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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리망자 Sep 24. 2024

'쇼군'을 보고 #disney+

맛있는 음식을 먹고 셰프를 찾듯, '쇼군'의 창작자에게도 찬사를





내 어린 시절, 


그러니까 아직 미취학 아동이었을 시기에 가장 처음 본 일본의 콘텐츠는 포켓몬스터도, 디지몬도, 드래곤볼도 아닌 '카우보이 비밥'이었다.





나는 맞벌이를 하는 부모 밑에서 자랐는데, 그들은 함께 사업을 일군 지라 밤 10시가 넘었음에도 집에 들어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에 부모님은 집에 홀로 남겨진 나를 위해 다양한 책과 놀이기구를 구비해두었으나, 나는 그것들보다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투니버스에 더 관심이 많았다. 낮에는 바른 아이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책을 읽는 경우가 많았으나, 부모의 격무가 심해지는 밤에는 오히려 성인을 타겟으로 겨냥한 만화를 보는 것이 은밀한 일탈 중에 하나였다. (당시에는 일탈인지도 몰랐지만, '이걸 봐서는 안된다'라는 생각만 어렴풋이 있었다)



그때 방영했던 것들이 대운동회, 헬싱, 트라이건과 같은 것들이었는데 그림체가 하나같이 날이 서있고 이야기도 울적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카우보이 비밥이라고 다르지 않았으나, 음악이 굉장히 경쾌했고 어딘지 모를 우울함을 동반한 설렘 같은 것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끝을 알면서도 달려나가는 마지막 축제와도 같은 느낌을 준다고 해야하나, 물론 이것도 성장한 뒤의 감상이긴 했지만.


다만, 아버지는 일본에 상당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그가 어떤 교육을 받고 자라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당시 아버지는 내 기억 속에 박정희를 찬양하고 전두환에게는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며, 김대중과 노무현은 크게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중도 보수파였던 걸로 기억한다. 뭐 정권의 호오에 따라 일본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를 가늠하는 것은 상당한 오류가 있는 접근이겠으나 작금의 상황을 보면 정권에 따른 일본 호오의 지형도가 분명하지는 않을지언정 의미있는 지표가 나올 것 같기 때문에. 


어쨌든 아버지는 내가 학교에 들어가 본격적인 줄글로 된 역사를 배우기 전부터 과거 일제의 만행과 추악함 등을 알리려 애썼고, 동시에 내가 자주 보는 일본 만화에 대한 선호도 무리하여 낮추려는 노력을 하셨던 것 같다. 카우보이 비밥을 보고 나서, 친구가 빌려준 짱구는 못말려-라든가, 드래곤볼과 같은 만화책을 한 손에 쥐고 '정신을 썩게 만드는 만화'라는 말씀도 하셨던 게 생생하게 기억이 날 정도이니.





근데 인간은 참 재미있는게 '무엇을 하지 마라'라고 명령이 입력되면, '하지 말라'는 명령어가 뇌리에 남는다기보다는 해서는 안될 그 '무엇'에 더 집중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오히려 그 '무엇'을 향유하는 행위는 더욱 은밀해지고, 그 은밀함에 즐거움이 쌓일수록 쾌감과 도파민의 보상도 강해지기 마련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지금 독학으로 일본어를 공부하여 일본인과 무리없이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의 실력이 쌓였고, 내가 사회생활을 하고 인간관계를 쌓아나가면서 대부분의 고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의 참고했던 레퍼런스나 살아가는 방향성을 설정하는 데 있어서 일본의 콘텐츠는 꽤나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일뽕이긴 하지만 '일본'이란 나라를 좋아하지 않긴 하다. 그 특유의 음침함.)


그럼에도 나는 일본의 사극을 크게 좋아하지 않았고 지금도 일본의 사극은 단 하나도 보지 않았다. 그나마 봤던 것이 애니메이션으로 넷플릭스에서 공개되었돈 '오오쿠'라는 작품인데, 이 역시 정통 사극이라기보다는, 대체 역사물로서 남성이 멸종되어가는 에도 막부 시기를 그린 일종의 판타지 장르에 해당한다.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순했다. 우리나라의 사극 대사가 현대 한국 사회에서 일상 대화를 하는 데 큰 쓸모가 없듯, 나는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 밀도 있게 접했던 일본의 콘텐츠는 대부분 '훗날 일본인과의 대화를 나누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라는 기준으로 판단하여 접했기 때문에, 존댓말과 고풍스러운 말투가 등장하는 일본의 사극을 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상투와는 다르게 일본의 상투인 '촌마게'는 너무나도 인물의 미모를 죽여놓기에. 





