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9살 건강한 신체를 빼면 크게 자랑할 것이 없는 평범한 청년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별다른 스펙과 기술은 없지만 운 좋게 취업에 성공했고 많진 않지만 아껴 쓰면 약간의 저축도 가능한 월급을 받으며 퇴근 후 치킨에 맥주 한 캔 하는 것이 인생의 낙(樂)인 대한민국의 청년 1이 나였다. 멋지고 비싼 외제차 또는 명품시계, 지갑 등을 산다거나 해외여행 등 돈이 많이 들어가는 취미엔 별로 관심이 없던 터라 쥐꼬리만 한 월급에도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다.
졸업 전 뭐해먹고 살지라는 고민에 밤잠을 설치던 것에 비해 무난하게 학생에서 직장인으로 전직에 성공했다. 밥 먹으며 가끔 보던 뉴스와 다큐에선 수많은 청년들이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고 당장 주변에도 취업을 하지 못해 힘들어하는 친구들이 있었기에 그들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내심 내 상황과 비교하며 큰 굴곡 없는 나의 삶에 감사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졸업생 특강으로 만난 고등학교 후배들에게 "어떻게 먹고살 수 있을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놀 수 있을 때 많이 놀아라", "하고 싶은 것 없고 잘하는 것도 없던 나도 취업해서 잘 먹고 잘살고 있다"라고 얘기할 정도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를 불러주신 고3 때 담임쌤이 이 놈 이거 괜히 불렀다고 생각하신 것이 아닐까 하는 죄송한 마음과 후배들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는 좀 더 멋진 말을 해줬어야 하나 하는 후회가 살짝 든다. 하지만 그땐 진짜 그런 마음이었다.
나는 스스로를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다니는데(이상하리만큼 로또 번호는 하나도 맞질 않지만) 그 이유는 앞서 말했듯 별다른 스펙과 기술 없이도 졸업 후 바로 취업에 성공한 것도 있지만 2번의 이직을 하며 총 3곳에서 일하는 동안 만난 동료, 상사 분들이 모두 좋은 분들이었고, 한 번도 월급이 밀린다던가 하는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3곳 중 2곳은 정시출근 정시퇴근이 가능한 곳이었다.
하지만 이런 평화로운 일상은 두 번째 이직을 하며 깨지고 말았다. 세 번째로 다니게 된 회사는 앞전의 회사들과 달리 업무의 양이 무척 많았고, 업무 특성상 퇴근 후에도 업무 연락을 받아야 했으며, 정시퇴근을 하기 힘들었다. 출퇴근 시간도 1시간 반으로 늘어 집에서 아침 7시 20분에 나와 20시가 넘은 시간에 집에 들어오기 일쑤였다. 7호선은 사람이 왜 이렇게 많고 내리는 사람 없이 타기만 하는 건지 출근하기도 전에 진이 다 빠졌다. 사람이 화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퇴사 욕구가 꿈틀꿈틀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던 것 같다. 아침에 눈을 뜨기 싫고 내일 지구가 확 망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더 이상 행복하지 않았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사전은 행복을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껴 흐뭇한 상태]라고 얘기한다. 행복은 사랑처럼 누구나 한 번쯤 해봤고 하고 싶어 하는 것이지만 정의 내리긴 어려웠다. 지금도 행복이 뭔지에 대해 알아가는 중이다. 그래서 질문을 '난 언제 행복했을까?'로 대답하기 좀 더 쉽게 바꾸었다. 답은 의외로 금방 할 수 있었다.
언제 행복했는지에 대한 답을 얘기하기 전에 고백을 하나 하자면 난 사실 평범한 대한민국의 청년 1이 아닐지도 모른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의 귀농으로 초등학생 시절을 버스도 다니지 않는 완전 산골 마을에서 자연과 함께하며 자랐고, 평생 학원이라고는 피아노 학원과 태권도장 밖에 안 다녔다. 심지어 태권도장은 방학 때 한 달 다니고 그다음 방학에 백지상태로 다시 등록하는 것을 반복해 흰띠를 벗어나지 못했다.
중학교는 부모님의 귀농 실패와 교육 관련 이슈로 도시에서 다니게 되었다. 어느 수능 만점자처럼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지만 반에서도 1등을 해본 적은 없었고, 공부해서 먹고살긴 힘들 것 같다는 생각에 고등학교를 대안학교로 진학했다.
고등학교 생활은 아주 재밌었다. 입학하니까 1주일 동안 제주도를 걷기도 하고 2박 3일 지리산 종주를 하질 않나 심지어 2학년때는 네팔로 2주간 봉사를 가기도 했다. 이런 특별활동 외에 기본적으로 인문계 고등학교와 달랐던 점은 주 2회 배우고 싶은 분야의 멘토를 직접 찾아 활동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먹고살려면 돈 벌어야 하는 거 좋은 일 하면서 돈 벌면 좋겠다는 생각에 사회적 기업 창업을 하겠다며 사회적기업지원센터장님과 멘토멘티 관계를 맺고 다양한 활동을 했었다.
산골 마을에서의 경험을 통해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않더라도 자연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의 기쁨에 대해 배웠고, 고등학교에서는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이 아닌 상생의 가치에 대해 배웠다. 이러한 경험과 배움이 행복을 찾아 무작정 퇴사해 버리는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체육관 외벽에 크게 걸려있던 신영복 교수님의 서화
다시 돌아와서, 언제 행복했는지 곰곰이 고민해 보니 산골마을에서 살 때였다는 답을 내릴 수 있었다.
온 가족이 컨테이너에서 1년 동안 살며 살 집을 직접 지었던 일,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려가며 직접 농사지은 신선한 채소들을 수확하던 일, 겨울이면 비료포대를 플라스틱 썰매 대신 사용해 눈 쌓인 배수로를 씽씽 달리던 일 등 재밌었던 추억들이 한가득 떠올랐다.
그래서 결정했다. 행복을 찾아 서울을 일단 탈출하기로. 어디가 될지는 모르지만 시골로, 로컬로 이주하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