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히틀러의 어린 시절 4

비엔나 미술 대학에 입학 시험을 보기 전의 나날

by 꿈많은 미소년


그 다음의 이 삼년은 히틀러가 자주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묘사하던 때였다. 어머니가 제안했고 - 그리고 다른 친척들은 강요했고 - 하틀러가 일터로 가서 일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거기서 히틀러는 예술가가 되는 자신의 미래를 꿈꾸고, 다뉴브 강을 따라 햇살 가득한 날에 게으름을 피우며 즐겁게 보냈다. 히틀러는 열 여섯에서 열 아홉의 이 나날들의 "솜털이 보송보송한 부드러움"을 결코 잊지 못했다. 그 때 "어머니의 사랑"으로 "편안한 삶의 공허"를 만끽하고 있었다. 비록 병든 과부가 자신의 소박한 연금 수입으로는 생활비를 충당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발견했는데도 불구하고, 젊은 아돌프는 자신이 일자리를 구해서 어머니를 돕는다는 것은 거부했다. 심지어 어떤 종류의 정규직을 통해 자신의 생활을 해나간다는 생각도 히틀러에게는 반항을 불러 일으키는 것에 불과했다. 히틀러는 이 신념을 지키며 평생 살았다.


성인이 되기 전 그 몇 년 간은 명백하게 히틀러의 인생에서 매우 행복했다. 히틀러는 자유를 만끽했으며, 일할 필요도 없었고, 골똘히 생각하고 꿈을 꾸며, 당시의 나날들을 도시의 거리를 천천히 돌아다니거나, 시골에서 자신의 패거리들과 이 세상은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떨게 그것을 바로 잡아야 하는 지에 대해 열변을 토하면서 보냈다. 그리고 저녁이면 몸을 동그랗게 말아서 책에 파묻혀 있거나 린츠나 비엔나의 오페라 하우스의 뒷 편에 서서 리하르트 바그너의 신비롭고 이교적인 작품들에 황홀하게 도취되어 듣고 있었다.


히틀러와 소년기를 함께 보낸 한 친구는 창백하고, 병약하며, 흐느적 거리듯 움직이는 젊은이였다고 기억했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히틀러는 보통은 수줍고 말을 잘 안하는 성격이었지만, 누군가 그의 의견에 반대라도 하면 갑작스럽에 그 반대자들에게 히스테리와도 같은 분노를 터뜨리곤 했다는 것이다. 4년 동안 히틀러는 스테파니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금발의 처녀에 반해 그녀에게 깊은 사랑에 빠져 있었다. 스테파니가 자신의 어머니와 린츠의 란트슈트라세를 오르내리며 거닐 때면, 히틀러는 비록 갈망하는 눈초리로 자주 쳐다보곤 했지만, 자기 마음 속의 드높은 환상들 속의 다른 많은 물건들과 마찬가지로 그 처녀를 지키는 것을 선호하여, 그녀를 만나려고 하는 가장 작은 노력도 결코 하지 않았다. 사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사랑의 시들을 썼지만 결코 보내지 않았다. (그것들 중 하나는 "사랑하는 이에게 보내는 송가"라고 제목이 달려 있었다.) 히틀러는 이걸 자신의 참을성 있는 젊은 친구인 아우크스트 쿠비체크에게 읽어주겠다고 주장했는데, 거기서 그녀는 디 발퀴리에서 나온 처녀이고, 어두운 파란색의 출렁거리는 벨벳 가운을 입고, 꽃들이 만발한 초원 위를 백마를 타고 달리고 있었다.


히틀러가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했음에도 불구하고, 화가쪽을 선호했지만 최소한 건축가라도, 히틀러는 열 여섯의 나이에 이미 정치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무렵에 합스부르크 군주제와 으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통치하는 다민족 사회 속의 모든 비독일계 인종에 대해 폭력적인 증오를 키워나갔다. 그리고 동등하게 독일 민족에 관한 모든 것에 격렬한 사랑을 키웠다. 열 여섯살에 자신이 죽는 그 날까지 지켜야 할 것을 정했다. 바로 광신적인 독일 민족주의자였다.


비록 직업을 구하지 않고 빈둥거리기는 했지만 히틀러는 젊은이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부주의한 사고는 거의 가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가벼운 문제가 아니라 이 세계의 각종 문제들이 무거운 무게로 히틀러의 어깨를 짓눌렀다. 쿠비첵이 나중에 회상한 것 처럼, "히틀러는 세살 모든 곳을 단지 장애물과 적의가 가득한 곳으로 바라보았다... 항상 무엇인가를 반대했고, 세상을 비딱하게 바라보았다. 도대체가 어떤 것을 밝고 가볍게 받아들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학교를 견딜 수 없어 했던 이 젊은이가 책을 열렬히 갈망하는 위대한 독자가 된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린츠의 성인 교육 도서관을 구독하고 박물 협회에 가입했으며, 그곳의 책들을 어마어마한 분량으로 대출해서 읽었다. 쿠비체크는 당시의 히틀러를 항상 책에 둘러싸여져 있었다고 기억했다. 그 가운데서 히틀러가 가장 좋아했던 책들은 독일 역사와 독일 신화에 관한 것들이었다.


린츠가 지방 도시였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화려하게 빛나는 제국의 바로크 양식 수도인 비엔나가 그런 야망과 상상력을 가진 젊은이에게 자신의 매력으로 손짓했다. 1906년 열 일곱번 째 생일이 지난 어느 날에, 히틀러는 그 대도시에서 두 달 동안 사용할 기금을 어머니와 다른 친척들에게서 제공 받아서 길을 떠났다.


이 시기는 나중에 히틀러에게 가장 괴로운 때로 기억된다. 종종 히틀러는 문자 그대로 배수로에서 살았고, 이 첫 번 째 방문에서 비엔나는 히틀러를 매료시켰다. 박물관에서, 오페라 하우스에서, 그리고 극장에서 자신이 본 계속된 황홀감의 상태에서, 그리고 링을 따라 계속되는 건물들을 쳐다 보면서 흥분에 가득 차서, 히틀러는 수 일간 거리를 배회했다.


또한 히틀러는 비엔나 미술 대학에 입학하는 것에 관해 질문했고, 일 년 후인 1907년 10월에, 히틀러는 화가가 되고자 하는 자신의 꿈을 실현할 첫 번째 실제적 단계로서 입학 시험을 보기 위해 이 수도로 돌아왔다. 이 때 열 여덟 살이었고 드높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현실은 냉정하게 그것들을 내던졌다. 비엔나 미술 대학의 입학 시험 분류 기록에서 당시의 상황이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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