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이미 너무도 알려진 주제는 80년 5월 18일 광주의 사건이었다. 그날의 잊으면 안 될 역사적 기록이 가득한 아픈 역사의 증거물은 '소년이 온다' 안에 잠겨있었다.
80년대 대학 시절 정의를 생각하는 젊은 피들의 최대 화두는 무고한 광주시민이 겪은 학살의 시간이었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읽기 전에는 광주학살이 주제이며 중학생의 어린 나이로 엄마품을 떠나버린 처절한 이야기일 거라는 생각을 스스로 규정해 보았다.
해맑은 소년이 있을 테고 어린 아들을 잃은 엄마의 애절한 통곡이 펼쳐지는 서술이 아닐까 추론해 보았다.
역시 한강 작가의 필력과 포맷은 대단하다는 느낌으로 '소년이 온다'를 읽어 나갔다.
내가 생각한 구성은 없었다. 혼백의 화자가 들려주는 그날의 참상이라니 너무 처절하게 아려왔다.
너무도 잘 알려진 역사적 사건이지만 국가적 차원의 성찰보다는 개인적인 접근의 역사로 서술했고 다각도의 인물을 설정해 두어 그날의 참상을 담아내고 있는 '소년이 온다' 작품은 한강 작가 스스로 권장도서로 꼽는 것이고 작가로서 소임의 의미도 깊은 작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역사적 현장의 출신이라는 지역적 연결 고리가 아니어도 한강 작가는 찾아내고 규명했을 역사적 부채감을 지닌 성향이었을 것이다.
소년이 온다를 집필하려고 결심한 계기가 당시 시민군으로 도청에서 죽음을 맞이한 어느 야학교사의 5월 21일 자 일기를 떨구지 못한 한강 작가의 양심은 어쩜 수많은 그곳의 죽음들과 빙의된 작가적 채무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5월 18일부터 펼쳐진 열흘정도의 처절한 현장에서 죽을 줄 모르고 죽음을 택해서 양심을 지킨 야학 교사의 양심의 목소리는 살아나게 되었다.
노벨 문학상 수락 연설을 여러 번 보며 담담한 듯 결연한 한강작가의 낭독이 선명해진다. 특유의 잔잔한 평타의 발성 속에 우직한 고집스러움을 담아내어 설득하는 모습에 동시대의 사람으로서 감사와 안심을 얻기도 했다.
12살의 어린 심성에 각인되었을 광주학살의 잔인한 사진첩을 잘 견디며 곰삭히고 스무 살 겨울에 망월동 묘역에서 희생자 모두를 되새기고 되새기다 써 내려간 작품이니 얼마나 소중한 것들이 중요한 것들이 가득할지 감히 그 심연을 헤아리기도 버거워진다.
나는 80년 5월 고등학교 2학년 때 수학여행 마지막 날에 긴장된 분위기 속 귀경 방법에 대한 설명을 하는 선생님의 두려운 눈빛 속에 우리는 전쟁이 났다며 여행의 흥도 떨구지 못한 채 울먹거렸다. 그날이 그날이었던 것을 나중에 사 알았다.
삶은 그런 것인가? 또래들의 죽음의 시간에 우리는 첫 술을 맛보며 흔들고 게임하고 누렸던 것이다.
원래 계획은 학교 해산이었다가 갑자기 개별 귀가로 바뀌고 영등포역에 도착하니 엄청 긴장된 아버지가 마중 나와 있었고 그 이후로 다시 일상이 꾸려졌던 기억이 남는다. 철저하게 고립된 광주의 신음소리는 그렇게 묻히고 82년 대학에 들어가서 만난 역사적 부채의식의 광주 학살 사진첩은 비밀 문건으로 접하게 되었다.
20대에 들으며 느꼈던 분노와 처절은 휘발성 높은 화력이었다면 60대에 되새겨보는 광주의 그날은 욱신거리게 아픈 열기를 쟁이는 시간이었다.
절대로 무자비한 살상과 폭력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기를 생명의 존엄성이 잘 지켜지기를 바라는 독서였다.
그들이 원한게 무엇이었는지. 우리를 굶기고 고문하면서 그들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너희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른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었는지. 우리가 깨닫게 해 주겠다. 냄새를 풍기는 더러운 몸, 상처가 문드러지는 몸, 굶주린 짐승 같은 몸뚱어리들이 너희들이었다는 걸, 우리가 증명해 주겠다. p 22
살아남은 자들의 최대화두인 듯싶은 아픈 구절이었다.
죽지 말아요 제발 살아주세요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p 114
죽은 자들의 이유는 너무도 아프다.
맑디맑은 영혼과 양심의 결과로 그들은 무참하게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