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 선생님을 화형에 처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아무 짝에도 쓸모없고, 뭘 가르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질문들을 잔뜩 늘어놓는가 하면, 보통은 손목에 쥐가 나도록 받아 적는 수업을 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철학 수업이 똑같지 않다. 철학은 누구에게 배우냐에 따라 가장 재미있을 수도, 재미없을 수도 있다. 나는 후자가 되기 위해 노력을 할 테니, 불을 붙이는 것은 조금만 참아주기를 학생 여러분에게 부탁한다.
1.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철학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이번 시간부터 철학에 대해 한 학기 간 공부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배우려는 철학은 무엇인가? 유감스럽지만 나도 속이 시원하게 대답해 줄 수 없다. 가르치는 사람이 철학이 무엇인지 속이 시원하게 말해 줄 수 없다니? 참으로 난감하다. 하지만 조금만 인내심을 가지고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어 주기를 부탁한다. 이런 난감함은 '철학'이 가진 오묘한 특성에서 나오는 것이니, 이것도 철학을 이해하는 길이 될 것이다. 다음 글을 읽어 보자.
줄 라슐리에(Jules Lachelier, 1832-1918)가 뚤루즈에서 처음으로 교사생활을 시작할 때, 그는 개강 강의에서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내놓고, 그리고 그 스스로 <나는 모른다!>라고 대답하여, 젊은 학생들을 놀라게 하였다.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 자기의 담당과목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하여, 뚤루즈 사람들은 빠리로부터 부임한 이 젊고 우수한 철학자를 비웃었다.
그러나 줄 라슐리에의 말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즉 철학은 지식의 재료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학문에는 배워야 할 것이 있다. : 수학에서는 정리를 가르치고, 물리학을 비롯한 자연과학이나 역사학에서는 사실이나 사건의 전체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철학에는 이런 것이 전혀 없다. 물론 몇몇 위대한 철학자들의 관념과 이론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들의 이론에 동의하고, 이들의 이론을 인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모든 전문가들이 동의하는 철학체계도 없다. 예를들면 토마스 아퀴나스와 칼 마르크스는 둘 다 위대한 철학자이다. 그러나 이들의 체계는 전혀 다르며 적대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만일 여러분이 철학으로부터 정확하고 확실한 지식의 총체를 기대한다면, 그래서 여러분이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그러한 지식의 총체를 기대한다면, 여러분은 완전히 실망하고 말 것이다.
철학이 우리에게 지식을 제공해 주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살아가는 기술이나 도덕은 제시해 주는가? 그러나 인간의 행동규칙을 제시하는 체계는 세계를 설명하는 체계들 만큼이나 많고 다양하다.
철학에는 공리나 물리학적 법칙과 같은 차원의 진리가 없다. 역사가 흐르면, 체계들은 그 다음의 체계들로 이어진다. 그런데 철학자들은 모두 제각기 자기 이전의 철학자들을 반박하는 데 열중하고 있으며, 결국은 자기 자신도 반박당하고 말 것이다. <철학을 종결시키려는 것이 모든 철학의 은밀한 맹세였지만, 어떤 철학도 철학을 종결시키지 못하였다.> 구스도르프(Gusdorf)는 말한다. 이와같이 철학자들도 화가, 음악가, 시인과 같은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각자 자기나름대로 세계를 보고 설명하는 방식인 자기 고유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철학자들간의 논쟁과 의견의 차이 때문에 회의주의(scepticisme)에 빠지는 사람은 사실은 게으른 사람이다 “ 게으르지 않은 사람은 오히려 철학자들이 논쟁하던 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자기 스스로 반성해보고 싶은 강한 유혹을 받을 것이다. 철학의 이론은 그 내용이나 결론 때문에 귀중한 것이 아니라, 엄정하게 수행하려고 노력하는 철학자의 반성의 본보기 때문에 귀중한 것이다. 그래서 임마누엘 칸트는 <배울 수 있는 철학은 없다. 단지 철학하는 것만을 배울 수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 앙드레 베르제즈, 드 니 위스망 『프랑스고교철학1. 인간학•철학•형이상학』, (주)삼협종합출판부, 2002. 9~11쪽.
