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히틀러의 어린 시절 3

어린 시절부터 신념을 지켜 바른 생활 어른으로

by 꿈많은 미소년


내 인생 전체를 통틀어서 행운이 나에게 다른 사람들은 거의 이해하지 않지만, 이 이론을 이해해 주는 역사 선생을 준 것은 아마도 결정적이었다. - 필수불가결한 것은 보유하고 있으며 별 필요 없는 것은 잊어버리는 ...


내 선생인 린츠 고등학교의 레오폴트 푓쉬 박사는, 바로 이런 면에서 그 필요조건이 진정 이상적인 방식으로 충족된 사람이라 할 것이다. 한 노신사로 친절하지만 동시에 확고한 사람이며, 자신의 눈이 부신 언변으로 우리의 주의를 붙들어둘 뿐만 아니라, 그가 안내하는 세계로 우리를 데리고 가기까지 한다.


심지어 오늘도 나는 이 회색 머리를 한 남자에 대해 진실된 감정을 가지고 다시 생각해 본다. 그 사람은 자신의 말에 담겨 있는 불과도 같은 광채를 가지고, 때때로 우리가 현재를 잊어버리게 만든다. 마치 마법에 의해서인 것 처럼 우리를 과거로 이동시켰고, 천 년을 넘어서 시간의 안개 속으로, 건조한 역사적 사실들을 생생한 현실로 탈바꿈하게 했다. 우리는 앉아서, 종종 열정으로 불타오르며, 때때로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동하면서... 선생은 우리 속에서 싹트기 시작하는 국가적 광신주의를 우리를 교육하는 수단으로 사용했고, 자주 우리의 국가적 명예심에 호소했다.


이 선생 덕에 역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가 그런 의도를 가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젊은 혁명가가 된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삼삽 오 년이 흐른 후인 1938년에, 제 3제국으로의 합병을 강제한 후에 승리 기념으로 오스트리아를 관광하면서, 히틀러 총통은 당시엔 은퇴를 한, 자신의 늙은 선생을 만나기 위해 클라겐푸르트에 멈줬다. 히틀러는 이 늙은 신사가 나치 SS의 지하 조직의 한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매우 기뻐했다. 그 조직은 오스트리아가 독립국으로 존속하는 기간동안 불법 조직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히틀러는 은사와 단독으로 한 시간동안 대화를 나누었고, 이후에 자신의 당 동료들에게 중요한 얘기를 털어놓았다.


"여러분은 내가 얼마나 저 늙은 사람에게 빚을 졌는지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라네."

알로이스 히틀러는 1903년 1월 3일 예순 다섯의 나이에 폐출혈로 숨졌다. 아침 산책을 하고 있던 동안 매우 고통스러워했고, 잠시 후에 근처의 여관에서 이웃의 팔에 안겨 숨을 거두었다. 알로이스의 열 세살 짜리 소년은 아버지의 시체를 보고서 무너져 울었다.


그 때 마흔 둘이었던 히틀러의 어머니는 린츠의 교외인 우르파르에서 가장 수수한 아파트로 이사했다. 거기에서 자기 자신과 살아 있는 두 아이들, 아돌프와 파울라를 돌보았다. 아버지를 잃은 아돌프의 가족에게는 부족한 예금과 어머니를 위해 남겨진 연금이 있었고, 이것으로 살아 나가야 했다.


히틀러가 나의 투쟁에서 언급했듯이, 죽은 히틀러의 아버지의 소망에 따라서 히틀러의 교육을 계속해야 한다는 의무를 느꼈다. - "다시 말하면", 히틀러는 이렇게 덧붙였다. "내가 시 공무원의 커리어를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공부를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젊은 과부가 하고 싶은 것은 다 허락할 정도로 아들에게 너그러웠고, 히틀러도 자신의 어머니를 다정하게 사랑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히틀러는 "그 무엇보다 완전하게 확고한 마음가짐을 가졌고," 따라서 어머니에게 확실하게 말했다.


"나는 그 커리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애정어린 사랑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로 인해서 갈등이 있었고, 아돌프는 자신의 학업을 계속 거부해 나갔다.


"그리고 갑작스레 병이 찾아와서 나는 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몇 주 안에 내 미래와 영원할 것 같았던 가정에서의 언쟁을 마무리지을 수 있었다."

열 여섯 살이 다 되어갈 무렵에, 히틀러는 폐병에 걸렸고, 이 때문에 최소한 일 년 동안은 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다. 잠시간 슈피탈 마을에 있는 가족에게 보내어졌고, 거기서 어머니의 여동생인, 테레사 슈미트의 농가에서 요양하면서 회복햇다. 몸이 다 낫자마자 히틀러는 슈타이어에 있는 공립학교로 곧 돌아왔다. 1905년 9월 16일로 날짜가 기록되어 있는 히틀러에 관한 마지막 보고서에서는 히틀러사 독일어, 화학, 물리학, 지질학, 그리고 기하 화법에서 "적절함" 이라는 성적을 받았다고 되어 있다. 지리학과 역사에서 히틀러의 성적은 "만족스러움" 이었다. 도구 없이 빠르게 그림을 그리는 자유화 과목에서는 "탁월함"이라는 성적이 기록되어 있었다. 히틀러는 마음대로 학교를 떠날 수 있다는 전망에 너무 들떠서 자기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술을 진탕 마셨다. 나중에 그가 기억하기로는, 히틀러는 새벽에 차에 태워져서, 슈타이어의 외곽에 있는 시골 길에 누워 있었다. 우유 짜는 여자가 도시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히틀러는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최소한 이런 면에서 히틀러는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지켰다. 이후에 히틀러는 비흡연자였고, 절대 금주가가 되었으며, 꽉 족쇄가 채워진 듯이 신념을 고수하는 채식주의자였고, 비엔나와 뮌헨에서 무일푼으로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부랑자의 신세로서 생필품 없이 살아갈 때조차도 신념에서 멀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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