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수필

by 리단쓰

“디오 딩딩딩 딩딩딩 딩딩딩딩.......” 머릿속에 젓가락들이 굴러다니는 것처럼 어지러운 소리다. 순간 찡그린 얼굴로 교실 한편에 있는 피아노를 쳐다본다. 요즘 어느 단체에서 기증받게 된 피아노가 복지관 아이들에게 최대 관심이요 기쁨이 되고 있음에 항상 피아노 앞은 소란스럽다. 앞머리가 모두 쏟아진 채 얼굴이 벌겋게 된 아이의 손가락은 뻣뻣하게 하얀 건반 위를 더듬고 있다. 가만가만 아이옆으로 가서 하얀색 검은색 건반의 쓰러짐을 보고 있자니 음정과 박자가 어긋나는 것이 귀에 거슬리기 시작한다. “손바닥에 공 하나를 쥔 것 같은 기분으로 동그랗게 하고 손가락을 눕히지 말고 세워서 톡톡 쳐야지 예쁜 소리가 나는 거야” 엉터리 실력인 내 말을 진지하게 듣는 아이의 애쓰는 모습에 더욱 마음이 끌리게 된다. 간단한 동요를 계명위주로 쳐주며 바라보니 무척 부러운 얼굴이 되어 앉아있다. 순간 사이비 실력인 내가 지금 무얼 하나 싶어 먼 옛날 초등학교 시절의 모습이 떠올라 움츠려든다.


그랬다. 나도 이 아이처럼 피아노의 하얀색, 검은색의 건반이 좋아서 열병을 앓았던 적이 있었다. 요즘이야 피아노는 필수이고 그 외 다른 악기가 선택이 된 음악교육이 빈번하지만 내가 초등학교 다닐 적에는 피아노 치는 아이들이 드물고 집에 피아노가 있다면 갑부정도로 생각되었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 피아노 학원에 다니고 싶다는 욕심조차 스스로 포기하던 어설픈 맏딸 노릇을 하던 시절이었다. 앞 집 친구가 피아노 학원에 갈 때면 우린 서로가 함께 가기를 원했다. 친구는 학원을 오가는 길에 말동무가 필요했고 난 피아노 학원의 구경을 위해서였다. 피아노 치기를 지겨워하는 친구가 이해가 안 되었고 각기 문이 달린 방에서 피아노 한 대를 온통 차지하는 모습이 부러웠다. 피아노 선생님이 쫓아내지 않는 게 고마워서 친구 연습할 동안 한쪽에서 조용히 바라보았다. 친구는 박자를 맞춰주는 재깍 이 시계 같은 것을 피아노 앞에 두고 책장을 넘기며 띵동거렸고 한쪽을 다 치고 나면 커다란 주판알을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옮겨놓았다. 잠시 후 얼어붙은 손가락을 호호거리며 들썩거리다가 주판알을 10개 정도 보낸 뒤에야 선생님한테 검사받고 신나게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어쩌다 늦어서 엄마한테 꾸중을 들어도 피아노 학원에 가는 일은 신났다. 그러던 어느 날 문방구에서 종이 건반을 한 장 사가지고 틈나는 대로 계명을 외울 수 있는 모든 노래를 두들기며 흥얼거렸다. 하얀색, 검은색 건반에 대한 열병은 한 번 더 앓았던 기억이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을 목표로 세우고 공부하던 때에 친구에게 무작정 졸라서 바이엘을 마쳤던 것이다. 그 친구는 음대를 희망하다 법대에 간 친구였고 함께 시험준비를 하던 친구집에서 가장 지루하고 공부 안되는 시간을 30분 정도만 할애해서 가르쳐달라고 졸랐다. 그 나이에 학원 다니며 바이엘 배울 용기가 없다고 무작정 매달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이없는 행각이기도 하다. 시험을 앞둔 수험생 둘이서 바이엘을 딩동거리고 가르치고 했으니.... 그래서 우린 둘 다 그토록 바라던 공무원자리를 얻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내가 지금 동요라도 칠 수 있게 된걸 그 시절 배움의 덕으로 돌리고 싶다. 그때 진지하게 한 장한 장 넘기며 배우던 바이엘의 음이 귀에서 맴돈다. 더구나 전공과 상관없이 유치원 교사라는 직업이 내게 열려서 사이비 실력이나마 피아노 솜씨는 충분히 활용된 셈이다.


아이에게 먼 옛날 내 모습을 투영시키다 보니 조바심이 생겼다. “오늘 집에 가서 엄마한테 피아노 배워달라고 해서 방학 동안 기초라도 해두면 좋겠다 그렇지?” 순간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를 세차게 흔드는 아이의 모습에 감상적인 흥분을 거둔다. 그리고는 마음이 어두워진다. 조그마한 이발소를 꾸리고 있는 아이의 가정환경은 ‘생활보호대상자’라는 걸 순간 잊었다. 매달 피아노 교습비를 내는 게 부담이란 걸 잊었던 것이다. 여전히 딩동거리며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는 열망이 후끈한 아이의 어깨를 바라보며 상념의 깊은 곳에서 서성인다. 가난했던 시절 스치듯 지나갔던 따스한 풍경이 나를 살찌우게 했듯이 아이에게 따스함이 되자는 다짐으로 여릿한 어깨를 힘껏 안아본다.

매거진의 이전글등뒤의 세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