우리는 흔히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이나 『생활과 윤리』 같은 과목을 배우고, 『서양철학사』같은 책들을 읽으며 학자들의 사상을 외우고, 암기하고나서 철학을 공부했다고 오해하곤 한다. 그런데, 이것은 '철학사'를 공부한 것일 뿐이다. 물론 여러분이 한 것도 철학 공부가 아닌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철학사를 공부하는 것만으로 제대로 된 철학 공부를 했다고 말해선 안 된다. 왜냐하면 거기에 여러분의 '생각 '없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앵무새가 인간의 말을 잘 외우고 따라한다고 해서 앵무새가 인간 만큼의 이성을 지니고 있으며 생각하는 능력을 지녔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철학사를 잘 공부해 각 사상가의 주장을 암기했다고 해서 그것이 철학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인 것은 아니다. 철학사는 철학함에 필요한 도구이지, 철학함의 본질이 아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수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기초적 도구인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을 배워야 하고 '피타고라스'의 정리 따위의 공식도 배워야 한다. 철학에서도 여러분들이 하고싶은 주장을 펼치는데 도구를 써야 한다. 그러니까 사상가들의 주장을 사용하는 것이지, 그 사상가들의 주장을 암기하고, 잘 말하는 것이 핵심적인 것은 아니다. 단순히 공식을 잘 암기하고 있다고 수학 문제를 잘 푸는 것은 아니듯이, 마찬가지로 철학자들의 '사상'을 잘 암기하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
자. '철학'이 무엇인지는 말하기 어렵지만 철학을 하는 과정 자체가 중요하다는 말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2. 지혜, 빛, 어두움, 무명, 어리석음
철학은 영어로 philosophy이다. 이는 고대 그리스어로 필레인(Φιλειν, 사랑하다)과 소피아(σοφία, 지혜)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philosophy란 '지혜를 사랑하다'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철학(哲學)이란 한자도 지혜를 사랑한다는 뜻일까? 철(哲)은 '밝을 철'이다. 그렇다면 철학이란, '밝음에 대한 학문'이란 뜻이 되는데, 무슨 말인지 통 이해가 안된다. 예를 들어 물리학이라 하면 물리를 배우는 거고, 수학이라 하면 수(數)에 대해 배운다. 문학은 문(文)이라는 소설, 시 등을 배울 것이다. 명백하다. 그런데 철(哲)을 배운다는 건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아무래도 이름을 잘못 지은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철학이란 원래 우리 동양(유교) 문화권에 존재했던 말이 아니다. 이 말은 19세기 말 일본의 학자 니시 아마네가 philosophy를 일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북송 시대 유학자 주렴계의 「통서(通書)」라는 책에서 '선비는 현명하기를 바란다(士希賢)'라는 말을 따와 philosophy를 '희철학(希哲學)'이라는 말로 번역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렇게 philosophy가 번역된 과정을 살펴보니, 철학이란 말도 지혜를 사랑한다는 말과도 상통하는것 같다. 선비는 현명해지기를 바란다는 것은 지혜를 얻어 무명(無明)에서 빠져나오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무명이란 빛이 없는 것, 즉 어두움이다. 불교에서는 진리를 깨치지 못한 '어리석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한다. 지혜가 없고, 어리석으며, 빛이 없는 상태란 무엇일까? 아래 그림을 머릿속에 상상하면서 다음 글을 읽어 보자
이를테면, 지하의 동굴 모양을 한 거처에서, 즉 불빛 쪽으로 향해서 길게 난 입구를 전체 동굴의 너비만큼이나 넓게 가진 그런 동굴에서 어릴 적부터 사지와 목을 결박당한 상태로 있는 사람들을 상상해 보게. 그래서 이들은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앞만 보도록 되어 있고, 포박 때문에 머리를 돌릴 수도 없다네. 이들의 뒤쪽에서는 위쪽으로 멀리에서 불빛이 타오르고 있네. 또한 이 불과 죄수들 사이에는 위쪽으로 길이 하나 나 있는데, 이 길을 따라 담이 세워져 있는 걸 상상해 보게. 흡사 인형극을 공연하는 사람들의 경우에 사람들 앞에 야트막한 휘장(칸막이)이 쳐져 있어서, 이 휘장 위로 인형들을 보여 주듯 말일세. 더 나아가 또한 상상해 보게나. 이 담을 따라 이 사람들이 온갖 인공의 물품들을, 그리고 돌이나 나무 또는 그 밖의 온갖 것을 재료로 하여 만들어진 인물상들 및 동물상들을 이 담 위로 쳐들고 지나가는 걸 말일세. 또한 이것들을 쳐들고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서 어떤 이들은 소리를 내나, 어떤 이들은 잠자코 있을 수도 있네. (이들은) 우리와 같은 사람들일세. 글쎄 우선 이런 사람들이 불로 인해서 자기들의 맞은편 동굴 벽면에 투영되는 그림자들 이외에 자기들 자신이나 서로의 어떤 것인들 본 일이 있을 것으로 자네는 생각하는가?
