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전작 읽기- 5월] 노랑무늬영원

노랑무늬영원

by 리단쓰

한강 작가의 장편을 읽다 보면 길게 늘어서는 구성이라기보다는 뚝뚝 끊어지는데 묵직하게 이끌어 가는 느낌으로 읽히는 것을 느끼곤 했다.

이번 단편소설 묶음은 모두 7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작품집으로 '노랑무늬영원'이라는 의외의 제목으로 만났다. 제목 하나를 정하는데도 숨어 있는 뜻을 잘 녹여둔 작업이 역시 놀랍고 감탄스럽다. 노랑무늬영원이라니 글자 그대로의 느낌에서는 전혀 눈치챌 수 없는 도마뱀의 이름이라니 역시 의외성으로 깜짝 놀라는 경험을 던져주는 독서였다.


한강 작가는 단편소설집 말미에 작가의 말로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었다.


'단편은 성냥 불꽃같은 데가 있다.

먼저 불을 댕기고, 그게 꺼질 때까지 온 힘으로 지켜본다.

그 순간들이 힘껏 내 등을 앞으로 떠밀어줬다.'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된 단편들 7편은 역시 한강 작가의 한결같은 무거운 삶의 고민들과 세계관과 가치관과 외침들이 진하게 배어 있는 각각의 모습으로 다가와준다.


단어 하나하나와 설정들의 진중함과 뼈 시린 성찰을 곳곳마다 장치해 둔 작가의 저력을 감사한 마음으로 느끼는 독자의 시간이 마냥 뿌듯하고 충만스러웠다.


7편 모두 한강 작가의 곱씹은 노력과 정성이 엿보이지만 나는 특히 '훈자'를 깊이 새기며 두 번 읽었다. 찡한 끌림으로 읽어나갔고 왠지 한번 더 살펴보고픈 마음에 마지막 장을 읽고 다시 되돌아가 읽게 되었다. 내 마음속 버팀목은 분명 훈자였던 기분이 있었고 숨겨둔 비밀의 힘이 다 까발리고 별게 아닌 게 되어도 훈자는 늘 찾고 싶은 최종점의 좌표였기에 중요한 느낌이었다.


" 한강 작가의 원초적인 진액이 잔뜩 묻어있는 7편의 단편들 속에서 자꾸 무엇이든 목 넘김을 해내고 싶다는 열망으로 살짝 안달이 나는 독서였다. 특히 '훈자'라는 작품은 자꾸만 자꾸만 내 발목을 휘감더니 불끈 힘이 되어서 나를 우뚝 세우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내 중심축의 훈자도 분명 그곳에서 나를 기다릴 테고 절대로 훼손되지 않은 채로 나의 깊은 곳과 상봉하면 좋겠다."


1 밝아지기 전에

부질없는 심문과 대답사이, 체념과 환멸과 적의를 담아, 서늘하게 서로의 얼굴을 응시하는 시간.

눈이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는 시간.

내 죽음 속으로 그가 결코 들어올 수 없고, 내가 그의 생명 속으로 결코 들어갈 수 없는 시간. p28


2 회복하는 인간

나도 앞이 보이지 않아. 항상 앞이 보이지 않았어. 버텼을 뿐이야. 잠시라도 애쓰고 있지 않으면 불안하니까, 그저 애써서 버텼을 뿐이야. p63


3 에우로파

그녀는 아직 나를 비겁자라고 부른 적 없다. 비좁고 높은 평균대 같은 내가 살고 있는 경계에서 뛰어내리라고 말한 적도 없다. p102


4 훈자

훈자로부터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는 새벽, 그 여자는 으슥한 골목에 엎어진 자신의 흙투성이 뒷모습을 내려다보는 꿈을 꾸었다. p 116~117


그 여자의 입이 틀어 막히면 훈자도 입이 틀어 막혔다. 빙하가 녹은 뿌연 물이 흰 피처럼 배수관을 흐르는 동안, 그 여자가 목마르면 훈자도 목이 말랐다.

그 여자가 더럽혀지면 훈자도 더럽혀졌다.

그 여자가 침을 뱉으면 훈자도 침을 뱉었다.


5 파란 돌

거긴 지낼만한가요. 빗소리는 여전히 들을 만한가요. 영원히 가져오지 못하게 된 감자 생각은 잊었나요. p154


6 왼손

이상한 것은 그의 왼손이 마치 나름의 의지를 가진 것처럼 뺨의 상처 주변을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 p159

충혈된 눈가의 끈적이는 얼룩을, 피 묻은 왼손이 어루만져 붉게 물들였다 p208


7 노랑무늬 영원

그 모든 것들이 고요히, 그 사진관의 먼지 낀 상자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내 시계처럼. 이 년 동안 어둠 속에서 죽지 않고 고요히 돌아가고 있었던 초침처럼.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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