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없어

콩트

by 리단쓰

정미가 드디어 '과부회'에 가입을 하였다. 정미의 남편 경국 씨가 그녀 곁에서 떠난 건 불과 2달 전이었다. 조그마한 출판사를 경영하던 남편이 열성으로 펴낸 책이 정부를 비판하는 성향이 강한 것이라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에 걸려서 구속되었다. 짧지 않은 시간 속에 안기부도 가게 되었고 구치소 면회도 열심히 다녔건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건지 그녀는 막막함 속에 허우적거렸다. 면회 신청 후 봄기운이 가득한 구치소 마당을 서성이다 우연히 알게 된 경순 씨가 데려간 곳이 과부회였다.

국가보안법이라는 굴레에 얽매여 신혼의 단꿈을 벗어나지 못한 채 남편과 떨어져 지내는 여인들이 답답한 가슴을 풀어보자고 만든 친목회 형식의 모임이었다.

"얘 살벌하게 과부회가 뭐니?

남편이 없는 것도 아니고 멀쩡하게 살아있는 여자들이 드세게 뭐 하는 건지... 진짜 과부들이 화낼 일이다. 젊은 여자들이 청승은 왜 떠는지." 친한 친구도 언니들도 펄쩍 뛰며 어울리지 말라고 난리였지만 정미의 마음은 이미 황량함 속의 한줄기 빛을 발견한 듯이 그곳의 따스함에 목을 매게 되었다.


정식으로 과부회 일원이 되던 날, 경순 씨 집에 모여서 환영회까지 열어주었다. 이어도의 한편 인양 남자 구경은 할 수 없고 오로지 여자들만 득실거리는 좁은 거실이 신기하면서도 묘한 흥분을 주었다. 서로에 대한 안쓰러움이 각자의 어려움과 서러움으로 무르익으면 모두들 초롱한 눈빛 속에 핏기가 서리며 분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도대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고 국가보안법이라는 무시무시한 법 앞에 양심 있고 실천하는 사람들은 모조리 죄인이 되는 세상이라고." 정미는 국가보안법이 원래의 목적과는 달리 정권 유지와 세력 다툼의 도구로 휘둘러지는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고 남편의 죄목이 더 이상 부끄러움이 아니라는 것을 터득하는데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과부회의 활력소는 '특별면회'라는 것이었다.


구멍 뚫린 유리창에 안타까운 시선을 부딪히다 콧물,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니라 연애시절 다방에서처럼 나란히 앉아 손을 잡고 1시간 정도 면회를 허용하는 것이다. 가 슴떨리는 소리였다. 남편의 체온을 느껴본지가 언제인지 아득한 터에 생각만 해도 텁텁한 남편의 살내음이 나는 듯 황홀해졌다.

"특별히 허용을 하는 만큼 재소자의 정서를 순화시키고 바른 길로 이끄는 면회를 하라는 게 보안과장의 취지라는 거 잊지 마라."

모임의 언니 격인 경순 씨의 굵은 목소리 흉내에 예쁜 과부들은 까르르 뒤집어진다. 구치소 측은 다루기 까다로운 시국사범을 가장 영향력 있는 가족의 따스함을 빌어 순화시키겠다는 발상이지만 젊은 과부들은 시골집 늙은 어머님과는 달라서 골치를 앓고 있다는 것이었다. 교도관이 바짝 앉아서 둘 사이에 오고 가는 대화를 열심히 적고 뻔히 쳐다보는 가운데 면회가 허용된다는 말에 정미는 시무룩해졌다.

"걱정할 거 없어. 신경 쓰지 말고 손도 만지고 뽀뽀도 하고 그래."

"빤히 쳐다보고 있다면서 어떻게 뽀뽀까지 해요?"

기죽은 그녀를 위로해 주렸는지 다른 이의 무용담은 무궁무진해진다. 교도관더러 오랜만에 진하게 뽀뽀하게 자리 좀 비켜 달랬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기에 보는데서 10분 동안 남편과 떨어지지 않고 뽀뽀를 했다는 민숙, 눈빛만 바라보다 서로의 격정을 못 이겨 엉엉 울었다는 정애, 남편이 좋아하는 술을 맛보게 하고 싶어 초콜릿 안에 위스키가 들어가 있는 제품을 몰래 품 속에 가지고 가서 포옹하는 척 홀짝이며 먹였다는 현정, 남편이 어루만져준 젖무덤이 황홀해서 며칠밤을 지새웠다는 진영, 치열한 눈빛은 어디 가고 모두들 희뿌연 백열등처럼 헤헤거리는 무드 속에 경순 씨가 일침을 놓았다.