그러면 생각해 보게, 만약에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식으로 사태가 자연스레 진행된다면, 이들이 결박에서 풀려나고 어리석음에서 치유되는 것이 어떤 것이겠는지 말일세. 가령 이들 중에서 누군가가 풀려나서는, 갑자기 일어나서 목을 돌리고 걸어가 그 불빛 쪽으로 쳐다보도록 강요당할 경우에, 그는 이 모든 걸 하면서 고통스러워할 것이고, 또한 전에는 그 그림자들만 보았을 뿐인 실물들을 눈부심 때문에 볼 수 없을 걸세. 만약에 누군가가 이 사람에게 말하기를, 전에는 그가 엉터리를 보았지만 이제는 진짜에 좀은 더 가까이 와있고 또한 한결 더한 실상을 향하여 있어서, 더욱 옳게 보게 되었다고 한다면, 더군다나 지나가는 것들 각각을 그에게 가리켜 보이며 그것이 무엇인지를 묻고서는 대답하도록 강요한다면, 그가 무슨 말을 할 것으로 자네는 생각하는가? 그는 당혹해 하며, 앞서 보게 된 것들을 방금 지적받은 것들보다도 더 진실된 것들로 믿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가? 또한, 만약에 그로 하여금 그 불빛 자체를 보도록 강요한다면 그는 눈이 아파서, 자신이 바라볼 수 있는 것들로 향해 달아날 뿐만 아니라, 이것들이 방금 지적받은 것들보다도 정말로 더 명확한 것들이라고 믿지 않겠는가?
만약에 누군가가 그를 이곳으로부터 험하고 가파른 오르막 길을 통해 억지로 끌고 간다면, 그래서 그를 햇빛 속으로 끌어내 올 때까지 놓아 주지 않는다면, 그는 고통스러워하며 또한 자신이 끌리어 온 데 대해 짜증을 내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가 빛에 이르게 되면, 그의 눈은 광휘로 가득 차서, 이제는 진짜들이라고 하는 것들 중의 어느 것 하나도 볼 수 없게 되지 않겠는가? 그러기에 그가 높은 곳의 것들을 보게 되려면, 익숙해짐이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하네. 처음에는 그림자들을 제일 쉽게 보게 될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물 속에 비친 사람들이나 또는 다른 것들의 상들을 보게될 것이며, 실물들은 그런 뒤에야 보게 될 걸세. 또한 이것들에서 더 나아가, 하늘에 있는 것들과 하늘 자체를 밤에 별빛과 달빛을 봄으로써 더 쉽게 관찰하게 될 걸세, 낮에 해와 햇빛을 봄으로써 그것들을 관찰하는 것보다도 말일세.
마지막으로 그가 해를, 물 속이나 다른 자리에 있는 해의 투영으로서가 아니라 제자리에 있는 해를 그 자체로서 보고,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관찰하게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네.
