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이 아직은 서울 사실 때 어느 명절 연휴에 어머님과 나는 같이 시부모님 사시는 동네 교회에 새벽기도를 간 일이 있다. 그전부터 그 교회 목사님 설교가 너무 좋다고 어머님이 내게 전해주셔서 나도 인터넷을 통해 꾸준히 설교말씀을 찾아들었었다. 그날은 명절이라 시집에서 자고 일어난 김에 어머님 따라 그 교회 새벽기도를 간 것이다.
새벽기도에서 설교 말씀이 끝나고 이제 개인기도 시간이어서 어머님과 내가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웬 아주머니 한분이 와서 어머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며느리 그만 고문하고 이제 그만 갑시다.”
아...... 오지랖이 삼만 평이다. 아줌마나 괜히 이른 아침부터 집에 가셔서 부산 떨며 며느리(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깨우지 마시고 기도 좀 오래 하시다가 천천히 가실 일이지. 어머님도 며느리를 새벽기도에 끌고 가실 분이 아니고 나도 끌려 갈 사람이 아닌데 그 아주머니 눈에는 명절 연휴에 내가 새벽기도에 ’끌려와‘서 ’고문‘당하는 걸로 보이셨나보다.
시어머님과 나는 소위 신앙적인 ‘코드’가 잘 맞는다.
어머님도 나도, 사람은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옆에 배우자가 아닌 ‘주님’을 찾는다. 남편 붙잡고 친정 식구들 붙잡고 울고불고할 일 있으면 예배당한구석에서 울며 기도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았다.
이제와 돌아보면 우리의 신앙도 세월을 따라 달라졌다. 우리도 한때 물질과 성공을 구하는 기도를 했었다.
그 시절 우린 서로의 남편, 시아버님과 내 남편의 일이 잘되길 기도했다. 그 당시 베트남에서 아버님이 일거리를 소개받기로 해서 가셨을 때, 남편이 방송국에서 프로그램 연출을 하고 있을 때 우리는 희망을 품고 구하고 또 구했다. 이 가장들에게 물질의 복을 더하시기를 구하며 양심상 신앙심도 깊어지기를 기도했었다.
하나님은 후자를 들어주셨고 전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버님은 일거리를 맡지 못하셨고 내 남편은 돈 잘 버는 PD가 되지 못했다.
대신 아버님은 어머님과 함께 새벽기도를 다니게 되셨고 결혼해서 십 년 가까이 이 교회 저 교회 방황하던 우리 부부는 “나는 새 신자가 아니라”며 새 신자 교육 못 받겠다던 남편이 회심하여 지금 다니는 교회에 등록을 하였다.
그렇게 남편들의 성공을 바랐고 혹시나 하는 기대로 우리 부부가 자녀 갖기를 기도했으나 몇 년이 흘러 남편들은 성공과 거리가 먼 삶을 이어갔고 나는 아이는커녕 ‘암’을 얻었다.
어머님과 내가 처음 만나 그 후로 몇 년간 야무지게 꿈꿔왔던 우리의 “쨍하고 해 뜰 날”은 영영 오지 않았지만 우리 두 사람은 ‘열매‘를 얻는 대신 ‘감사’를 배웠다.
경계성 종양 수술을 하고 치료받는 과정에서 나는 사니 죽니 하며 울지 않았다.
코로나 시국에 수술을 받으면서도 은행을 퇴사하고 수술받아 병가를 내고 복직하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해 주셔서 감사했고 양가에 은행을 퇴직한 것에 대해 눈치를 덜 볼 구실이 생긴 것에 감사했다. 살고 죽는 것은 주님 손에 맡겼다.
어머님은 두 해 전인가 불현듯 “나 이제 그냥 감사만 하기로 했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어머님은 서서히 하나씩 손주 볼 기대와 희망, 딸의 결혼, 남편의 돈벌이, 아들의 성공을 내려놓으셨다. 대신 주신 것에 대한 감사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기 시작하셨다.
어머님과 나는 매일 아침 시외삼촌이 단톡방에 올려주시는 말씀 한 구절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아멘”으로 화답한다. 그렇게 오늘도 서로의 안녕을 확인한다.
우리가 대단하고 거룩한 사람이어서도 아니고 거창한 신앙 고백이 있어서도 아니다. 나는 이 또한 ‘은혜’ 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