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로이스 히틀러의 결혼들
아돌프의 아버지가 합법적으로 알로이스 히틀러라고 알려진 바로 그 때부터, 그 이름은 자연스럽게 아들에게 전달되었다. 1930년의 기간에만 비엔나의 진취적인 저널리스트들이 교구 문서고를 뒤지다가, 히틀러의 가계에 대한 사실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사생아에게 올바른 일을 해 주려는 요한 게오르기 히들러 노인의 뒤늦은 시도를 무시하면서, 나치 지도자에게 아돌프 쉬클그루버라는 이름의 족쇄를 채우려 노력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삶에서 이상한 운명의 반전이 매우 많았지만, 자신이 태어나기 13년 전에 일어났던 이 일보다 더 기묘한 것은 없었다. 만약에 그 여든 네살 먹은 방랑 제분업자가 자신의 서른 아홉 살 먹은 아들의 부성을, 그것도 그 어머니가 죽은지 거의 삼십 년이 지나서 인지하려고 예상치도 못하게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더라면, 아돌프 히틀러는 아돌프 쉬클그루버로 태어났을 것이었다.
이름 속에서 의미를 찾을 것이 그다지 많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나로서는 히틀러가 독일 국가의 주인이 될 수 있었을지 여부가 쉬클그루버로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을 지와 견주어서 독일인 들이 가정해 가며 말하는 걸 들어왔다. 아마 이 성은 남부 독일어 식으로 혀를 굴려서 발음할 때 약간 웃기게 들리는 소리일 수도 있었다. 한번 상상해 보자. 광분한 독일 군중이 천둥 같은 목소리로 "하일", "하일 쉬클그루버"라고 외치는 장면이 떠올려지는가? "하일 히틀러"라고 하는 외침은거대한 나치 집회들에서 외부인이 보았을 때 뭔가 신비로운 느낌마저 드는 화려한 이교도들의 행사와도 같은 것에서 군중들이 불러대는 이교식의 바그너의 송가로서만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모든 독일인들이 제 3제국이 통치하던 기간에, 서로 만나서 인사할 때 의무적으로 취해야 했던 형태가 되었다. 심지어 전화를 걸거나 받을 때도, 전통적으로 우리가 전화기에 대고 말하던 "여보세요." 대신에 "하일 쉬클그루버"라고 해야 했다는 것인데, 이 발음을 생각해보면 조금 상상하기 어렵다.
알로이스의 부모들은 명백하게 함께 살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이 결혼한 후에도 함께 살지 않았기 때문에, 아돌프 히틀러의 미래의 아버지는 아저씨의 손에서 자랐고, 그 아저씨는 비록 요한 게오르그 히들러의 동생이라고 이름의 철자를 다르게 쓰긴 했지만, 어쨌든 요한 폰 네포무크 휘틀러라고 알려졌다. 이 나치 지도자는 어린 시절부터 체코인들에 대한 증오를 키웠고, 자신이 퓌러가 된 이후에 종국에는 그 나라를 파괴했다. 그러한 영원한 것만 같은 증오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러한 기독교적인 이름은 언급해 볼 가치가 있다. 요한 폰 네포무크는 체코 사람들의 국가적인 성인이었고, 역사학자들은 히틀러의 가계에 체코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증거로서 히틀러 가에 이 이름이 주어졌다고 보기도 한다.
알로이스 쉬클그루버는 슈피탈 마을에서 제화공의 일을 먼저 배웠지만, 정착해서 차분하게 살 수는 없었다. 마치 자신의 아버지처럼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질 탓에, 곧 자신의 운을 시험하러 비엔나로 길을 떠났다. 열 여덟 살의 나이에 잘츠부르크 근처의 오스트리아 세관에서 국경 경찰관이 되었고, 9년 후에 그곳에서 하급 세관원으로 승진했다. 알로이스는 세관 공무원의 양녀인 안나 글라슬-회러와 결혼했다. 안나는 결혼과 함께 알로이스에게 작으나마 지참금을 가지고 왔고, 또한 이 결혼을 통해 알로이스의 사회적 지위 또한 높아졌다. 이것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연합 왕국의 관료제 하에서 일반적인 일들이긴 했다. 하지만 안나와의 결혼이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안나는 알로이스보다 열 네 살 많았고, 건강이 나빴으며, 아이를 낳지 못했다. 십 육년이 지난 후 그들은 별거 생활을 시작했고, 그로부터 삼 년 후인 1883년에 안나가 사망했다.
별거를 하기 전 알로이스는, 이제 합법적으로 히틀러라고 알려졌는데, 프란치스카 맛첼스베르게라고 하는 젊은 호텔 조리사와 어울리기 시작했다. 프란치스카는 알로이스에게 아들을 가져다 주었고 , 1882년 알로이스라고 이름 지었다. 자신의 아내가 죽고 한 달 후에, 알로이스는 이 젊은 조리사와 결혼했고, 석 달 뒤에 그녀는 안겔라라는 딸을 낳았다. 두 번째 결혼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일년 안에 프란치스카는 결핵으로 숨졌다. 여섯 달 후에 알로이스 히틀러는 세 번째 결혼을 했고 이 번이 마지막 결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