- 플라톤 지음, 박종현 역주, 『국가』, 서광사 514a ~ 516c
이 글을 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에 따르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과 내가 수업을 하고 있는, 여러분의 두 눈으로 보고 있는 현실은 '가짜' 세상이다. 플라톤은 지금 우리의 모습을 동굴 속에 묶여 그림자만 쳐다보고 있는 죄수에 비유하고 있다. 한마디로 우린 어두운 세상 속에 살고 있으며, 속고 있다는 것이다. 동굴 속에만 살았던 우리는, 여기가 어두운 동굴인지 모른채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어떤 죄수는 묶여있던 자신의 몸을 풀고, 자유를 얻기도 한다. 결박에서 풀려난 죄수는 처음에는 자신의 등 뒤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을 바라보고 놀라게 된다. 어두운 곳에서 갑자기 빛을 보아서 눈부심 때문에 눈을 뜨지 못한 경험을 상상해보면 된다. 눈부심은 고통스럽지만 오래가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 죄수는 자신이 살고 있던 동굴을 나와 밖으로 걸어 나간다. 동굴 밖에는 태양이 있기 때문에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눈부심을 또 경험해야 한다. 이 눈부심에 익숙해지면 죄수는 '진짜' 세계를 보게 된다. 처음에는 물가에 비친 나무를, 그 다음에는 진짜 나무를, 그리고 마지막은 그 나무를 볼 수 있게 해주는 태양을 본다. 죄수는 깨닫게 된다 태양의 빛은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만들어준다. 플라톤의 이 글에서 동굴 밖 태양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그것은 궁극적인 지혜, 참된 앎, 진리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는 우리가 철학을 공부하는 과정을 비유적으로 알려준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만약 철학을 공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동굴 속에 수감된 죄수와 다를 바 없다. 반면에 철학을 공부하면 여러분은 죄수의 상태에서 해방될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은 녹록치 않다. 플라톤의 동굴 속 죄수가 여러 차례 눈부심을 경험하며 고통스러워했듯이, 지혜를 추구하며 공부를 밟아나가는 나와 여러분 역시 고통을 겪을 수 밖에 없다. 당연하게 생각하던 것들에 질문을 던지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에 질문을 더해 나가다 보면, 그 과정이 괴로워서 도망가고 싶어지고는 한다. 하지만 고통을 견뎌야 한다. 그 고통을 견디고, 꾸준히 철학을 공부하는 과정이 있어야지만 우리는 동굴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어떤 학생은 "동굴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모른 채로 행복한 사람들도 있지 않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실제로 우린 지금까지 늘 그런대로 잘 살아왔지 않던가. 인스타그램을 보면 이 세상에 불행한 사람은 없어 보인다. 모두가 잘 먹고, 잘 자고, 잘 소비하고 있다. 아무런 문제도 없는데, 왜 동굴 밖을 나가야 하는가?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 눈부심이라는 괴로움을 준다면 굳이 사서 고통스러워 할 이유가 있는가?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철학이란 것을 행복하고 건강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학문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고통을 느끼지 않고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길들여졌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길든다는 것은 동물적인 특성이다. 동물들은 배가 고프면 채우려 하고 뜨거우면 피하려 하고 아프면 비명을 지르는 것과 같은 조건 반사한다. 고통을 피하려고 길드는 것이다. 길들기를 거부하는 것은 동물적인 본능을 거부하는 것이고 그 반대는 행복한 동물로 남기를 바라며 싸우기보다 순응하고, 반발하기보단 길들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플라톤이 <동굴의 비유>로써 보여주려 했던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란 모두 이런 식으로 길든 공간일 뿐이라는 것이다. 곧 길들이는 것은 무엇이나 다 동굴이고, 길드는 자는 누구나 다 죄수이다. 길든다는 것만으로 우리의 현실은 동굴로 변하고 우리는 그 안에 죄수처럼 갖히게 되는 것이다.
영화 「빠삐용」에서 무고한 죄로 절해고도의 감옥에 갖히게 된 주인공 빠삐용이 어느 날 꿈을 꾼다. 그곳은 법정이었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무죄를 강변한다. 그러나 재판관은 이렇게 판결한다. <너는 유죄다. 그 감옥 안에 주저앉아 길든 채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너는....> 이 판결에 주인공은 힘없이 중얼거리는 독백으로 승복하게 된다. <그래 맞아, 나는 유죄야. 여기에 주저앉아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나는....>
- 이왕주 지음, 『철학풀이 철학살이』, 민음사, 1995.
여러분은 지금 '행복'한가? 그러나 만일 그 행복이 동굴 안에서의 행복이고 죄수의 쾌락이라면 어떻게 될까? 사실 우리는 단지 배부른 돼지의 상태이고, 살찐 애완용 개의 행복에 지나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자 이제 동굴 밖으로 나오고 싶은 욕망이 좀 생겼는가? 동굴 안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를 것이고, 다른 사람이 살아가는 대로 따라 살아가며, 한 번뿐인 소중한 삶을 그저 '생존'하는데 허덕이며 낭비할지 모를 일이다. 적어도 철학 수업을 시작하는 자리이니 동굴에 남고 싶다고 말하지 말고, 여기서 탈출하기 위해 노력하자. 만약 철학을 공부했는데도 동굴 속의 삶이 더 좋다고 여겨진다면, 그때 돌아가도 늦지 않는다. 그러나 난 여러분들이 철학을 공부하고 나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3. 동굴 밖으로 탈출하는 방법
동굴 밖으로 나가려면 플라톤이 말했듯이, 동굴 밖으로 탈출을 감행해야 한다. 비유에 등장한 죄수처럼 태양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비록 플라톤은 그런 태양, 즉 진리가 객관적으로 있을 것이라 보았지만) 유감스럽게도 여러분이 배워야 할 정해진 지혜는 없다. 그래서 서두에서 철학에 대해 "나는 모른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둠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혜를 얻는다는 것은, 여러분 각자의 몫이다. 철학 선생님은 동굴 밖으로 나가는 길을 함께 하는 동료 정도라고 생각해야 한다. 동굴 밖으로 나가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여러분 스스로의 몫이다. 앞서 철학은 '과정'이 소중하다고 이야기 했던 것을 기억하는가? 어느 순간 정해진 지혜를 얻어서 단번에 동굴 밖으로 나가는 요행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철학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여러분들도 모르는 사이에 동굴 밖으로 나가게 될 것이다.
