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전작읽기 11월
젊은 시절부터 박완서 작가가 주는 큰 틀은 정겨움과 편안함이었다. 생각해 보니 너무 특별하지 않은 평범함이 주는 안도감이었다.
박완서 작가의 등단시기가 40대라는 것이 이상스레 조바심을 달래주는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나목은 박완서 작가의 등단작이며 야심 찬 의지로 도전을 하게 된 에피소드도 편안한 이웃의 소식 같아서 좋았다.
다섯 아이의 엄마인 40대 여성이 파마를 하려고 간 동네 미용실에서 발견한 여성잡지의 공모전 소식을 보게 되고 불끈 의지를 불태운다.
누구나 당선의 꿈을 꾸게 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어땠을까 그 기분을 같이 만끽하는 마음으로 나목을 읽어나갔다.
박완서 작가는 글쓰기의 원동력은 회상과 기억의 재료로 이끌어간다고 했듯이 작가가 살아낸 20대 젊은 시절의 회상 속에 영향을 준 일과 사람들의 이야기로 잘 구성된 소설이 '나목'이었다.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맞이한 청춘의 비망록이 너무 절절하고 탄력감 있게 그려나간 소설이다.
가장 가까운 가족 간의 연결과 상실도 겪고 상처도 동여매는 주인공 경아가 고군분투하는 하루하루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주인공의 가족적 서사와 사회생활도 바쁘게 쫓아가보고 달달하며 애절하고 안쓰러운 청춘의 불끈거림도 많은 생각을 남겨두었다.
박완서 작가는 작품 속 옥희도 화가가 박수근 화가일 거라는 세간의 관심이 부담스러울 만도 할 테지만 간결하게 정리해 준다.
사회생활 중 만난 박수근 화가와의 짧은 인연이라 깊은 성찰을 할 수는 없었으나 어떤 모티브는 얻었음을 밝혔다. 그리고 소설은 소설로 감상해 주길 당부했는데 극 중 내용이 유부남인 옥희도 화가와 주인공 경아의 감정교류 장면이 있어서 관심이 갔던 것을 짚어준 것이었다.
시대적으로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 시기가 부각되고 주인공은 열정이 넘쳐나는 20대의 청춘이라는 점에서 다양한 감정들이 분출되고 추슬러지는 소설이 완성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몇 달 전 독서모임에서 토론의 쟁점은 역시 옥희도와 경아의 선 넘은 감정들을 이야기했는데 결국 감정을 배워나가는 경아는 여러 경로를 넘실거리다가 태수에게 안착하는 삶의 단면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소설의 마무리가 싸하게 느껴지던 일은 너무도 공감되는 부분이 많아서 저릿거렸다. 혼자이고 싶어서 가고 싶었던 옥희도 씨 전시회를 굳이 남편은 따라갔고 경아는 젊은 시절로 몰입하고픈 마음에서 벗어나게 하고 추스르게 되는 장치들이 현실감 있게 남았다.
현실에 있지만 늘 좀 더 다른 곳에 눈길을 주고픈 허황됨을 용서하고 다독여줄 사람은 나 자신뿐이란 걸 암시하는 느낌이라 오래 간직하고 싶은 결말이었다.
'나목'의 모티브가 여러 체험 속 지나간 시절의 회한과 반추로 꾸려진 소설이 되기까지 작가는 여러 갈래로 고민을 했다는 글을 본적이 읽었다.
난 오빠들을 통해서만 모든 사물을 받아들였고 이해하려 들었었다. p23
"아ㅡ니. 직장은 여기가 처음이고, 난 그냥 환쟁이였소"
p31
설날 아침에도 나는 김칫국이 반찬의 전부인 아침상을 받았다. p129
그렇다고 상대가 반드시 태수이어야 할 필요가 별로 없는 그냥 남성이라는 신비한 성이 불의에 나를 유인하고, 나는 부득이 그와의 접촉에 황홀하게 애착했다. p207
그는 지금 자기만의 일을 가지려 하고 있고 그 일엔 어떤 동반자도 필요 없는 것이다. p237
나는 그를 통해 수많은 군더더기의 나를 벗기를 원하고 있었다. 때로는 나를 찢고, 때로는 내 뒤에 숨고 내 뜻과는 상관없이 제 나름으로 요변하는 여러 개의 나를 벗기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p281
'어쩌면 계집애만 남겨놓으셨노' 원성과도 같은, 주문과도 같은 끔찍한 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p314
어머니는 눈치 보이고 거북한 딸네 집에서 마음 편한 아들네 집으로 홀홀히 가버린 것이다. 그뿐인 것이다. 나는 다만 좀 피곤했다. 그뿐이었다. p357
그러고 보니 아직도 해체되지 않은 한 모퉁이가 내 은밀한 곳에 남아 있는지도 몰랐다. p3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