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히틀러의 등장 1

히틀러의 가정사

by 꿈많은 미소년


히틀러의 출신과 어린 시절을 고려해 볼 때, 비스마르크의 망토와 호엔촐레른 황제들, 그리고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계승하는 데 이보다 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을 상상하기란 힘들 것이었다. 농가의 유산을 물려받은 이 뛰어난 오스트리아인은 1889년 4월 20일의 오후 6시 30분에 태어났다. 바이에른과의 국경이 가로지르는 브라우나우 암 인 마을에서 가장 수수한 여관인 가스토프 춤 폼메르 가 바로 그 장소였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국경 지대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젊은 시절에, 즉 혈기 왕성한 젊은이로서 히틀러는 이 독일어를 사용하는 두 나라 사이에는 국경이 없어야만 한다고 하는 생각에 집착했다. 하나의 제국에 속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35살이 되어서 독일의 감옥 안에서 앉아서 이후 제 3 제국의 청가진이 될 책을 구술할 바로 그 무렵에, 이러한 감정은 대단히 강하고 오래 가는 것이었다. 책에서 바로 그 첫 번째 줄이 자신의 출생지의 상징적 중요성에 관한 내용을 다루었다. 나의 투쟁은 이 말들로 시작된다.



오늘날 운명이 브라우나우 암 인을 내 출생지로서 선택한 것은 나에게 있어 천우신조로 보인다. 이 작은 마을은 두 독일 국가의 국경선에 위치해 있고, 젊은 세대의 우리들은 최소한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모든 수단을 통해서 재통일 하는 것을 우리의 일생 과업으로 삼았다. 바로 그 국경인 것이다. 국경 선 위의 이 작은 마을은 나에게 위대한 임무의 상징으로 보인다.



아돌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세관의 하급 공무원이 세 번째 결혼해서 낳은 세 번째 아들이었다. 사생아로 태어나서 35살이 될 때까지는 어머니의 이름인 쉬클그루버를 사용했다. 히틀러라는 이름은 부계와 마찬가지로 모계에서도 나타난다. 히틀러의 외할머니와 친할아버지 양쪽 다 히틀러라는 이름이었고, 그 변수들도 있지만, 성 자체가 다양하게 표기되어 사용되었다. 즉 히들러, 후틀러, 휘틀러 그리고 히틀러라고 여러 표기가 혼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돌프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육촌이었고, 이런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주교에게서 특별 허가를 받아야만 했다.


이 미래의 독일국 퓌러가 될 아이의 조상들은 친가와 외가 양쪽으로,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국경과 다뉴브 강 사이의 하 오스트리아의 한 구역인 발트피어텔에서 수 세대를 걸쳐 거주해 왔다. 저자인 나 자신이 비엔나에서 살았을 때, 때때로 나는 그곳을 통과해서 프라하나 독일로 갔다. 그곳은 숲과 언덕이 많은 시골로 농부의 마을들과 작은 농장들, 그리고 비엔나에서 50 마일 정도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멀리 떨어져 있으며 빈곤함의 공기가 감돌았다. 마치 오스트리아인의 삶에서 주된 추세의 흐림이 이곳에는 머물지 않고 그냥 지나가버린 것만 같았다. 주민들은 자신들의 북쪽에 살고 있는 체코의 농부들처럼 대체로 음침했다. 근친 결혼은 흔한 일이며, 히틀러의 부모의 경우에서 보다시피, 교회에 의해 축성되지 않은 결혼과 사생아가 자주 발생했다.


히틀러의 모계를 살펴보면 좀 안정적이었다. 네 세대 동안 클라라 푀츨의 가족은 슈피탈 마을의 37번을 고수하는 농부로 남아 이었다. 히틀러의 부계쪽 조상들의 이야기는 사못 다르다. 성의 철자가,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변했다. 그리고 거주 장소 또한 일정하지 않았다. 히틀러 가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정신적으로 차분하지 못한 특성이 있었다. 한 마을에서 다른 마을로 이사를 가려는, 한 직업에서 또다른 직업으로, 깊고 단단한 인간 관계를 맺는 것을 피하고, 여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보헤미안적인 삶을 추구하려는 그런 강력한 충동을 가진 것이었다.


아돌프의 할아버지인 요한 게오르그 히들러는 하 오스트리아의 한 마을에서 또 다른 마을로 정기적으로 왕복하며 자신의 사업을 하던 방랑하는 제분업자였다. 1824년에 첫 결혼을 하고 다섯 달 후에, 아들이 태어났지만, 아이와 모친은 살아남지 못했다. 18년 후에, 두렌탈에서 일을 하던 중에, 마리아 안나 쉬클그루버라고 하는 스트로네스 마을에서 온 마흔 일곱 살의 농부 여자와 결혼했다. 그 결혼을 하기 5년 전인 1837년 6월 7일에 마리아는 사생아를 하나 낳았고 알로이스라고 이름 지었다. 바로 이 알로이스가 히틀러의 아버지가 된다. 비록 결정적인 증거는 부족하지만 알로이스의 아버지가 요한 히들러라는 것이 가장 그럴 듯 하다. 어찌됐든 요한은 결국 그 여자와 결혼했지만 평범한 관습에 반한 것이었고 이런 경우에 문자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결혼 후에 그 아이를 자신의 합법적인 아이로 신고하는 것이었다. 이 아이는 알로이스 쉬클그루버로서 자랐다.


안나는 1847년에 죽었고, 그 때문에 히들러는 삼십 년 간 사라졌다. 마침내 발트피어텔 안의 바트라라는 마을에서 여든 넷의 나이로 다시 등장한다. 이 때 그의 이름은 철자가 바뀌어 히틀러가 되었고, 세 명의 증인이 출석한 가운데 자신이 알로이스 쉬클그루버의 아버지란 것을 공증하기 전에 자신의 이름을 히틀러라고 증언했다. 왜 이 노인네가 아들을 인지하는 이 단계를 밟는 데 이렇게 오래 걸렸는지, 혹은 왜 마침내 그 선언을 했는지 하는 것은 이용 가능한 기록에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하이든에 따르면 알로이스는 나중에 한 친구에게 털어놓았는데, 제분업자의 형제인 아저씨로부터 상속을 일부분 받는 데 기여했기 때문에 이런 수속을 밟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저씨는 자기 가정에서 이 젊은이를 양육했었다.


어쨌든, 이 늦은 인지는 1876년 6월 6일에 이루어졌고 11월 23일 돌러스하임 주교구의 사제가 세례 기록부에서 알로이스 쉬클그루버라는 이름을 긁어내고 대신 그 자리에 알로이스 이틀러라는 이름을 적어 넣고 공증이 된 문서를 성당 문서 보관소에 넣었다.

이전 03화히틀러의 부상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