철학은 과정이 중요하다 했으니, 그 과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을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스승님을 한 분 모셔야 하는데, 여러분도 익히 들어보았을 철학자 '소크라테스(Σωκράτης , Socrates)'다. 소크라테스는 지금으로부터 약 25세기 전 (무려 기원전 470년 경 – 기원전 399년 5월 7일) 사람이다. 그는 아테네라는 도시 국가에서 활동했는데, 그가 '철학을 한 방법'이 우리에게 동굴을 탈출하는 방법을 알려줄 것이다.
어느 날 소크라테스의 친구가, 델포이 신전에 가서 질문을 던진다.
"소크라테스보다 현명한 사람이 아테네에 있을까요?"
그러자 신은 무녀를 통해 신탁을 내려 대답한다.
"없다"
소크라테스의 친구는 소크라테스를 찾아가 이 신탁을 전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의아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을 '무지(無知)'한 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평소에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런데 자신이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니?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신탁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나는 분명 무지한 사람이다. 그런데 어째서 신들은 나를 가장 지혜롭다 하는가? 신들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 나는 아테네에서 자신을 지혜롭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만나보아야겠다. 그들과 대화를 해본다면, 분명 나보다 지혜로운 자가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신탁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겠지"
이때부터 그는 아테네의 시장, 거리, 공공장소 등 다양한 공간에서 자신이 지혜로운 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자신에게 앎과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무자비하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소크라테스가 어떤 식으로 질문을 던졌는지 살펴보자.
소크라테스: 그러면 라케스님, 용기가 무엇인지부터 말해보기로 해요. 그런 다음 젊은이들이 어떤 방법으로 용기를 획득할 수 있는지 고찰하기로 하지요. 활동이나 학습을 통해 용기를 획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말이에요. 자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보세요. 용기는 무엇인가요?
라케스: 제우스에 맹세코, 그건 어렵지 않아요, 소크라테스님. 누가 밀집대형에서 제자리를 지키며 적군을 물리치고 도망치지 않는다면, 잘 알아두시오, 그런 사람이야말로 용감한 사람이겠지요.
소크라테스: 옳은 말씀입니다, 라케스님. 한데 그대가 동문서답하신것은 내가 명확하게 표현하지 않은 탓인 것 같네요.
라케스: 무슨 말씀인가요 소크라테스님?
소크라테스: 내가 할 수 있는 한 설명해보겠어요. 그대 주장에 따르면, 밀집대형에서 제자리를 지키며 적군을 물리치는 사람이 용감한 사람입니다.
라케스: 네, 나는 그렇다고 주장해요.
소크라테스: 나도 동의해요. 한데 제자리를 지키지 않고 후퇴하면서 적군과 싸우는 사람은 어떤가요?
라케스: '후퇴하면서'라니, 그게 무슨 뜻이지요?
소크라테스: 사람들이 말하기를, 스퀴타이족은 후퇴할 때도 적군을 추격할 때 못지 않게 효과적으로 싸운다더군요. 호메로스도 '이리저리 추격하거나 도망치는 데 능숙하다'고 아이네이아스의 말들을 칭찬하는가 하면, 아이네이아스 자신도 공포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칭찬하며 그를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어요.
라케스: 호메로스가 그러는 것은 옳아요, 소크라테스님. 그는 전차에 관해 말했으니까요. 그대도 스퀴타이족의 기병들을 말하는 것이고요. 아닌 게 아니라 기병들은 그렇게 싸우지요. 하지만 중무장 보병들은 내가 말한 것처럼 싸워요.
