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낙제생이자 화가 지망생
아버지가 쉰 여덟의 나이로 세관에서 은퇴를 한 그 해에, 여섯 살짜리 아돌프는 린츠의 남서쪽으로 약간 떨어져 있는 피쉴함 마을의 공립 학교에 입학했다. 1895년의 일이었다. 이후 사오년 동안 이 가만히 있지 못하는 늙은 연금생활자는 린츠 근방 안에서 한 마을, 그 다음 마을 하는 식으로 이사를 했다. 아돌프가 열 다섯이 될 무렵에는 주소 여덟 개와 서로 다른 학교의 이름 다섯 개를 기억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년 동안 아버지가 농장을 구입한 곳에서 가까운 람바흐의 베네딕토 회 수도원의 학교에 다녔다. 거기서 합창단에 들어갔고, 노래 수업을 들었으며, 자신의 회고에 따른다면, 언젠가는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을 꿈꿨다고 한다. 마침내 이 은퇴한 세관 공무원은 린츠의 남쪽 교외 근처인 레온딩의 마을에서 영원히 정착했다. 그곳에서 히틀러 가는 가장 수수한 집과 정원을 차지하고 있었다.
열 한 살의 나이에, 아돌프는 린츠에 있는 고등학교로 보내졌다. 이것은 아버지에게는 재정적인 희생을 보여주는 것이었고 아들이 아버지의 길을 따라 시의 공무원이 될 것이라는 야망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젊은이가 꿈꾸는 마지막 것이었다.
"그리고 열 한 살짜리로는 거의 드문 일이었는데."
히틀러는 나중에 회고했다.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도록 되어졌지.... 나는 시 공무원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고."
아직 십 대도 되지 않았던 이 소년이 세상일을 다 겪어 단단하고 지배적인 성격의 아버지에 맞서서 고되고 가차 없는 투쟁을 벌인 것은 히틀러가 자신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명백하게 진정성을 가지고 진실과 자세한 세부 사항까지 서술한 몇 안되는 전기적인 이야기들 중 하나이다. 이 갈등은 그렇게나 격렬하고 꺾이지 않은 의지를 드러내 주는 첫 번째 징후일 것이다.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히틀러는 자신의 길에 놓여 있는 모든 장애물들은, 비록 그것들이 겉보기에는 대적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고 이쪽이 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들 모두가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면서 독일과 그리고 유럽에 우리모두가 잊을 수 없는, 그리고 지워지지 않을 잉크로 자신의 뜻을 그려 나갈 것이었다.
나는 시 공무원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노! 다시 말하지만 노! 이다. 내 아버지의 면에서 보자면 이 직업에 관해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하면서 사랑과 기쁨으로 나에게 영감을 주려했던 모든 시도는 정확히 반대의 결과를 달성했다. 나는 ... 사무실에 앉아서 일을 한다는 생각을 하면 위장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느꼈다. 그것은 내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었다. 내 시간을 지배하며 빼앗아 가고, 빈 칸을 다 채워 넣어야만 하는 서류 더미 속으로 내 모든 인생의 기쁨을 바치도록 강요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내가 화가, 예술가가 될 것이 나에게는 분명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순간 굳어서 말을 잃었다.
"화가? 예술가?"
아버지는 내 사리 분별력을 의심했고, 혹은 아마도 내 말을 잘못 들었거나 오해했다고 생각한 듯 했다. 하지만 그 문제에 관해서는 명백했고, 특히 내 의도가 진지하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는 더욱 그랬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결단력으로 반대했다.
"예술가라니! 안 돼! 내가 살아있는 한 절대 안 왜!"
... 자신의 "결코"라는 말에서 절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나의 "그럼에도불구하고!" 를 더욱 강화해 나갔다.
이러한 대치의 결과는, 히틀러가 나중에 설명했듯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을 중단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내가 얼마나 고등학교 공부에서 진전이 거의 없는 지를 아버지가 일단 보게 되면, 자신의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내가 내 꿈을 위해서 전념하도록 허락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것은, 사십 오년 후에 적힌 것으로, 학교에서 히틀러가 낙제한 것에 대한 변명이 부분적으로 될 수 있었다. 초등학교에서 히틀러의 성적은 한결같이 우수했다. 하지만 린츠 고등학교에서의 성적은 너무도 낮아서 종국에는 관례적인 증명서조차 획득하지 못하고, 린츠에서 상당히 떨어진 슈타이어의 공립학교로 강제 전학을 당하게 되었다. 그 학교에 다니긴 했지만 잠시 뿐이었고 졸업을 하기 전에 떠났다.
학업에서 실패했다는 사실은 이후 인생 내내 히틀러의 마음을 괴롭혔다. 그럴 때 히틀러는 학교 교육을 잘 받은 "신사들", 그들의 성적과 졸업장, 그리고 교육받은 풍토 등을 모두 싸잡아 우스꽝스럽게 비난을 퍼부어대곤 했다. 심지어 그가 죽기 전 삶의 마지막 삼 사 년 동안에도, 육군 최고 사령부에서, 군사 전략, 전술 그리고 지휘 관련 내용의 세부 사항을 담은 각종 서류와 보고서 등에 압도되었던 그곳에서도, 히틀러는 당의 초기 동무들과 함께 저녁을 들며 추억의 이야기들을 하곤 했다. 내용은 자신이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바보 같은 선생들에 대한 험담이었다. 이 광기 어린 천재의 이런 두서 없는 말의 일부는 확실히 이제 볼가 강에서 영국 해협까지 자신의 광대한 군대를 직접 지시하는 최고 군 지도자가 가진 무명의 시절부터 여전히 변치 않고 지키고 있는 성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