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티브 쟁이기

by 리단쓰

요즈음 가끔 모티브만 적어둔 습작 노트를 들여다보며 시원스럽게 글들을 살찌우고 싶다는 생각에 와락 조급증이 생기곤 한다.

짤막한 글들을 일기처럼 수필처럼 쓰고 책을 읽고 독후감 정리를 하다 보면 손가락 근육이 게으름을 피우고 더 이상 진도를 나가려고 하지를 않는다.


20 때에는 소주잔을 기울이며 세상 무거움 다 안은 것처럼 세상 모든 것이 슬프고 막막해서 힘들던 시간도 있었다. 괜스레 나태함을 탓하며 그저 핑곗거리가 아직 세상도 모르면서 무얼 글을 쓰냐며 술이나 먹자고 헤헤거리던 시절도 있었다. 더 나이 먹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세파도 겪고 나이 60 넘어서 진짜 글을 쓰자고 위안을 삼던 치기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그런데 어쩌나 그 시절 다 지나고 이제 60대의 시간에 서있는데 더 이상 핑계는 안 통하는 시간이 눈앞에 있다. 80년대 당시 대학가에서 가장 핫한 또래의 작가는 김인숙과 공지영 같은 작가가 있었고 그저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점지된 타고난 사람들이고 우린 우리의 사명이 있다고 낄낄거렸던 추억이 떠오른다.


아무튼 술 한잔 기울이며 소위 말하는 구라를 풀다가 좋은 건수가 있으면 딱 내 것이라며 서로 모티브 쟁이기도 하고 습작노트에 소중하게 담아두던 재미난 시절이었다.


새해 첫 독서모임에서 시낭송 모임을 하는데 모티브가 한 가지 떠오르며 다시 뒤적이는 시간이 되었다. 바로 모임멤버 A가 준비해 온 박준시인의 시에 담긴 것인데 마중도 배웅도 없이의 에피소드에 관한 설명을 듣게 되었다. 이상스레 마중과 배웅은 문밖에서 이루어지는 동일한 몸짓이고 혹은 만남과 이별이 공존하는 느낌이다.


손짓이 헷갈리는 마중과 배웅의 에피소드 역시 20대의 기억 속에 한 자락 남아있다. 그저 낄낄거리는 수다 속에 자주 등장하는 내용은 청춘남녀의 연애사일 테고 함께 모였던 친구 중에 한 명이 풀어놓은 이야기에 질펀하게 웃었던 추억이 바로 내 습작 노트 한편에 콩트로 남겨져 있었다.


20대에 지겹도록 헤어짐과 재결합의 지겨운 연애를 하던 친구 커플이 드디어 결혼을 하고 집들이를 가게 되어서 생기는 에피소드인데 거기서 포인트가 손짓이 오해로 생긴 것이었다. 마지막 이별의 순간을 기나긴 육교 위에서 하게 된 커플이 이번에는 진짜 헤어지는 거라며 각자 길을 떠나는 순간 예의상 뒤돌아보며 남자가 손짓을 하는데 그 의미는 어서 가라는 손짓인데 어서 다시 오라고 오해한 저 멀리 여자가 갑자기 울면서 달려와 와락 안기는 통에 다시 재결합의 연애가 되고 결혼까지 가는 이야기였다. 다만 그 커플은 그날의 극적인 결합이 둘 사랑의 끈적임으로 알고 지내다 집들이날 친구들의 수다 속에 덜컥 손짓을 오해한 사실이 밝혀지고 부부싸움을 한다는 설정이었다. 이제 60대에 이르러 들여다보니 모두 다 사랑하리의 버전을 떠나서 다시 한번 성찰을 담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여하튼 글쓰기는 그저 나의 시간의 윤활유이고 기쁜 구석이다.


습작노트 한편에 기존 콩트에 박준 시인의 시를 얹어서 무게감 있고 인생을 통찰하는 의미를 담아본다라고 새롭게 한 줄을 적어둔다. 언제 나타날지 미지수인데 일단 쟁인다.


스산한 겨울 날씨에 포로롱 따스한 김이 올라오는 레몬이 둥둥 떠있는 차 한잔을 앞에 두고 습작노트 속 이것저것을 뒤적여보는 재미가 따스한 밤이다.


소중한 시 한 편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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