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종교가 갖는 버팀목은 필요한 장치인 게 진정 맞는 것일까? 한 번도 종교를 멀리한 적 없이 여러 수호신이 나를 견디게 해 준 느낌은 무엇일까? 종교가 다양한 나의 종교 변혁기를 뒤돌아보자니 나라는 사람 근간 없이 줏대가 없는 신앙인이 아닐까 혼자 되짚어본다.
부모님은 정확하게 엄마는 불교신자이니 어릴 때 정서는 불교적인 근간으로 자란 기억이 남는다. 초등학생 때는 친구들과 우르르 여름성경학교의 재미로 몰려다니며 교회를 열심히 다녔는데 나의 정신세계는 어려도 무척 진지하고 집중적인 신앙심이 있었던 기억이다. 처음에는 어린애 놀이로 여겼는지 그냥 모른 척 두시더니 너무 열심히 종일 교회에서 지내며 성경 암송대회 준비를 하는 나의 모습에 교회 금지령을 내리셨다. 성경 암송대회가 곧 다가오는데 빠져버리니 선생님과 친구들이 가정방문을 왔고 더 질겁한 엄마는 매몰차게 불교신자라며 보냈다. 엄청 울고 떼쓰고 성경암송대회까지 다닌다고 약속하고 다행히 마무리했다. 그 당시 어린 마음에도 엄마가 마음을 바꾼 게 아니고 나의 간절한 기도가 이루어낸 승리라고 믿었던 기억이 또렷하다. 엄마 몰래 기도를 엄청 드렸던 시간이었으니 난 어린 마음에 기도빨을 알아챈 것이다.
그러다 순순하게 난 엄마 종교대로 불교신자로 나의 정체성을 잡았고 대학생 때는 그저 고요하고 자아성찰의 묘미에 빠지며 조계사 분위기가 좋아서 스스로 불교신자로 고민이 생기면 향부터 피우고 불경을 들으며 제법 불교신자처럼 굴었고 결혼 후도 여행 삼아 그저 사찰을 다니고 절밥을 좋아했다.
막내를 유모차에 태우고 동네 산책을 하던 30살 끝자락 시절에 아파트 단지를 끼고 자리한 성당 마당에 구경삼아 들어서는데 마리아상이 마음에 와닿았다. 표면적으로 불교 신자였고 차에는 늘 염주를 걸고 다녔으니 그때는 불교신자는 맞았다. 무슨 생각인지 성당 사무실로 들어가서 성당은 어찌 다니는지 묻고 무슨 공부를 해야 된다니 그때는 10월 끝자락이고 새 신자 교리공부는 겨울에 있으니 연락처를 남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그다음 해 7월에 교리공부를 마치고 미사라는 것을 참석하며 나는 40대에 하느님의 자녀 베로니카로 태어났다.
새 신자 신심이 활활 타오르는 뜨거운 시절을 활활 불태우며 두 딸도 첫 영성체 세례식까지 이끌며 착한 두 딸은 울며 견디며 새벽미사를 잘도 따라와 주었다. 창세기반에서 성서 모임도 하고 레지오 활동도 하고 40대 늙은 교리 교사로 활동하며 6학년 아이들과 어린이 미사도 두 딸과 참석하면서 신심은 굳건해지고 있었다. 어느 신부님의 우스개 소리로 그분은 기독교에서 가톨릭으로 신부가 되셨다며 개종자라고 사람 종자는 아닌 변절자라고 농담하시는데 원칙주의자 자매님들은 질겁도 하셨고 나 같은 개종자는 크게 웃었다.
세례식후 다음 해 견진성사까지 받고 나니 믿음은 더 굳건해졌고 나의 생활의 깊숙한 곳을 채워나갔다.
같이 성당에 다니자고 권하면 구원을 줘서 못 간다고 십원은 줘야지 하며 미루던 남편도 결국 배우자 특혜라며 진행된 외짝 신자를 위한 속성 교리로 한 달 만에 세례를 받았으니 나는 기쁜 마음으로 성가정을 이루고 매주마다 일요일의 나른함을 떨치고 가족 모두 미사를 드리고 귀가하며 뿌듯해하는 시간을 잠시 누렸다.
두 딸은 평화방송 합창단의 생활을 하기도 했으나 지금 우리 가족은 모두 스스로 알아서 기도하고 미사도 가끔 참석하는 냉담자가 되었다.
40대에 80대의 어른께 형님이라 칭하고 자매님 형제님이 익숙해지고 나의 성향과 다른 보수적인 체계가 답답하기도 했지만 난 지금 분명한 주님의 자녀 베로니카로 잘 늙어가고 결국 다시 은은한 신심으로 되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나의 묵상의 자리에는 아직 십자가상이 있고 기도는 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가톨릭 신자가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