때문에 디즈니 플러스에 에미상 18관왕의 빛나는 쇼군이 공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큰 흥미가 일지는 않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모티브로 한 동명의 소설 원작이라는 사실도 내게는 큰 흥미 유발 요소가 아니었다. 게다가 미국에서 제작이 된 동양풍의 드라마라면, 지겨울정도로 답습하는 오리엔탈리즘의 향연을 내가 앉아서 봐야한다는 선입견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만, 개인적으로 마스크를 맘에 들어하는 배우인 '아사노 타다노부'와 '사나다 히로유키'가 등장한다는 점과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에서 등장하는 쇼군의 짤막한 소개 영상이나 콘텐츠에서 '조선'이 언급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1500년대 후반을 다루는 일본 사극은 대부분 조선을 '침략'했다는 것을 부정하고, 역사의 큰 흐름으로 인해 '어쩔 수 없었다'라는 스탠스와 함께 조선을 침략한 장군들을 굉장히 우호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당연했기에 꼴보기 싫었던 탓인데, 생각보다 내가 접한 숏폼의 콘텐츠에서는 '임진왜란'을 덤덤히 묘사하고 있었다. (물론 그냥 짤막하게 언급하는 수준이라 작품의 시간선이 어디쯤인지를 가늠하게 하는 역할로서 사용했을 뿐이겠지만)


그렇게 반신반의하며 틀었던 드라마는 조상님들께 참 죄송스럽게도 나의 추석 연휴를 전부 앗아갔다.





'쇼군'은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역사 중 하나인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났던 당시 1500년대 후반에서 160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일본에 최초로 입국하게 된 잉글랜드인인 '윌리엄 애덤스'와 에도 막부의 초대 쇼군으로 등극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모티브로 제작한 대체 역사물 드라마다. 극중, 훗날 '안진'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쇼군의 친위대 대장 격의 지위에 해당하는 '하타모토'까지 역임하게 되는 '존 블랙손'이 바로 실존 인물인 윌리엄 애덤스를 모티브로 한 것이며, 강직한 성격을 가졌지만 동시에 '흐르는 바람을 읽으며' 자신의 식솔들까지 죽음으로 내몰면서도 천하를 손에 쥐려하는 야심가인 '요시이 토라나가'가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이다.


내가 일본의 다른 사극을 시청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확한 비교분석은 불가능하지만, '쇼군'이 여타의 일본 드라마, 그 중에서도 특히 서양인 배우가 등장하는 동서 대통합을 시도하는 야심을 지닌 일본 드라마와 확연히 다른 차이점은 바로 '서양인의 시선이 철저히 배제'되었다는 점이다. 




넷플릭스에 공개된 '기리/하지'라는 드라마는 일본과 영국을 오가며 벌어지는 야쿠자와 경찰 형제의 해프닝을 다룬 작품이다. 일본 배우들은 영어를 써야하고, 서양 배우들은 그 서툰 영어를 알아듣고 연기를 해야하며, 일본의 캐릭터와 영국의 캐릭터를 연결해주는 '통사'와도 같은 캐릭터가 필요한데, 아니나다를까 일본과 영국의 혼혈 태생인 캐릭터가 그 역할을 수행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장치들은 몰입을 위해 필수적으로 구비되어야하는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장치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 극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장치로서의 캐릭터를 직조하는 것은 전세계에 내로라하는 작가들과 제작자들에게도 무척이나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캐릭터는 복잡하고 다양할수록 소비하는 맛이 있지만 동시에 복잡성이 과중하게 부여될수록 극에서 붕-뜨게 되며, 그 캐릭터가 등장하는 이유는 이야기의 진행과 시청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수단'이라는 인식을 더 강하게 부여하기 때문이다. (죠죠의 '스피드웨건'과도 같은 캐릭터는 무조건 등장해야하는 필수적인 장치지만, 이를 정극에서 활용하는 것은 정말 부단한 고민과 결단이 필요하다.)