"이 사람들이 사랑놀음은.. 중요한 시간이면 남편들한테 격려사 한마디라도 더하지 그저 뽀뽀할 궁리만 했어?"

"언니는 한 술 더 뜨면서 큰소리칠 거 없잖아?"

모두들 떼구루루 구르며 경순 씨 면회담에 열을 올린다. 경순 씨 면회가 끝나고 들어가면 다른 재소자들이 부러움과 야유를 보내느라 소란스럽다는 것이다.

이야기할 적마다 어찌나 쪽쪽거리는지 얼굴이 온통 립스틱 범벅이 되어 경순 씨 남편이 들어서면 경순 씨가 그날 바르고 간 립스틱 색을 맞추느라 한바탕 전쟁을 치를 정도라는 것이었다.

"야, 난 틈나는 대로 교도관이 민망해서 딴전부리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전하려고 힘들었어. 시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우리 신랑만큼 아는 사람 있는 줄 알아?"

온통 웃음바다인 게 쑥스러운지 경순의 변명은 길어진다. 그렇기는 하다. 안에서는 신문구독이 어렵고, 설사 신문이 들어가도 정치면이나 예민한 사회문제는 삭제된 채 받아 보니 시국사범들의 최대 관심은 바깥소식이라는 걸 정미도 잘 알고 있다. 10분 면회 중에 남편은 가족의 안부와 함께 세상 소식에 귀를 쫑긋 세운 적이 많았다. 시국사범의 앞날은 정세에 밀접하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새로운 정보를 열심히 전해주니까 담당 교도관이 얼마큼 신경을 곤두세우는지 들어볼래?"

이야기를 구수하게 풀어가는 경순의 새로운 경험담에 모두들 솔깃해졌다.

"우리 신랑이 기름진 게 먹고 싶었는지 혹시 마요네즈가 안 들어오냐고 묻더라. 어찌나 안쓰러운지 심각한 얼굴로 내가 아직은 안 들어오는데 조만간 들어올 거라고 위로했잖냐?"

"그게 어때서요?"

눈이 큰 현정이 궁금한 듯 갸우뚱 거린다.

"그러게, 별일도 아니지? 그런데 교도관이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마요네즈가 도대체 누구냐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거야, 자기 몰래 암호로 이야기한다고 면회시간 5분 남기고 끝내버리는 거 있지."


경미의 특별면회가 드디어 3일 뒤로 결정되었다.

가장 절실한 것은 남편의 건강이었고 환절기마다 힘겨워하는 남편을 생각해서 무언가를 준비해야 될까 정미는 고민이 많아졌다. 꿈에도 안타까운 남편을 보자 주책없이 눈물만 주르르 흐르고 어른들 안부에 간신히 고개만 끄덕이며 홀 쩍 거리자 교도관이 안되었는지 잠시 자리까지 비켜주는 게 아닌가? 그제사 마음을 가다듬고 면회 전에 준비한 일을 벌이기로 작정했다. 분명히 브래지어쯤에 숨겨두었는데 없었다. 블라우스 중간쯤을 들척여도 없었다.

세상에! 얼마나 기다린 순간인데..

옆에 남편이 쳐다보는 것도 아랑곳없이 치마까지 뒤집으며 안절부절 얼굴이 벌게졌다. 갑자기 남편은 눈물이 맺힌 채 등 뒤에서 꼭 안아주며 속삭이는 게 아닌가?

"정미야 지금 우리 그거 할 시간 없어...."

화들짝 놀라며 몸을 돌리는데 허리춤에서 인삼가루 봉지가 툭 떨어졌다. 얼른 주워 남편품에 넣어주며 정미는 흐르는 눈물을 쓰윽 닦고 배시시 웃었다.

"공복에 한 번씩 먹어. 다음 달까지는 먹을 수 있을 거야." 조용히 들어서는 교도관의 눈가에도 희미한 이슬이 맺혀있었다.


' 나만큼 굉장한 면회 한 과부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정미는 면회실 밖 공중전화 부스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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