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영은 계속되지 않으며 행복은 오래가지 않고 반드시 기회는 온다
1929년에 대공황이 찾아 올 때까지 1925년 이후의 해들은 히틀러오 나치 운동에게 있어서는 침체된 시기였다. 하지만 결코 희망이나 자신감을 잃지 않고 인내하고 있는 것이 이 시기를 감내하는 히틀러의 조치이기도 했다.
자주 히스테리의 과도한 분출로 이어지는 격하기 쉬운 성질이 히틀러의 본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다릴 줄 아는 참을성과 당시 시대적으로 독일 전역에 정착되어진 물질적인 번영과 안도의 감정이 대체적인 분위기라는 점을 알아차리는 영악함도 또한 가지고 있었다. 통찰하고 있기는 했지만 경제적 번영과 사회적으로 느슨해진 인심은 히틀러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안성맞춤인 상황은 아니었다.
히틀러는 이런 좋은 시대가 계속 지속되지는 않은 것이라고 자신했다. 히틀러가 말하기를 독일이 어떤 문제에 신경을 쓰게 되는 시기 있는 한 그들은 독일의 힘이 아니라 다른 이의 힘에 달려있다는 것이었다. - 무엇보다 그것은 미국이었다.
불어난 금융적인 재원들로 제공된 대출이 독일을 번창하게 만들었고 그 부유함을 유지시키고 있던 것이었다. 1924년과 1930년 사이에 독일은 대략 칠십 억 달러에 달하는 돈을 빌렸는데 그 대부분은 미국의 투자자들에게서 나왔다. 당시 이들은 독일인들이 최종적인 상환 자금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 거기다 독일인들은 그 문제에 대해 훨씬 덜 생각하고 있었다.
공화국은 미합중국과 그 나라의 투자자들로부터 자금을 빌려서 자신의 전쟁 배상금의 분할 상환과 광대한 사회 기반 설비의 유지 및 사회 복지에 소요되는 금액을 충당했다.
당시 공화국의 사회 복지는 전 세계의 모델이 되는 것이었다. 각 주들과 도시들 그리고 지방자치단체들은 필요한 여러가지 개선과 발전을 위해서만 돈을 빌려 재정을 충당했을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빌려온 돈으로 비행장들, 극장들, 스포츠 경기장들 그리고 화려하고 멋진 수영장들을 건설하는 데 쏟아 부었다. 산업계는 인플레이션 속에서 자신의 부채를 소멸시켰고 그러고 나서는 수십 억의 돈을 빌려서 생산 과정을 개편하고 기계를 새로 구입해서 생산 설비를 확충했으며 경영 합리화에도 많은 자금을 사용했다.
1923년에 1913년의 55퍼센트까지 떨어졌던 산업 생산량은 1927년에는 122퍼센트까지 치솟았다. 1928년에는 전쟁 이래 처음으로 실업이 백만의 아래로 떨어졌다. - 650,000 까지 떨어졌다.
이 해에 소매 판매는 1925년 대비해서 20퍼센트까지 상승했고 그 다음해에 실질 임금은 4년 전보다 10퍼센트 상승한 수치에 도달했다.
하위 중간 계급은 수백만 명의 점원들과 적은 월급을 받는 민중들로 히틀러가 이들에게서 거대한 지지를 끌어내야만 했지만 이 무렵에는 모두가 번영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그 부유함을 공유하고 있었다.
본 저자가 독일과 인연을 맺게 된 것도 바로 이 시기에 시작된 것이다. 나는 파리로 발령이 났고 그 시기에 때때로 런던으로 파견되기도 했었다. 그리고 이러한 수도들은 젊은 미국인에게 매혹적이었다.
그 무렵 나는 캘빈 쿨리지 시대의 믿을 수 없이 잘난체하고 실속 없이 텅 비어있는 사회를 탈출해서 그저 행복하기만 했다. 베를린과 뮌헨으로 갔을 때 이러한 것들은 그 색이 옅어졌다. 독일에서는 멋진 흥분이 도처에 있었다. 인생은 내가 본 그 어느 장소에서보다 더 자유롭고, 더 근대적이며, 더 짜릿하게 보였다.
예술과 지성적인 삶이 그렇게나 생생하게 보이는 곳은 다른 어느 곳에서도 없었다. 동 시대의 글, 그림, 건축, 음악과 드라마 속에서 새로운 흐름과 뛰어난 재능들이 보여지곤 했다.
모든 곳에서 젊음에 대한 강조가 있었다. 거리에 위치한 보도변 카페들에서, 아주 안락한 고급 바에서, 여름 캠프들에서, 라인란트의 증기선 위에서 혹은 담배 연기로 가득한 예술가의 작업실 안에서 젊은 이들은 서서 밤 새도록 함께 지내며 인생에 대해 끝없이 이야기를 했다.
이들은 건강하고, 근심 걱정이 없었으며, 태양을 엄청 숭배했고 엄청난 열정을 가지고 완전한 자유 속에서 삶을 그 끝까지 완전하게 묘미 있게 즐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