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히틀러의 등장 3

아돌프 히틀러, 알로이스 히틀러, 그리고 다른 이들

by 꿈많은 미소년


새 신부인 클라라 푀츨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돌프 히틀러의 어머니가 된다. 그녀는 스물 다섯 살이었고, 남편은 마흔 여덟살이었으며, 오랫동안 서로를 알던 사이였다. 클라라는 히틀러 가의 조상들이 살았던 마을인 슈피탈 출신이었다. 클라라의 할아버지는 요한 폰 네포묵 휘틀러였었는데, 할아버지의 조카인 알로이스 쉬클그루버-히틀러와 함께 성장했다. 그래서 알로이스와 클라라는 오촌 지간이었고, 이윽고 우리가 우리가 보았다시피 해당 결혼을 허가 받기 위해서 주교의 특별 허가를 신청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몇 년 전에 세관의 공무원이 처음에 심사숙고했던 결혼이었다. 첫 결혼 동안 양녀로서 자녀가 없는 자신의 가정에 받아들인 것이 바로 클라라였던 것이다. 브레나우에서 시클그루버 네와 함께 수 년간 살았고, 그리고 첫 번째 부인이 아팠을 때, 알로이스가 부인이 죽자마자 클라라와 결혼하겠다고 생각한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로부터 합법적인 적자 인정을 받고 클라라의 할아버지이기도 했던 아저씨로부터 유산을 받는 데에 참가를 한 것은 클라라가 16살이 되어서 합법적으로 결혼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살펴 보았다시피, 아내는 별거 후에도 예상보다 오래 살아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바로 그 무렵에 알로이스는 조리사인 프란치스카 멧첼스베르거, 즉 클라라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가정을 떠나서 비엔나로 갔다. 거기서 집안의 하녀로서의 일자리를 얻었다.


사 년 후에 자신의 사촌으로부터 집을 지키려 돌아왔다. 이는 프란치스카도 마찬가지였다. 살아 있는 마지막 몇 달 동안, 남편의 집에서 나와서 이사했다. 알로이스 히틀러와 클라라 푀츨은 1885년 1월 7일에 결혼했고, 그로부터 넉 달하고 열흘 뒤에 첫 아이인 구스타프가 태어났다. 하지만 구스타프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곧 죽었고, 이것은 1886년에 태어난 두 번째 아이인 이다도 마찬가지였다. 아돌프는 이 세 번째 결혼의 세 번째 아이였다. 아돌프의 동생인 에드문트는 1894년에 태어나서 여섯 해를 살고 죽었다. 그래서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아이인 파울라가 1896년에 태어나서 자신의 유명한 오빠보다 더 오래 살아 남게 되었다.


