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을 차별하고 아리아인의 지배를 정당화 하는 이론적 배경
나치에게 있어서 이 의문스러운 이론들은 복음이 되었다. 내가 한 명 이상의 히틀러의 추종자가 말하는 것을 들었던 바에 따르면 체임벌린은 제 3제국의 영적인 창건자였다고 말하는 게 아마도 허황된 과장의 말은 아닐 것이다.
이 한 명의 영국인은 독일인 들 속에서 지배자 인종을 보게 되었고, 그것에서 미래의 희망을 찾았으며 리하르트 바그너를 숭배했고, 바그너의 딸들 중 한 명과 결혼하기까지 했다. 체임버린은 먼저 빌헬름 2세를 공경했고 마침내 히틀러를 숭배했으며 두 사람 모두의 멘토였다.
광신적인 인생의 끝 무렵에는 이 오스트리아인 하사에게 하일 이라는 나치 인사를 할 수 가 있었다. - 그리고 히틀러가 권좌에 오르거나 권력을 잡을 것이라는 전망이 있기 훨씬 전에도 오랫동안 - 신에 의해서 독일 민족을 이끌어 황야에서 이끌고 나갈 존재로서 경배했다. 히틀러는 의심의 여지 없게 당연히 체임벌린을 선지자로서 간주했고, 실제로 그러하게 판명되었다.
종족과 독일의 운명에 관한 질문에서 독일인들에게 광기어린 사상을 불어넣은 이 두 남자의 가르침 속에는 어떠한 내용이 있었는가?
고비노가 가장 기여한 것은 1853년과 1855년 사이에 파리에서 출간된 네 권짜리 책이었다. 제목이 에세 쉬르 리네갈리떠 데 라쎄 위멘느 (인종들 사이에 있는 불평등함에 관한 에세이) 였다. 충분히 아이러니하게도 이 프랑스 귀족은 왕실 근위대에서 장교로서 복무한 후에 자신의 공적 경력을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궤 드 까비네 즉 관방장으로서 시작했다.
그 무렵 토크빌은 1848년에 미국에서의 민주주의라는 책의 유명한 저자로 짧은 기간동안 공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외교관으로서 하노버와 프랑크푸르트로 갔고 드 토크빌과 함께이기보다 독일인들과 직접 접촉함으로써 인종적인 불평등함에 관한 자신의 이론을 이끌어 내었다. 비록 한때는 자신의 귀족적인 혈통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이 저서들을 썼다고 고백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고비노에게 자신이 하노버의 왕에게 이 작품을 헌정한다고 선언했을 때 역사와 문명의 핵심은 인종이었다.
"인종적인 문제는 역사의 나머지 모든 문제들을 지배한다. 인종적 불평등은 민족들의 운명에 관해 이후에 도래할 모든 내용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고비노의 이론에 따르면 세 주요 인종이 있었다. 백인, 황인 그리고 흑인이 그것이었다. 이 중 백인이 가장 우월한 인종이었다. 이 점에 관해 고비노는 더 주장했다.
"역사는 모든 문명이 백인종으로부터 시작하여 흘러가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어떤 문명도 백인종의 협력이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백인종의 보석은 아리아족이었다.
"이 빛나고 걸출한 인간의 계통은 백인종 사이에서도 가장 귀족적이다."
아리아인의 그 근원을 추적해 올라가면 중앙 아시아로 찾아 갈 수 있다.
불행하게도 고비노는 자신이 살던 시데에 남부 유럽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동시대의 아리아인들이 열등한 인종들과의 혼합으로 그 상태가 저하되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유럽의 북서부에서는 대충 세느 강을 따라서 스위스의 동쪽에 이르는 선을 따라 그 윗 부분의 지역들에서는, 비록 완전히 진짜라고 말할 수 있는 정도와는 거리가 멀기는 하지만, 여전히 우월한 인종으로서 살아 남아 있었다.
이것은 프랑스인의 일부분, 영국인과 아일랜드인의 전부, 저지대 국가들과 라인 강 유역, 그리고 하노버와 스칸디나비아의 민족들이 거기에 해당된다고 파악할 수 있었다. 고비노는 겉보기에는 대부분의 독일인들을 배제하는 것 같았다. 이들 독일인들은 자신이 설정한 선의 동쪽과 남동쪽에서 거주했다. - 나치가 고비노의 가르침을 수용했을 때 그럴듯하게 얼버무리고 용케 숨겼던 사실이다.
여전히 고비노의 정신 세계 속에서 독일인들은, 혹은 최소한 서부 독일인들은 아마도 모든 아리아인들 가운데 최상의 존재였다. 그리고 이 발견은 나치가 절대 얼버무리거나 지나치지 않았다!
이들이 어디를 가더라도 독일인들은 발전과 진보를 가지고 왔다는 것을 고비노는 발견했다. 이것은 심지어 로마 제국에서조차 사실이었다. 로마인들을 정복하고 그 제국을 무너뜨린 야만적인 독일 부족들조차 문명에 탁월한 기여를 했고 4세기가 될 무렵에는 로마인들은 당시 잡종견보다 더 나은 것이 별로 없을 정도로 그 상태가 저하되어 있었던 반면에 독일인들은 상대적으로 순수한 아리아인들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고비노는 선언했다.
"아리아인으로서 독일인들은 강력한 존재이다. 독일인이 생각하고 말하고 그리고 행하는 모든 것은 그러므로 대단한 중요성을 가지는 것이다."
고비노의 생각들은 빠르게 독일에 받아들여졌다. 바그너는 자신의 삶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 다 되는 1876년에 (바그너는 1882년에 죽었다.) 이 프랑스인을 만났고 엄청난 열정을 가지고 이 생각을 옹호했다. 그리고 곧 고비노 협회들이 독일 전역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