소크라테스: 그래서 나는 조금 전에 그대가 동문서답하신 것은 내가 잘못 질문했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나는 중무장 보병들을 위한 용기뿐 아니라 기병들과 모든 분야의 전사들을 위한 용기에 관해서도 그대에게 묻고 싶었으니까요. 또한 전쟁에서 용감한 사람뿐 아니라 바다에서 위기에 맞닥뜨려 용감한 사람과 질병과 가난과 나랏일에서 용감한 사람, 나아가 고통과 두려움에 직면해 용감한 사람, 욕망과 쾌락에 영웅적으로 맞서 싸우는 사람들도 거기에 포함하고 싶었지요. 그들이 제자리를 지키든 적에게 등을 돌리든 말이에요. 라케스님, 이런 상황에서도 용감한 사람이 더러 있을 테니까요.
라케스: 그렇고 말고요 소크라테스님.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용기와 비겁함은 각각 무엇인가요? 나는 그것이 알고 싶어요. 그러니 먼저 이 모든 상황에서 동일한 것인 용기에 대해 한 번 더 말씀해두세요. 혹시 내 말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셨나요?
라케스: 정확히는 이해하지 못했소.
소크라테스: 내 말뜻은 이런 겁니다. 내가 그대에게 속도가 무엇인지 물었다고 가정해보세요. 그런데 속도는 달리기, 뤼라 연주, 말하기, 배우기 등등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사실 우리가 사용하는 것이 손이든 다리든 입이든 목소리든 마음이든 언급할 가치가 있는 모든 활동의 속성입니다. 그대도 속도라는 말을 그렇게 사용하지 않나요?
라케스: 물론 그렇게 사용하지요.
소크라테스: 그러면 내개 "소크라테스, 그대는 그런 모든 상황에서 그대가 '속도'라고 부르는 것이 대체 무엇이라고 말하시오?"라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에게 "내가 속도라고 부르는 것은 말하기에서든 달라기에서든 그 밖의 다른 경우에서든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을 해내는 능력이오"라고 대답할 겁니다.
라케스: 그렇다면 그대는 옳은 말을 하시는 겁니다.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라케스님, 용기에 대해서도 같은 식으로 말씀해주세요. 쾌락과 고통과 그 밖에 우리가 방금 언급한 모든 상황에서 동일한 것인 그것은 대체 어떤 능력이기에 용기라고 불리는 건가요?
라케스: 나는 용기가 일종의 혼의 인내라고 생각하오. 만약 모든 상황에서 용기의 본성이 무엇인지 꼭 말해야 한다면 말이오.
-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라케스』, 요약 발췌
이후 소크라테스는 '모든 종류의 인내는 용기가 아니다'라는 점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지혜로운 용기는 고상하지만, 어리석은 용기는 해롭고 위험하기 때문이다. 용기란 미덕(美德)이기 때문에 반드시 고상한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지혜로운 용기만 인정될 것이다. 그런데, 지혜로운 인내. 그것은 정말로 용기인가? 예를 들어 나중에 더 많은 돈을 가지리라는 것을 알고, 인내를 발휘해 돈을 아껴 쓰는 사람의 경우는 어떤가? 이 사람은 분명 지혜로운 인내는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을 용기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여러분은 인색한 수전노를 보고 용기 있는 사람이라 부르지 않을 것이다. 전투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지혜로운 군인이 잘 계산하여, 현재 전장의 상황이 아군에게 유리하다는 점도 알고, 전투에 나서면 자신보다 못한 열등한 적과 싸울 것이라는 점을 안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반대편 군영에서 제자리를 지키며 인내를 발휘하는 사람이 있다. 이 상황에서 누가 더 용기 있는 사람인가? 라케스는 후자의 경우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지혜로운 인내라는 앞선 가정과 모순된다. 왜냐하면 후자의 사람은 지혜롭게 인내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속으로 들어가 잠수를 하는 사람도 생각해 보자. 잠수에 능숙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인내력을 발휘하며 잠수에 도전하는 것을 사람들은 잠수를 잘하는 사람보다 '용감하다'라고 말한다. 동시에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어리석은 방법으로 위험을 무릅쓰며 인내를 발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앞에서 용기란 고상한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지금 와서는 어리석은 인내가 용기라고 말한다. 따라서 '인내'를 용기의 보편적 정의(定義)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즉, 라케스는 사실 용기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라케스: 소크라테스님. 내가 미리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오. 내 비록 이런 종류의 토론에 익숙하지 못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토론을 하다보니 일종의 숭보욕에 사로잡혀 내가 이처럼 내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에 사실 나는 화가 나 있다오. 용기가 무엇인지 알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용기가 어디로 달아나는 바람에 말로 포착하여 표현할 수 없으니 말이오.
