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히틀러의 어린 시절 2

린츠 고등학교를 다닌 아돌프 히틀러

by 꿈많은 미소년


내가 나를 가르쳤던 선생들에 관해 생각했을 때, 대부분은 약간 미쳤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좋은 선생이라고 생각되어지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그런 인간들이 젊은 이의 길을 막을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비극적이다. - 1942년 3월 3일.




나는 날 가르쳤던 선생들에 관해 가장 불쾌한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밖에 드러나는 외양은 더러움을 물씬 풍기는 것이었다. 옷깃은 단정하지 못하게 헝클어져 있었다... 그 인간들은 모든 개인적인 생각의 자유가 벗겨진 프롤레타리아 계급 노동자의 산물이었고, 비할 데 없는 무식함으로 구별할 수 있다. 그리고 정부의 무력한 체제의 기념비가 되기에 가장 감탄이 나올 만큼 적당한 놈들이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이것은 이제 과거의 일입니다. - 1942년 4월 12일.




학교의 선생들을 기억할 때면, 그들 중 절반은 비정상이었다는 것을 떠올린다. 우리 오랜 오스트리아의 생도들은 나이든 사람들과 여자들을 존경하라고 훈육되었다. 하지만 우리 선생들에 관해서는 자비가 없었다. 그들은 우리의 숙명적인 적이었다. 그 인간들 중 대다수는 어느정도 정신적으로 정상이 아니고 미쳐 있었다. 그리고 몇몇은 자신들의 삶을 신에게 정직하다고 하는 광신도로서 마무리했다! ... 나는 특히 선생들에게는 나쁜 인식을 가지고 있다. 나는 외국어에 관해서는 가장 작은 재능도 보여주지 않았다 - 재능이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 선천적인 멍청이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 인간의 시선을 참을 수가 없었다. - 1942년 8월 29일.




선생들은 절대 폭군들이었다. 그 작자들은 젊은이에 대해 어떤 동정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유일한 목적은 우리의 뇌를 채우고 우리를 자신들과 같은 박식한 유인원들로 변모시키는 것이었다. 어떠 ㄴ생도라도 가장 작은 독창성의 흔적을 보여주기라도 하면, 그 자들은 무자비하게 못 살게 굴고 박해했다. 그리고 내가 알게된 가장 우수한 생도, 즉 선생들에 의해 우리 모두의 귀감이 된다는 이 모델은, 이후 자신의 삶에서 오로지 실패 만을 경험했다. - 1942년 9월 7일.




자신이 죽는 날까지, 히틀러가 자신에게 나쁜 성적을 주었던 선생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했다 - 잊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그로테스크한 핵심을 왜곡할 수 있었다.


자신의 선생들에게 주었던 인상은, 세계적인 인물이 된 뒤에 다시 회상이 되어진 것이지만,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히틀러가 좋아했던 것 처럼 보인 교사들 중 한 명은 테오도르 기싱어였는데, 어린시절의 히틀러에게 과학을 가르치려 분투했던 인물이었다. 기싱어는 나중에 회상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한, 히틀러는 유망하지도 그렇다고 상서롭지 못한 인상을 린츠에서 남기지는 않았다. 그는 의심의 여지 없이 학급의 지도자였다. 날씬하고 꼿꼿했으며, 얼굴은 착백하고 매우 가늘었다. 거의 폐결핵 환자가 아닌가 하고 보일 정도였으며, 눈이 열린 채로 사물을 응시하는 경우가 별로 없기는 했지만, 총명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에두아르트 휘머는, 히틀러가 위에서 명백히 "선천적인 백치"라고 언급헸는데,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 1923년에 자신의 전 생도를 위해 증언을 하러 뮌헨에 왔다. 바로 맥주홀 폭동의 결과로 반역죄의 재판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히틀러의 목표를 칭찬하고 자신의 이상을 완성하는 것을 보기를 마음 속 싶은 곳에서부터 소망한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다음에 나오는 젊은 고등학생의 간략한 묘사를 남겼다.




히틀러는 확실히 재능이 있다. 비록 특정 과목에만 국한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자기 통제가 부족하다. 최소한으로 말을 하더라도, 따지기 좋아하고, 독재적이며, 아집이 세고 기분이 나쁜 상태이다. 학교의 훈육에 복종하지 않는다. 근면하지는 않지만, 그렇지만 않으면 자신이 재능이 있는 그대로, 더 나은 결과를 성취할 것이다.




린츠 고등학교에서, 나중에 판명되었던 바 대로, 이 시기의 젊은 아돌프 히틀러에게 강하고 운명적인 영향은 미친 한 선생이 있었다. 역사 선생이었던 레오폴트 푓쉬 박사였는데, 남부 슬라브인들과 만나는 남독일어권의 경계 지역 출신이었다. 인종적인 분투와 함께 하는 박사의 경험은 광신적인 독일 민족주의자가 되도록 만들었다. 린츠에 오기 전에 박사는 마르부르크에서 가르쳤는데, 나중에 해당 지역은 일차 세계 대전 이후에 유고슬라비아로 넘겨져서 마리보르 가 되었다.


푓쉬 박사가 이 생도에게 역사 과목에서 단지 "괜찮음" 이라는 성적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를 가려쳤던 선생들 가운데서 나의 투쟁에서 따뜻한 헌사를 받았던 유일한 선생이 되었다. 히틀러는 이 남자에게 빚이 있다고 주저 없이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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