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 죽은 이야기
‘너는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것이다’
우리들은 가끔 인생살이의 심오한 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을 두고 엄포를 놓을 때가 있다 죽음의 공포나 힘겨움을 깨달은 뒤에는 성숙해진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인가?
난 서른네 살의 삶 속에서 세 번 죽었다가 깨어났다. 그것도 한 가지 이유로 죽어야 했으니 굳이 병명을 꼽는다면 ‘자궁을 가졌다는 이유’가 될 것이다 과연 세 번 죽었다가 깨어난 이후로 성숙을 얻었는지 헤아려보게 된다
= 첫 번째 죽음 =
92년 겨울 , 20대 마지막에 찾아온 죽음은 새 생명의 잉태와 함께 왔기에 많은 상처를 주었다. 결혼 후 처음으로 아이를 가졌으나, ‘계류유산’이라는 진단으로 첫 번째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자궁 안에서 태아의 심장이 멎음으로 자연유산이 된다는 의사의 설명은 아득하고 수술실에 들어가 ‘전신마취’로 중절수술을 한다는 사실이 철부지 엄마는 두려웠다. 아이의 상실감보다 더 두려웠다. 그때는 놀이방을 직접 운영하며 왕성한 활동을 하던 때고 규모를 넓혀서 이전하느라 무리한 것이 화근이 되어 확장의 기쁨을 맛본 지 한 달 만에 슬픈 일이 생기고 말았다. 태어나서 병원 출입은 결혼 초에 발가락 여섯 바늘 꿰맨 기억밖에 없기에 전신마취 자체가 죽음과 같은 무게로 느껴졌다. 남편 역시 비장한 가운데 위로를 하느라 아이를 잃는 슬픔은 내색도 못했던 것 같다.
수술 일정이 잡히고 기다리는 동안 나도 모르게 유언 비슷한 이야기를 계속했고 남편은 얼굴이 굳어진 채 안절부절이었다. 이름이 불리고 들어간 수술실 정경은 비장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다른 세계 같았다. 간호사들끼리 절그덕 거리며 수술도구를 정리하고 깔깔 웃는 모습이 왜 그리도 야속했는지 모른다.
“ 환자분 , 이 바구니에 옷 벗은 것 담아서 들어오세요”비죽이 안겨주는 빨간 플라스틱 바구니를 보자 몸부터 덜덜 떨렸다. 목욕탕에서 하듯이 옷 벗어 담고 들어 서니, 3,4명의 간호사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환자분, 옷을 다 벗으면 어떡해요? 바지만 벗어야지”
“그리고 안경은 왜 썼어요?” 웃음을 추스르며 다시 돌려세우는 간호사가 순간 올바른 걸 가르쳐준 사람처럼 고마울 정도로 거의 얼이 빠져있었다. 나중에 시댁 식구들과 모여 이 얘기를 나누며 배꼽들을 잡고 웃었던 기억이 난다. 정말로 무서웠다. 내가 순간 죽어있어야 한다는 것이.... 무슨 일이 생기면 이 찰나의 모든 것이 정지된 채로 난 없어져 버리는 것이기에 막막했다. 기본 검사하느라 분주한 간호사가 “환자분, 숨소리가 왜 이렇게 거칠어요? 어디 몸 안 좋은데 혹시 있었어요?” 불쑥 던진 한마디에 내 조건이 안 좋은데 이 사람들이 나를 수술시키나 싶어 가슴이 벌렁거렸다.
“왜 제가 어디가 몸이 안 좋아요?”겁먹은 표정으로 되묻자 간호사가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가지라고 다독거려 주었다.
“제가요 수술은 태어나서 처음이라요 , 너무너무 무서워서 그런가 봐요”
어린애처럼 멍청하게 굴다가 10까지 세라는 간호사의 말대로 숫자세기를 했지만 3까지만 내 귀에 들으며 난 첫 번째 죽음을 맞이했다.
= 두 번째 죽음 =
두 번째 죽음 역시 중절이었음이 새삼 가슴 아프게 기억된다. 우여곡절 끝에 딸아이를 32살에 얻고 나서의 일이었다. 10개월로 접어든 딸아이 재롱이 무르익어 갈 즈음 상상조차 안 했던 임신이 된 것이다. 문제는 첫 아이 임신 때 발견된 왼쪽 난소의 물혹이 무척 커졌다는 사실이었다. 담당의사는 임신 9주까지 기다렸다가 물혹을 떼어내면 된다고 했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아무리 의학이 발달했다손 치더라도 죽은 엄마의 몸에 있는 9주 된 태아를 상상하니 ‘기형아 출산’에 대한 무서움이 떠나질 않았다. 다니던 종합병원을 외면하고 중절이 가능한 병원으로 가야 했다. 첫 번째 수술이 합법적인 것이었다면 두 번째의 경우는 불법이었다. 불법적인 것은 여러 불이익을 주었다. 우선 수술비에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았고 수술실이 외지고 음습하였다. 당시의 내 마음이 그랬는지 모르겠다. 너무도 우울한 그래서 기억하기 싫은 죽음이었다. 수술의 순서를 기다리며 마취가 깨어나는 과정에서 괴로워하는 여자들을 보면서 난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라는 영화제목처럼 '내가 자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를 혼자서 되씹고 있었다. 거의 발악에 가까운 행동을 하는 여자들 앞에서 간호사들은 창고에서 짐을 날아오듯이 회복실로 끌고 나왔다.
“어휴, 이 아줌마는 그래도 가벼워서 다행이다. 조금 전 아줌마는 왜 그렇게 무겁냐?”태연한 그들의 말속에 순간 나의 체중을 헤아려보는 소심함이 생겼다. 남편에게 다짐다짐 해놓고는 들어간 수술실은 처음보다는 덜 두려웠다. 우선은 클래식 음악이 수술대 맞은편 오디오에서 흘러나왔고 수술 순서를 한 번 겪었던 나는 말 잘 듣는 학생처럼 고분고분하였다.
두 번째는 차분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게 성숙이라고 꼽을 수 있겠다.
= 세 번째 죽음 =
드디어 세 번째 죽음에서 초월의 경지를 맛보아야 했다.
96년 4월 5일 식목일의 죽음!
문제가 있었던 왼쪽 난소의 물혹이 3번 꼬였다는 의사의 진단 속에 조금 더 관망한 후 수술하자는 의사의 말을 외면하고 내가 죽기를 자청했다. 밤새 한숨도 못 자고 괴롭기만 했던 아랫배의 쥐어짜는 고통을 참기 어려웠고 계속 말썽을 일으키는 그 혹을 떼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신마취’를 해도 죽지는 않았었고 무엇보다 고통 속에서 해방되고 싶어 징징 울며 공휴일임에도 수술하겠다고 우겼다. 남편 역시 너무도 괴로워하는 나를 보았기에 쉽게 동의하였다.
세 번째의 죽음에서는 그 ‘죽음’보다는 깨어나서 1주일 동안 입원해 있던 같은 병실의 환자들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다. 그들 역시 ‘자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기막힌 사연이 많은 사람들뿐이었다. 결혼을 앞둔 20대부터 50이 훨씬 넘은 아줌마까지, 그리고 칠순이 되는 분까지 모두 자궁이 문제였다. 세상 살아온 이야기를 1주일 동안 틈나는 대로 나누며 인생살이의 테두리를 넓히게 되었다. 그때의 얼굴들이 선명해지고 가슴이 아릿해져 온다.
세 번의 죽음을 겪은 후의 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걸까? 지금은 오히려 죽음이 두려워 삶을 성실하게 꾸리며 살아간다면 너무도 나약하고 비겁한 삶이 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