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으로의 길 2

나치당의 지도자는 누가 뭐래도 나 히틀러인 것이다

by 꿈많은 미소년

구식의 억압적인 프로이센적 정신은 죽어서 땅에 묻힌 것처럼 보였다. 내가 만나본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 정치가들, 작가들, 편집자들, 예술가들, 교수들, 학생들, 사업가들, 노동조합 지도자들 - 민주적이고 자유주의적이었으며 심지어는 평화주의자로 충격을 주었다. 당시 독일에서 히틀러나 나치에 관해서는 가끔 농담거리로 물어뜯는 것을 제외하며 거의 듣지 못 했다. - 일반적으로 비어홀 폭동과 연관된 것이고 히틀러가 국민들에게 알려지게 된 바였다.



1928년 5월 20일의 선거에서 나치당은 총 삼천 백만 표 가운데서 단지 810,000 표만을 얻었다. 그리고 491 석으로 이루어진 라이히스타그에서 열 두석만을 가졌을 따름이었다.

보수적인 민족주의자들도 또한 큰 타격을 받았다. 이들의 득표는 1924년에 육백만에서 사백만으로 떨어졌으며 의회에서의 의석 수도 103석에서 73석으로 감소했다.


반면에 사회민주당은 1928년 선거에서 백 이십 오만의 표를 더 얻었고 이들의 총 득표수는 구백만 표를 넘었다. 라이히스타그에서 153석을 확보했고 쉽게 독일에서 가장 큰 정당이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십년 후 독일 공화국은 마침내 상황에 익숙해지고 능력에 자신이 생겨 자립적으로 살아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1928년 창당 기념일에 국가 사회주의 당의 당원 수는 108,000 명이었다. 수치적으로는 분명히 작음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늘어가고 있었다.


1924년의 말에 감옥에서 나온지 2주일이 지난 후 히틀러는 바이에른의 수상이자 바이에른 가톨릭 인민당의 당수였던 하인리히 헬트 박사를 만나기 위해 서둘렀다.

행동을 조심해서 잘 하겠다는 약속이 지켜지는 지의 여부에 따라서 (히틀러는 여전히 가석방 중에 있었다.) 헬트 박사는 나치당과 당 기관지에 대한 금지 조치를 해제해도 괜찮겠다고 판단했다.

"그 야수를 검사해 봤는데 말이오."

헬트는 법무상인 구에르트너에게 말했다.

"우리는 사슬을 느슨하게 해줄 여력이 있소."


바이에른 수상은 처음으로,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마지막은 아닐, 치명적인 판단 오류에 빠진 독일 정치가들의 대열에 합류하고야 말았다. 포엘키셔 베오바흐터는 1925년 2월 26일에 히틀러가 쓴 "새로운 시작"이라는 제목을 달고 긴 편집본으로 다시 나왔다. 다음날 히틀러는 부에르거브로이켈러에서 부활한 나치 당의 첫 번째 군중 집회에서 연설했다.



히틀러와 신의성실한 추종자들은 자신들이 비극적인 숙명을 맞이한 행진을 시작하기 일년 반 전인 11월 9일 아침에 마지막으로 만났던 것이다. 믿을 수 있는 이들 중 많은 수가 참석하지 않았다.

아카르트와 쇼이브너-리히터는 죽었다. 괴링은 망명중이었다. 루덴도르프와 룀은 지도자와 절연했다. 로젠베르크는 슈트라이허와 에서와 불화를 빚고는 멀리 떨어져서 잔뜩 뿌루퉁해 있었다. 그레고르 슈트라서도 마찬가지로 하고 있었는데, 히틀러가 철장 속에 갇혀 있고 나치 당 그 자체가 금지되어 있는 동안 루덴도르프와 함께 국가 사회주의 독일 자유 운동을 이끌었다.


안톤 드렉슬러에게 모임에서 사회자로서 주재하도록 히틀러가 요청했을때, 이 늙은 자물쇠공이자 당의 창건자는 히틀러에게 악마에게나 가라고 소리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락 사천 명의 추종자들은 다시 한 번 히틀러의 연설을 듣기 위해서 맥주 홀에 모여들었고 히틀러는 이 당원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히틀러의 능수능란한 언변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감동적이었다.

두 시간 동안의 일장 연설이 끝난 후에 군중은 박수를 치면서 포효를 울려 대었다. 많은 이가 당을 떠났고 앞으로에 대해 암울한 전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자신이 여전히 당의 독재적인 지도자라는 점을 명확하게 했다.


"나만이 이 운동을 지도하며 그 누구도 내가 개인적으로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한 어떠한 조건도 나에게 부과할 수는 없다."

히틀러는 이렇게 선언하고는 덧붙여 말했다.

"이 운동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책임 전부를 다시 한 번 더 내가 짊어진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권력으로의 길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