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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55세의 나의 얼굴이다

k성형 없이, 오직 영혼으로

by Lee Anne

처음 한국행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 나는 어떤 꿈을 좇거나 잃어버린 가족을 찾으려 했던 게 아니었다. 나는 불행에서 도망치고 있었다. 사랑도 없이 숨 막히던 관계 속에서 나는 더는 견딜 수 없다는 걸 스스로 알고 있었다. 그저 변화가 필요했던 상황이어 아무 계획도 없이 미국을 떠나기로 했다. 무작정 한국으로 왔다. 그 땐 몰랐다. 한국의 공기를 처음 들이마신 그 순간, 내 삶의 방향이 바뀔 거라는 걸.


인천공항에 도착하고 나를 닮은 수많은 한국 사람들 틈에 섞이니 낯설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한국어도 모르고, 문화도 생소했지만, 처음으로 묘하게 ‘집’이란 감정을 느꼈다. 이름 붙일 수 있는 장소도, 뚜렷한 기억도 아니었지만, 마치 오래전에 잃어버린 무언가가 조용히 다가와 나를 감싸 안아주는 듯한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정이었다.

26396 (2).jpeg 50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오다


서류상으로 나는 미국 입양으로 ‘인생 역전’을 한 아이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서 세 살이 조금 넘었을 때, 미시간의 젊은 부부에게 입양되었다. 나의 양부모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했고, 독실한 신앙심을 가진 이들이었지만, 국제 입양아를 키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몰랐다.


나는 음식을 몰래 감추며 모았고, 사과를 씨까지 통째로 먹었다. 침대 밑이나 옷장 속에서 잠들었고, 공공장소에서 자주 화장실 실수를 했다. 양부모는 이런 ‘야만적인’ 행동을 고치려 신체적, 언어적 체벌을 가했다. 그들에게는 훈육이었겠지만, 내게는 거부로 다가왔다.


나는 끊임없이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확인을 받고 싶어 했지만, 한번도 진심으로 인정받았다고 느낄 수 없었다. 외모에 집착했고, 섭식 장애에 시달렸고, 중학생 때부터 자살 충동에 싸워야 했다. 한 번의 시도는 결국 경찰차와 정신병원으로 이어졌고, 양어머니는 나를 의절하겠다고 했다.


몇 년 뒤, 나보다 어린 한국 출신 입양 동생, 로라가 세상을 떠났다. 자살이었다. 그녀의 죽음은 나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십 년 넘게 그녀를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쏟아졌다. 죄책감이 나를 잠식했다. 나는 그녀가 더 나은 딸이었다고, 더 나은 한국인이었다고 생각했다. 왜 내가 살아남고, 그녀는 떠나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4년 동안, 나는 또 네 명의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연인이었던 리처드, 형제 같은 네이트, 평생 친구 샤론, 그리고 인생의 멘토였던 빅토리아. 슬픔이 겹겹이 쌓였다. 나는 어릴 때부터 달리는 걸 좋아했지만, 그 후로 달리기는 생존의 방식이 되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내가 여전히 살아 있고 싶은가’라는 질문이었고, 매 마일마다 ‘내가 숨 쉴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조용한 증명이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내가 견딜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의미 있는 무언가를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20240908_100448 (1).jpg 달리기를 잠시 쉬는 중


한국에 돌아왔을 때, 나는 기적을 기대하지 않았다. 생부모를 찾으려는 마음도 없었다. 그저 평온을 원했고, 고요한 시간을 바랐다. 새로운 풍경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만난 풍경은 너무나도 조용하고 아름다워 숨이 멎을 만큼 놀라웠다. 예상치 못했고, 부인할 수 없었고, 나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나는 인생의 사랑을 만났다. 내 인생의 반려자, 탐.


또한 나는 영혼의 자매를 만났다, 수영.


이제 우리는 ‘한국의 삼총사’다. 웃음과 사랑, 두려움 없는 창의성으로 중년을 향해 나아가며,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만족감을 함께 나누고 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내 삶의 구경꾼도, 존재 자체가 낯선 이방인도 아니다. 한국에 와서 알아보니 나는 잘못된 입양서류보다 실제로는 일곱 달 더 나이가 많았다. 쉰 넷의 나이에 알게 된 사실이라 기쁘지만은 않았지만, 늘 경계선에서 살아온 나에게는 어쩌면 잘 어울리는 일이었다.

20240913_092253.jpg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 중


이제 나는 내 이야기를 내 목소리로 말한다. 부끄러움이 아닌, 품위 있게. 나는 부서졌던 게 아니다. 나는 성장 중이었다. 이제는 삶이 흘러가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의도적으로 선택하며 내 삶을 만들어가고 있다. 탐이 쓴 노래 가사처럼, “이것이 인생이지, 남은 조각이 아니야.”


이것이 쉰다섯의 얼굴이야. 성형도, 지름길도 없었어. 오직 사랑의 힘으로 깊은 슬픔을 이겨내고 다시 나 자신에게 돌아가려는 용기로


산산이 흩어졌던 영혼을 하나하나 꿰매며 삶을 살아내는 얼굴이다.A

20240913_113127 (1).jpg 과거, 현재, 미래를 되돌아보며



포트랜드 또는 시에라마드레 브루잉 컴퍼니에서 우려냈습니다 (Facebook Post).png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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