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때때로 갈 곳 잃은 시간 속에 이방인 같은 생각이 든다'
국적은 한국, 외국 영주권을 갖고 있다.
외국에 살 땐 당연히 이방인이었으니 그로 인해 우울해하진 않았다. 아니 우울할 시간 없이 바쁘고 치열한 시간이었다.
하루하루를 알차게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어 나눠 썼다
일할 때 나는, 열심히 한다는 것으로 부족한 , 말 그대로 목숨을 걸었다.
매년 연말이 되면, 40여 시간에 걸쳐 중국으로 건너가 일을 하고 ,
한국에 들러 오랜만에 부모님과 형제들을 만나고,
미국에 가서는 자녀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쇼핑에 들려 쌘풀도 구입하는 등 한 달을 참 요긴하게 썼다.
연말의 한 달은 단순한 휴식이 아나라 , 일과 가족 간에 관계, 삶에 균형을 재정비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짜 놓은 듯 바쁘게 살던 삶...
바쁜 날들 속에서 하루에 30분만 더 잘 수 있다면 ,
며칠 만이라도 집 안에서 여유롭게 뒹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했던 나!
막상 맞이한 한국의 한가로운 생활은 , 뜻밖에도 낯선 허기로 느껴졌다.
내가 다져 놓았던 삶의 구조가 갑자기 헐거워지는 느낌이 들며,
마음은 혼란스럽고 헝클어진 실타래 같은 느낌이 들었다
코로나로 인해 잃어버린 시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잃어버린 시간,
이대로 멈춰서는 것 같은 시간들이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지만, 노력형인 나는 우울하지 않으려고,
무너지지 않으려고 애써보기도 했다
코로나로 세상이 멈춰 있던 시기,
나는 과일 플레이팅에 몰두하며 매일매일을 채워 갔고,작은 성취감으로 뿌듯함도 느꼈다
코로나가 종식되고, 밖으로 나가니 뭔가 더 힘들고 어디를 가나 좀 어색하고 쭈삣거린다.
한국은 어디를 가도 젊은 이들로 가득하다.
쇼핑몰도 , 식당을 가도, 거리에도 나이 든 사람보다 젊은 얼굴이 훨씬 많다
한국이 고령화 사회라는데 많은 노인들은 다 어디에 머물고 있는 걸까?
나처럼 시간의 속도를 견디지 못해 조용히 물러나 자기네 끼리 어울리고 있는 걸까...
말을 할 때면 , 내 언어가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무심결에 포르투갈어 단어가 섞여 나오기도 한다.
나는 다른 시간에 언어를 가진 사람인듯하다. 그 또한 나의 지나온 삶에 흔적 일 텐데...
요즘 한국 사람들의 말은 세련되고 도시적이다.
문장 곳곳에 영어 단어가 자연스럽게 섞여 있고 , 시대의 속도감과 결이 느껴진다.
현제의 언어문화와 30년 전의 언어표현 방식에서 커다란 문화적 간극도 체험한다
언어는 흐르는 강물과 같이 변한다더니...
밖이 두렵고 집안으로 숨어들고 싶어 하는 나를 보며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한국말로 표현하면 "너는 일할 때 보면 기계 같다 , 넌 일할 때 보면 신들린 사람 같다"하던 직원들 말도 생각났다
화장실 가는 것도 잊은 채 열정이 넘치고, 일에 몰두하던 나는 어디로 간 걸까?
30년의 단절된 세월은 형제간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틈이 생긴 듯 때때로 대화에 공통분모 찾기가 힘들 때도 있다.
서로의 얼굴엔 익숙함이 있지만 , 대화 속에서는 때때로 낯선 공기를 느낀 다.
같이 웃고 즐기지만 , 너무 오랜 다른 삶을 살아온 탓에 마음에 엇갈림이 느껴져 때로는 서운함도 느껴진다.
분명 즐겁게 보내고 온 시간이었는데 돌아오면 뭔가 허탈하고 이방인 듯한 생각이 들어 쓸쓸함이 밀려온다
어쩌면 이런 감정은 나만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 틈 마저 조용히 채워가며, 많은 이들이 부러워할 만큼 형제의 우애를 갖고 있다
내가 태어난 이 나라에서도 나는 죽을 때까지 한낱 이방인 같은 낯선 마음으로 머물러야 하는 걸까?
눈물이 핑 돌았다
그때 마침 미국에 있는 아들이 화상통화를 걸어왔다
"엄마 어디 편찮으세요? "
"아니, 괜히 국제 고아가 된 것 같아 좀 우울하네~~" 하며 애써 웃었다.
"엄마는 많은 초이스를 갖고 계신 거예요."
"브라질에서도, 한국에서도, 미국에 오셔도 사실수 있잖아요.
외국 나가고 싶어도 못 나가는 사람이 많은데~ 난 그렇게 초이스가 많은 엄마가 멋진데요"
"아들 말을 들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힘이 나네! 땡큐"
그 말에 나는 잠시 멈춰 서서 나를 뒤돌아 봤다
옮길 때마다 낯설고 외로웠던 선택이 아니라, 세계 어디를 가도 살 수 있는 능력과 힘...
나는 떠도는 사람이 아니라 어디서든 살아낼 수 있는 멋진 사람임을 아들이 일깨워 주었다.
오래전, 아들의 졸업 무렵이었다.
미국 가서 공부하고 싶다며 홀로 떠난 아들이, 합법적인 체류자격을 이어가지 못한 채 돌아오게 되지는 않을까 불안했다.
아들과 전화통화 중 "H-1B 비자를 못 받으면 돌아와야 하는데 엄마는 걱정이 많다"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제 인생이니 얼마나 최선을 다 하겠어요"
낯선 땅에서, 혼자 힘들게 공부하고 살더니 이제는 자기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고자 하는 의지가 느껴졌다.
뿌듯하고 든든했다.
그러던 아들이 이제 나이가 들어, 엄마 아빠를 챙긴다.
내가 아들의 힘이 되어 주고, 격려하며 살았는데, 이제는 아들이 나를 이해하고, 다독여 준다
세월의 돌고 도는 순환 속에, 내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느껴졌다.
삶은 이렇게 대를 이어가며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사는 듯하다
갈피를 잃고 혼란스러웠던 마음을 조용히 다잡았다.
'그래, 난 할 수 있어!
말 모르는 나라에 가서도 잘 살고 왔는데!'
문화원을 찾으며 내 생활은 차츰 변화하기 시작했고, 2025년 서초 나비코치 아카데미 강의도 들으며 코칭자격증 취득에도 도전하고 있다.
작지만 꾸준한 배움이 내 삶에 또 다른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한 달 전엔 "브런치 작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라는 메일도 받았다
아침이 올 때마다, 나 자신을 다독인다 "sandra, 넌. 할 수 있어 파이팅!
모든 게 감사하다!!
(남편과 마주 앉은 브런치 타임) 정성스럽게 플레이팅한 과일과 커피,그 곁에 예쁜 튤립이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