아돌프의 이복 형인 알로이스와 이복 누나인 앙겔라는 프란치스타 멧첼스베르거의 아이들로,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 남았다. 앙겔라는 당당하고 멋진 젊은 여자로 라우발이라는 이름의 세무 공무원과 결혼했고, 남편이 죽은 후에 비엔나에서 가정부로서 일하다가, 하이든이 알려준 정보가 맞다면 잠시 동안 유대교 자선 급식소에서 조리사로 일했다. 1928년 히틀러는 그녀를 자신의 가정부로서 베르히테스가덴에 데리고 왔다. 그 후에 나치 일당들 가운데서는 히틀러를 위하여 그녀가 구워주는 멋진 비엔나 식의 파스트리와 디저트들에 관한 소문이 퍼졌다. 그리고 히틀러가 그런 엄청난 식성을 가지게 되었다고들 했다. 1936년에 드레스덴의 한 건축학과 교수와 결혼을 하기 위해 히틀러를 떠났고, 바로 그 무렵 국가 재상이 된 히틀러는 그런 행위에 무척이나 분개해서 결혼 선물을 보내는 것조차 거부했다. 히틀러의 중년 이후 시기에, -한 명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가깝게 지낸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가족이었다. 한젤라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겔리 라우발로 금발의 매력적인 젊은 여성으로, 우리가 앞으로 보다시피, 히틀러는 자신의 삶에서 유일하게 진실 되고 깊게 사랑한 대상이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절대 자신의 이복 형에 관해 언급하는 것을 듣고 싶어하지 않았다. 알로이스 맛첼베르게, 이후에 알로이스 히틀러로 부성이 인지가 되어지는데, 작가가 되었고, 오랜 세월 동안 법적인 문제로 어려움이 가득한 삶을 보냈다. 하이든은 이 젊은이가 열 여덟의 나이에 절도죄로 5개월 간 감옥에서 복역하도록 선고되었고, 스무살 때는 동일한 죄목으로 또 다른 여덟 달을 감옥에서 보내도록 선고가 되어졌다고 기록했다. 알로이스는 결국 독일로 이주했고, 결국 더 많은 문제들에 휘말리게 되고야 말았다. 1924년에 아돌프 히틀러가 뮌헨에서 정치적인 폭동을 기도한 것으로 인해 감옥 안에서 머물고 있을 동안, 알로이스 히틀러는 중혼 혐의로 함부르크 법원에 의해 6개월동안 감옥에 있도록 선고되었다. 그러고 나서 하이든이 다시 검토해 보니, 알로이스는 영국으로 이주했고, 거기서 빠르게 가족을 형성했고 그리고 나서 그들을 버렸다.


국가 사회주의 당이 권력을 가지게 되자 알로이스 히틀러에게는 더 나은 시기가 왔다. 비어슈투베 - 작은 맥주홀이다 - 를 베를린 교외에 개점했고, 전쟁이 일어나기 조금 전에 수도의 유행 가득한 웨스트 엔드의 비텐베르그플라츠로 이사했다. 나치 공무원들이 자주 들렀고, 전쟁의 초기 기간 동안 음식이 부족해지자, 필연적으로 풍성한 공급처가 되었다. 나는 그 시기에 때때로 그 곳에 들르곤 했다. 알로이스는 그 무렵에 거의 예순이 다 되었는데, 약간 뚱뚱했고, 단순했으며 온화한 인상의 남자였다. 그 유명한 이복 동생과는 외견으로 닮은 구석이 별로 없었고, 사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어디라도 술집 주인이라면 흔히 볼 수 있는 그러한 인상이었다. 사업은 잘 되고 있었고, 자신의 과거가 어떤 내용이었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알로이스는 삶이 번장하고 있어 아주 행복해 하고 있었다. 알로이스에게는 단 한 가지 두려운 점이 있었다. 자신의 이복 동생이 경멸하거나 분노해서 자신의 영업 허가를 빼앗아 갈까 하는 부분이었다. 때때로 그 작은 맥주집에서는 국가 지도자이자 재상이 히틀러 가의 보잘 것 없는 가계를 기억하게 만드는 이 술집과 그 주인을 유감스럽게 여기는 게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흘러 나오곤 했다. 알로이스 자신도, 내가 기억하기에, 이복동생에 관해서라면 그게 무엇이 되었든 얘기 속에 끼여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다. - 현명한 예방책이지만 당시 히틀러의 배경에 관해서 무엇이든 알아내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하고 있던 우리들에게는 좌절스러웠다. 이미 그 시기에 히틀러는 유럽을 정복하려고 나서고 있었다.


나의 투쟁을 제외하고, 물론 거기에도 전기가 될만한 자료는 무척이나 빈약하지만 그 조차도 오해의 소지가 있었고, 빠진 부분이 거의 기념비적이라 할 만큼 엄청났다. 히틀러는 자신의 가족 배경과 어린 시절에 관해서 거의 얘기하지 않았다. - 혹은 자신의 존재 속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 우리는 가족 배경에 대해 살펴 보았다. 그렇다면 어린 시절의 삶은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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