국가 간의 콜라보레이션이 진행된 초국가적 콘텐츠에서 그 어려움이 여실히 드러나기 마련인데, '쇼군'은 그 어려움을 '역사적 사실'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요소를 이용해 매우 자연스럽게 추가하는 데 성공했다. 훗날 안진으로 불리게 되는 영국인 존 블랙손은 일본에 체류하는 짧은 기간 동안, 언어가 통하지 않아 계속해서 갈등을 빚는데, 이는 사실 극을 매끄럽게 진행하는 데 있어서 매우 불편한 요소다. 조금 치고 나간다-싶으면 언어가 걸리고, 인물이 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도 속도가 나지 않기에 어느 순간에는 포기해야하는 구간이 등장하기 마련인 것이다. 그러나 '쇼군'은 안진과 토라나가 사이를 보좌하는 '마리코'라는 인물에 엄청난 활기와 생명력, 무게감을 부여하는 데 치중했다.




토라나가가 신뢰하는 가신으로 등장하는 '토다 마리코'는 귀족집안의 영애였으나, 훗날 아버지 세대가 반란을 저지른 죄로 인해 연좌제가 적용되어 극중에서 남편에게까지 핍박을 받는 기구한 인물이다. 그녀는 좋은 교육을 받았고 몸가짐이 단정하며 동시에 당시 일본인이 중요시했던 충절의 무게감을 아는 캐릭터였으나, 반란자의 딸이라는 처지로 인해 귀족으로서 떠받들어질 수도 없고, 동시에 토라나가는 신뢰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주변 인물이 함부로 대하지는 못하는 이중적인 위치에 놓인 인물이다. 그녀는 매번 스스로 목숨을 끊기를 바라나, 토라나가의 머릿속에는 그녀를 활용할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치욕을 씻지도 못하는 암울한 상황을 견뎌야만 했다. 때문에 그녀가 선택한 것은 기독교에 귀의하여 안정을 찾고자 하고, 그 과정에서 기독교를 설파하는 목사의 도움을 받아 영어를 공부할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당시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그녀가 높은 지위에 있는 토라나가를 독대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음과 더불어 부족할 것 없는 높은 신분의 일본인이 영어를 과연 능통하게 구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 역시 자연스럽게 풀어갈 수 있도록, 모티브가 된 인물인 '가라샤'의 특징을 필요한 만큼 잘 활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진은 마리코에 의해 다양한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게 되고, 마리코 역시 안진과의 관계에서 위안을 얻기도 하고, 안진이 토라나가에게 중요해질수록 마리코의 중요도 역시 올라간다는 점에서 일본 내에서 배신자이자 이방인으로 존재했던 두 인물이 서로를 의지해나가는 일화들이 자연스럽게 '장치'이자 '큰 이야기의 흐름'으로서 활용된다는 점에서 완성도가 굉장히 높다고 볼 수 있겠다. 즉, 콘텐츠 소비자를 서양인을 중심으로 둔 세계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정말 당시 일본의 시대 배경으로 몰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극 중에서 비중있게 다루어지는 서양인은 존 블랙손 한 명이기에, 그의 시선에서 바라본 당대 일본의 문화와 생활상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주는 데 있어서도 마리코라는 장치적 캐릭터의 개입이 억지스럽지 않고 매우 자연스럽게 활용된다. 시청자에게 정보를 주는 창구를 블랙손 한 명으로 좁혀놨기 때문에 가능한 흐름이다. 


이 외에도 '쇼군'을 시간내어 볼 가치는 차고 넘친다.








속도감보다는 완성도를 택했고, 대규모의 전투보다는 인물들 간의 암약과 정치적 모략, 인물의 내면묘사를 그려내는 데에 치중했기에 숨이 막힐 듯한 몰입도를 선사한다. 대체 역사물이기 때문에 '다음이 어떻게 될까'라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동시에, 거대한 역사적인 흐름에 있어서는 궤를 동일하게 끌고 나가기 때문에, 타임머신을 타고 세키가하라 전투 직전까지의 상황을 시청자가 직접 엿보는 것과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의 긴장감마저 챙겼다. 답답하고 우직한 역사 고증을 고집하기보다는 유연한 서사의 변형 속에서, 몰입의 정도를 해치지 않을 정도의 의상, 배경 재현이 완성도 있게 구현되었다고 나는 보았다.





