선을 넘었기에 달라진 인생을 살아야하는 많은 사람들의 억울함은 대체 누가 소비를 해주나 싶다.
위의 사실을 알고 나는 또한 다시 연애를 주제로 한 예능 프로그램을 소비하지 않는다. 사람과의 관계를 맺는 데 서툴어본 적은 솔직히 단 한 번도 없었음에도 이제 '특별한 누군가'를 염두에 둔다는 이 특수한 관계를 한낱 소비재로 보기 시작한다는 사실이 거북스럽고 역겹다.
한창 대학을 다니며 비거니즘과 페미니즘에 광적으로 집착했을 당시, 개인이 무언가를 드라마틱하게 바꿀 수 없다는 것에 분노하고 좌절하며 울적해하곤 했다. 이제는 개인이 무언가를 드라마틱하게 바꾼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무서운 일이고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을 실감하며 살아간다. 아무리 옳은 일이라도 개개인의 의견이 다른 것을 묵살하거나 원치 않는 어떤 행동을 이행하도록 강제할 수 없다는 단순한 진리와 배려를 한창 피가 끓었던 2010년대에는 알지 못했다. 그때는 누굴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누가 죽는다. 하물며 옳다고 생각한 일을 하는 데에도 이런 무시무시한 무게감과 공포감이 느껴지는데, 저녁 시간 대에 식사를 하며 사람들의 시시콜콜한 연애 이야기를 듣고 소비하는 데에도 이렇듯 생의 무게와 타인의 시선으로 인해 짓눌리는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죽는 이들이 나타난다. 아이러니한 세상이다.
5년 전, 내가 생각했던 위의 말들과 현재 내가 생각하는 콘텐츠의 방향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점점 SF 소설로 '도망'쳤던 이유는 다름 아닌 이 관계의 민감성과 인간의 취약함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시금 에세이로 돌아온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가장 적나라하게 해야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사람은 숫자 앞에 서면 비참해진다. 시청률, 구독자, 조회수, 재생시간.
이 단어로 인해 누군가 죽지 않아야 할 것을 알기에, 내가 지난 3년 간 돈을 벌어 먹고 살았단 다양한 마케팅의 수단을 내려놓은 채 나는 이제 에세이를 쓰려고 한다. 좀 덜 맛있는 밥을 빌어먹고 산다고 할 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