-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라케스』
이후에도 소크라테스는 '용기'란 무엇인지 대화를 지속해 나간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느낌으로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 과정에서 소크라테스는 깨닫는다. 놀랍게도, 자신이 '안다'라고 말하는 사람 중, 실은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 조차 모르는' 이중의 무지에 빠져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깨닫고 드디어 신탁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제보니, 아테네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은 다 자신들이 모른다는 사실 조차 모르고 있잖아? 그런데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 그러니 내가 저들보다는 현명한 것 같아."
건방지긴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지적은 정확했다. 아테네 사람들은 모두 플라톤이 말한 것과 같은 '동굴' 속에 갇혀 있었다. 반면에 소크라테스는 이 동굴 밖으로 나올 준비가 되있는, 혹은 동굴 밖을 이미 경험한 사람이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동굴의 비유를 제시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자신의 스승을 동굴에서 풀려난 현자라고 칭하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자신이 적어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다른 말로 무지를 자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자신의 의무란 곧 다른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져, 자신과 마찬가지로 '무지를 자각'하도록 돕는 것이라는 점을 깨우쳤다고 고백한다.
표현이 좀 우스꽝스러울지 모르지만, 알기 쉽게 말해 덩치가 크고 혈통이 좋지만 덩치 때문에 굼뜬 편이라서 등에(짐승의 피를 빨아 먹는 쇠파리)의 자극이 필요한 말에게 등에가 배정되듯, 신에 의해 나는 이 도시에 배정된 것입니다. 그런 등에 역할을 하라고 신께서 이 도시에 나를 배정하신 것 같습니다. 어디서나 온종일 여러분에게 내려앉아 여러분을 일일이 일깨우고 설득하고 꾸짖으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그런 사람을 쉽게 얻지 못할 것입니다.
-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소크라테스의 변명』, 도서출판 숲, 2017.
소크라테스에 대한 설명이 조금 길어졌지만. 소크라테스를 통해 우리는 철학함의 방법, 철함학의 과정을 보았다. 눈치챘는가?
그것은 바로 '대화'이다. 철학을 한다는 것, 그리고 동굴 밖으로 나가는 방법이 바로 이것이다. 대화의 영어 단어는 dialogue다. 이 말의 어원을 찾아보면 그리스어의 διά 다이아(통하여)와 λόγος 로고스(낱말, 말)가 어원이다. 즉 '말을 통하여' 우리는 무언가를 찾아나가는 것이다. 무엇을 찾는다는 말인가? 그것은 바로 질문과 의문에 대한 답변이다.
4. 의문과 질문
철학을 하기 위해서는 의문을 가져야 하고 질문을 던져야 한다. 동굴 안에 있는 사람들은 질문을 던질 줄을 모른다. 길들여졌기에 의문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은 학교에서 교칙을 지켜야 하는 이유에 대해 질문을 던져 본 적 있는가? 혹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당연하다 여겨지는 규칙에 질문을 던져 본 적은?, 보통 길들여진 사람들은 남들이 살아가는 대로 살아가고자 한다.
철학은 의심하고 의문을 품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지혜를 사랑하려면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이 알고 싶어 스스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자신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더 알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모르기 때문에 더 알고 싶어 지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몰랐기에 알고 싶어 했던 철학자이고, 다른 사람들은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자만하던 평범한 길들여진 동물이었다.
기록상 최초의 철학자로 알려진 탈레스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그는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던 '신화'에 의문을 품었을 것이고, 이 세계를 더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기록상) 인류 역사 최초의 철학적 질문을 던졌다.
만물의 원질(아르케, arche)이란 무엇인가?