무엇보다 토라나가의 존재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결국 정상에 오른다-는 바꿀 수 없는 역사적 결말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토라나가가 궁지에 몰리게 되는 상황 속에서 시청자는 이미 '쇼군'의 덫에 빠진 셈이 된다. 전쟁과 기근, 측근의 배신과 더불어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구축해야하는 군주로서의 '명분'을 쌓는 서사의 흐름 속에서 '이렇게까지 캐릭터를 코너에 몰리게 한 뒤에 대체 어떻게 다시 재기시키려고 하는 것일까'와 같은 메타적인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게 만드는 것이다. 이걸 가능케 했던 것은 시나리오 작가의 공도 크지만, 그 사이에서 과연 '토라나가는 계책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정말로 절망한 것인가, 이대로 패퇴하게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지금 이렇게 고개를 숙이며 도망치는 데에도 훗날을 도모하려는 그의 야심이 아직 있는 것인가'와 같은 갈등이 시청자의 머릿속을 휘저어 놓는다. 이에 더해 자칫 붕-뜰 수 있을 수도 있었던 조연 야부시게의 갈팡질팡하는 행동 및 심리묘사와 불운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에게 놓인 도리를 다 하려는 조연 우사미 후지와도 같은 캐릭터의 감초 같은 열연과 존재감이 '쇼군'이라는 극의 살을 풍성하게 찌워주고 있었다.


'쇼군'은 정말 잘 만든 이야기다.


잘 만든 이야기는 캐릭터의 과단성과 그가 극복해나가는 영웅서사 속의 카타르시스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많지만, '쇼군'은 이러한 기본을 철저히 지키되 카타르시스를 시청자가 마주하기까지의 그 여정을 인내심 깊게 비틀고 꼬아버린 노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누군가가 꼭 시청해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고 본 사람들과 충분하고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은 심정이 지금 나의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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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다양한 일본의 콘텐츠를 접해왔지만 그럼에도 나의 내면을 차지하는 일본 콘텐츠의 인상은 80년대 버블 경제로부터 기인한 '스타일리시'하지만 동시에 서사로서의 알멩이는 조금 빈약한 존재였다. 카우보이 비밥이나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와 같은 작품들은 오직 그 스타일리시함으로 부족한 부분을 일격돌파해버리는 매력이 있긴 했지만. 그게 현재의 넷플릭스까지 이어져 내려와, 때깔은 준수하지만 그럼에도 남에게 추천할 수는 없는 작품들이 많았다. 


그러나 '쇼군'은 이렇게 말해도 될는지 모르겠지만 그간 넷플릭스와 왓챠를 채워왔던 '양산형 콘텐츠'와는 확연히 다른 서사적 깊이와 정갈하게 꾸며놓은 시대적 배경묘사로 인해 충분히 지금껏 많은 사람들이 눈을 감고도 추천하는 드라마 작품들 사이에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해도 될 정도의 퀄리티라고 말할 수 있지 않나 싶다.


질투가 난다. 창작의 영역 중에서도 역사물은 또 다른 층위에 속한다. 역사물의 몰입도를 좌지우지하는 기준은 바로 '고증'에 있다. 한 줄을 쓰는 데에도 미묘한 톤과 시대상에 꼭 걸맞는 내면묘사가 뒷받침 되어주어야 시청자 혹은 독자의 여정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 '쇼군'을 만든 사람들은 마치 파인 다이닝의 셰프가 가니쉬 하나 얹는 데에도 오랜 시간을 쏟아 고민하는 것과 동일한 행위를 극에 해두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때문에 질투가 난다. 자본의 투입과 다양한 어른의 사정과는 별개로, 이 극에 애정을 담아 디테일한 부분을 잡아내려 했던 그들의 섬세함에 질투가 나고 동시에 이를 실현할 수 있도록 제작사에 일본인 스태프의 참여를 독려한 배우 '사나다 히로유키'의 강단 역시도. 


가라샤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마리코는 행복하길 바란다. 삶이란 건 가끔씩 그녀가 느낀 바와 같이 사슬처럼 느껴질 때가 많으니. 가문이나 명분에 얽매이지 않는 현대의 나조차 그런 사슬과도 같은 얽매임에 답답함을 느낄 때가 많은데 하물며 그 시대 반역자의 딸은 오죽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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