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

수필

by 리단쓰

차가운 바람이 기승을 부리며 진눈깨비를 뿌리고 있었다

창밖에는 곧게 뻗은 나무 위 빈 가지들이 안개처럼 내리는 진눈깨비에 흠뻑 젖어있었다


겨울정취가 물씬 풍기는 날이라 생각하며 사색의 언저리를 서성이는데 세 살박이 딸아이는 딴전 피우는 엄마에게 투정을 부린다


아이 단속이야 당연한 어미의 도리인 것을 왜 모르겠는가? 하나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좀 더 자유로왔던 시절이 문득 그리워진다 불현듯 혼자만의 여행에 대한 욕심이 생기며 과거의 시간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여행을 혼자 다니는 사람은 약간 정서가 불안한 것이라 생각하던 내가 마음이 어지러워 떠나본 건 스물네 살 때 여행이 처음이었다 학교를 졸업 후 사회생활에 대한 좌절과 여러 고민 속에 지냈던 십 년 전 그날이 선명하게 다가선다


그건 그때 만난 인연, 그 사람(?)에 얽힌 사연 때문 일 것이다


그때의 떠남은 대구에서 교편생활을 하는 친구를 만나는 게 우선 목적이었다 다음 계획은 해인사 구경을 해보고 싶다는 용기 있는 발상이었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갔던 해인사는 내 기대만큼 웅장하거나 신비롭지는 않았다 다만 수학여행 때 흉내를 내며 탑도 둘러보고 종도 쳐다보았다 대장경이 보관된 곳에서 창살 안의 원숭이를 보듯이 그 안에 안치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의 글자들을 만났다


산속의 바람은 매서웠고 그 바람으로 절 그 덕거리는 문소리에 섬찟섬찟 놀라며 내려오는 길이었다 한적한 산길에서 누군가 나를 힐끔 보았고 순간 내게 말을 걸어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 사람은 혼자서 겨울 산사 (山寺)를 찾아온 나를 궁금히 여기며 함께 내려오는 동안 불교에서의 인연에 대해 거창하게 설명했다


평범한 남자가 말을 건네오면 분명 수작 부리는 것이지만 그 사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스님이었다 여자보기를 돌같이 하는 스님!


그렇기에 부담 없이 이야기하며 산사를 내려왔다


스님은 내게 차 한잔을 나누자고 제의했고 그 순간 난 기대와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스님과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여자! 가끔 서울 조계사 근처 찻집에서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둘 사이엔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갈지 궁금해서 귀를 쫑긋 세운적이 있었다 유쾌한 웃음이 흘러나오면 신기하게 여기던 나였다. 한 마디로 스님들 세계에 대한 편견이 있었던 것이다


다방에 앉는 순간부터 그 사람은 스님처럼 보이질 않았다


혼자 산사를 찾아와 차 한잔을 마시자는 제의에 응했던 내가 속세에 대한 미련을 불러일으켰던 것일까?


속세의 어지럼을 느끼며 떠나온 여자와 속세의 미련을 떨구지 못하는 남자의 만남으로 추락해 버리는 기분이었다


평범한 삶이었다면 또래의 여자친구와 연애도 했을 터이고 도서관에서 학문에 열중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지러울 정도로 풀어놓는 과거사를 들으며 그가 건너야 할 불도(佛道)의 길이 험난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시절 운동권에 몸을 담고 있던 중 제적을 당한 뒤로 출가했다는 이야기 속에서 반발심마저 생겼다


서울에 와서야 알았지만 그는 사미승(沙彌僧) 상태여서 스님이라는 칭호가 결코 적합하지 않은 초보스님이었다


무엇보다 그 사람의 랜드로바 신은 발이 신기했다 솔담배를 피워 불며 담배가 아니고 향(香)이라 생각하니 한 대 피우라고 권하기도 하였다 고고장과 미팅의 이야기로 열을 올리는 그를 보며 난 경계의 돌무더기를 쌓고 있었다


자신 편협한 의식 때문이라는 질책과 경계해야 한다는 갈등 속에 친구와의 약속을 핑계 삼아 버스에 올랐다 헤어지며 두 손을 합장한 채 ‘성불(成佛)하세요’라는 의미 있고 가시 돋친 음색으로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요즘도 가끔 절에 들러 유난히 키 작은 스님을 볼 때마다 그날의 얼굴이 있는가 살피게 된다 그 스님은 지금쯤 어떤 모습으로 십 년 전 만남을 헤아리고 있을까? 우매한 중생의 닫힌 생각이라 탓할지, 아니면 성불의 작은 회초리를 준 중생으로 기억해 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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