그는 이 질문에 스스로 '물'이라는 답을 내놨다. 오늘 날 우리는 모든 만물을 구성하는 궁극적인 원질(원료)이 '물'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다. 탈레스가 만물의 원질을 '물'이라고 한 것은 오늘 날 아무런 가치가 없다. 하지만 그가 만물의 원질이 무엇인가 라고 던진 '질문'은 가치가 크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던 것에 대해 의문을 품었고, 질문을 던졌으며, 나름대로의 논리성을 통해 그것을 대답하려고 시도한 사람이기 때문이다.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철학이란 단순한 계기에서 시작되었다.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며 가졌던 의문들, 그리고 그 의문에서 피어나는 질문에 대한 합리적인 대답을 찾는 과정이다. 초등학교 수학 익힘책에서 "그냥"이라고 대답했던 습관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여러분의 대답이 지혜가 되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논거와 논증이 필요하다. 자신의 생각과 결론을 의심하고 수정하는 과정을 거쳐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 지혜란 사실, 영원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수정이 필요한 대상인 것이다. 플라톤은 '동굴 밖의 태양'이라는 불변의 진리가 있을 것이라 여겼으나, 사실 그것조차 알 수 없다. 플라톤도 그런 진리를 깨닫고 우리에게 전수해 주었기 때문에 훌륭한 것이 아니다. 그 역시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으려고 노력한 과정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훌륭한 것이다.
5. 철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다음 시간부터 우리는 본격적으로 철학의 '주제들'을 살펴볼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철학자들의 주장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철학사'는 여러분들이 따로 시간을 내어 읽어보기를 바란다. 안광복 선생님의 『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정도를 추천한다. 다른 책들은 고등학생이 읽기에는 시간과 노력이 너무나 많이 들어간다. (대학에 가서 읽으면 좋겠다) 나는 수업에서 역사적 순서에 따라 철학자들의 사상을 설명하지 않을 것이고, 대신 철학에서 다루는 다양한 논쟁 주제를 이야기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철학자들의 이론을 소개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수업에서 다룰 주제는 다음과 같다,
1.자연, 2. 예술, 3. 기술, 4. 자유, 5. 법, 6. 역사, 7. 의식, 8. 이성, 9.진실
수업의 과정에서 다른 주제들이 더 다루어질 수 있다. 하지만 큰 주제는 위의 9가지다. 이 주제는 주교재인 『원숭이는 왜 철학교사가 될 수 없을까』와 동일하다. 수업 전에 주교재를 반드시 읽어보아야 한다. 저자인 미셸 옹프레의 주장을 여러분들이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책을 읽어보며, 밑줄도 긋고, 의문도 적고, 반박도 해보라. 그래야지 여러분 스스로 철학을 하는 것이다. 책에 적힌 것은 진실이 아니다. 철학은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철학은 관람용 스포츠가 아니다. 여러분은 철학을 다룰 때, 기자가 아니라 철학자가 되어야 한고, 철학을 읽을 때 철학자로서 읽고 철학자로서 듣고 철학자로서 토론에 임해야 한다. 이를 위해 다음의 네 가지 규칙을 강조하고 싶다.
훌륭한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 다음 네 가지 습관을 기르도록 하라
1. 적극적으로 읽기
2. 적극적으로 듣기
3. 적극적으로 토론하기
4. 적극적으로 글쓰기
- 나이절 워버턴, 『철학 교수님이 알려주는 공부법』 참조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분명 고통스러울 것이고, 수업을 하는 시간이 죽도록 안 갈 수도 있다. 이번 기회에 그 고통을 조금만 참아보자. 그러면 분명히 수업을 듣기 전과 들은 후의 여러분은 달라져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스피노자는 "모든 고귀한 것은 힘들 뿐만 아니라 드물다(Sed omnia praeclara tam difficilia, quam rara sunt)"고 말했다. 여러분과 이번 수업에서 고귀한 것을 성취하기를 바란다.
[오늘의 과제]
길거리를 거닐면서 어떤 형태이던 상관 없이 '광고'를 최대한 보지 않으려고 노력해보라. 그리고 그 소감을 A4 한 장으로 작성해 제출하라.
철학 수업에서 여러분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싶은지 작성해보라.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번 한 학기 수업동안 찾아보라.
[참고 문헌]
앙드레 베르제즈, 드 니 위스망 지음, 『프랑스고교철학1. 인간학•철학•형이상학』, (주)삼협종합출판부, 2002.
플라톤 지음, 박종현 역주, 『국가』, 서광사, 2005.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라케스』, 『소크라테스의 변명』, 도서출판 숲, 2017.
이왕주 지음, 『철학풀이 철학살이』, 민음사, 1995.
나이절 워버턴 지음, 『철학 교수님이 알려주는 공부법』, 지와사랑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