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히틀러 국가 재상이 되다
제 3제국이 탄생하기 바로 전날의 그 밤에, 베를린은 몸시 흥분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거의 누구에게나 그렇게 보였던 것처럼, 수명을 다하려 하고 있었다. 일 년 이상 동안이나 빠르게 허물어져 가고 있던 중이었다. 쿠르트 폰 슐라이허 장군은, 자신의 바로 앞 전임자인 프란츠 폰 파펜이 그랬던 것처럼, 공화국의 운명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쓰지 않았고, 민주주의에 관해서는 아예 신경쓰기나 했는 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파펜과 마찬가지로 슐라이허도 의회의 선거에 의해서 선출된 것이 아니라, 대통령 특별 명령에 의해 임명된 국가 재상으로서 통치해 왔었는데, 자신의 집무실에서 57일 간의 업무를 처리한 이후, 지금 그 직을 내려놓을 때가 온 것이다.
1933년 1월 28일 토요일에 늙은 공화국 대통령인 육군 원수 폰 힌덴부르크에 의해 갑작스럽게 해임되었고, 독일 최대 정당인 국가 사회주의당의 지도자인 아돌프 히틀러가 자신이 파괴해 버리겠다고 결심한 그 민주 공화국의 재상 직위를 자신에게 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그 운명적인 겨울 주말에 이 나라의 수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관해서는 갖가지의 소문이 무성했다. 그리고 그것들 중 가장 충격적인 것이, 실제로 일어난 대로, 전혀 뜬금없던 것은 아니었고 이전의 각종 준비 과정을 거쳐서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육군 참모총장 쿠르트 폰 하메르슈타인과 충돌한 슐라이허 장군이 포츠담 주둔군의 지원을 받아 정부를 전복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을 체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고, 이후에는 군사 독재 체제를 수립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거기에 나치의 정부 전복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베를린의 돌격대는, 경찰 내부의 나치 동조자들의 지원을 받아서, 대통령 궁과 정부 부처들의 대부분이 위치라고 있는 빌헬름슈트라세를 차지하려 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또한 총파업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1월 29일 일요일에, 10만 명의 노동자들이 히틀러를 재상으로 임명하는 것에 대해 그들의 반대 의사를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서 베를린의 중심부에 있는 루스트가르텐으로 몰려들었다. 노동 지도자들 중 한 명은 실제로 폰 하메르슈타인 장군과 접촉하여 육군과 노동자 조직이 협력하여 히틀러가 새 정부의 수반으로 임명되는 것에 대해 공동 행동을 취하려고 제안하고자 했다. 실제로 이전에, 그러 니까 1920년에 카프 폭동이 일어나던 바로 그 때, 총 파업이 정부가 수도를 버리고 도망간 공화국을 구원했던 것이다.
일요일에서 월요일 사이의 밤 대부분을 통해 히틀러는 재상 관저의 바로 아래 거리인 칸츨러플라츠의 카이저호프 호텔에서 자기 방을 바삐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었다. 초조해 하긴 했지만, 히틀러는 자신의 시간이 마침내 도래했다는 것에 대해 극도로 자신하고 있었다. 거의 한 달 동안 히틀러는 파펜과 보수 우익 진영의 다른 지도자들과 비밀리에 협상을 해 오고 있었다. 이들과 타협에 또 타협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번에 자신이 수반이 되더라도 순수하게 나치 정부를 수립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히틀러가 이 연립 정부의 재상이 되면서, 11명의 각료 중에서 나치가 아닌 정당에서 8명이 입각했는데, 이들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를 폐지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히틀러와 뜻을 함께 하고 있었다. 저 늙고 음침한 대통령 만이 히틀러가 걸어가는 길에 장애물로 버티고 서 있었다. 가장 최근으로는 1월 26일, 바로 이 중요한 주말이 도래하기 단 이틀 전에, 반백의 늙은 육군 원수는 폰 하메르슈타인 장군에게 "일이 어떻게 되었더라도 오스트리아의 육군 하사를 국방장관이나 국가재상으로 임명할 의도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신의 아들인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 소령과 대통령 비서실장 오토 폰 마이스너, 파펜, 그리고 다른 대통령 궁의 고문들의 영향력 아래에서 계속 시달린 대통령은 마침내 자신의 의지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86세가 되었고 이제 노망이 들기 일보 직전인 상황이었다. 1월 29일 일요일 오후에 히틀러가 괴벨스와 다른 보좌관들과 커피와 케이크를 들고 있던 중이었다. 그 때 국회의장이자 히틀러에 이은 나치당의 2인자인 헤르만 괴링이 감자기 뛰어들어와서 식사 중이던 일당에게 히틀러가 그 다음 날로 재상에 임명되었다고 단정적으로 통지했다.
1933년 1월 30일 월요일 정오 조금 전에 히틀러는 자기 자신과 독일, 그리고 전 세계에게 운명적인 것이 될 힌덴부르크 대통령과의 면담을 하러 재상 관저로 차를 타고 갔다. 카이저호프의 창문 안쪽에서는 괴벨스, 룀, 그리고 다른 나치 우두머리들이 재상부의 문을 초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에서 퓌러는 곧 나올 것이었다.
"히틀러가 성공할 지 실패할 지는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을 거야."
괴벨스가 한 마디 했다. 그들로서도 잘 확신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 마음은 의심, 희망, 기쁨 그리고 절망 사이에서 찢겨져서 앞뒤로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괴벨스가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가 위대한 기적을 전적으로 믿기에는 너무나 자주 실망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몇 분 후에 나치 일당들은 기적을 목격했다. 찰리 채플린의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젊은 시절에 비엔나에서 빈민 신세였다가 빠져나온 남자가, 1차 대전의 이름 없는 군인이었으며, 첫 번째 전간기의 그 암울한 나날들 속에 뮌헨에서 부랑자였으며, 비어 홀 폭동의 얼마간 우스꽝스러웠던 지도자였고, 심지어 독일인 조차도 아니며 오스트리아 인이었던 이 연설가는, 이제 고작 43살의 나이에 독일 국가의 재상으로서 이제 막 선서를 하게 되어진 것이다.
카이저호프까지 수백 야드를 차를 타고 와서 곧 오랜 친구들과 함께 했다. 거기엔 괴벨스, 괴링, 룀과 그를 권력의 자리에 올리기 위해서 험하고 고된 길을 함께 했던 다른 갈색 셔츠단 구성원들도 있었다.
"히틀러는 아무 말고 하지 않았고, 우리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괴벨스의 기록이다.
"하지만 히틀러의 눈은 눈물로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