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번외의 이야기 같지만. 요즘 며느리들에게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이 통하지 않는 이유를 예를 들어 조금 설명해 보기 위해 내 할머니들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우리 친할머니는 시골의 찢어지게 가난한 집 장녀였다. 족보만 남은 양반에 붙여 먹을 땅도 없는 신세여서 그야말로 논에서 일하는 열댓 살 먹은 계집아이를 우리 친가에서 데려다 혼례를 치른 케이스다.
동생들이 줄줄이 있는데 집에 먹을 건 없고 학교라고는 문 앞에도 못 가본 이 할머니는 서울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온 과분한 신랑에 동네 유일의 대궐 같은 기와집 안주인이 되었어도 손이 갈퀴같이 굽을 만큼 일을 하면서 늘 허리를 숙이고 눈치를 보셨다.
친정에서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는데 무려 고방에 곡식이 그득하고 눈앞에 펼쳐진 논밭이 다 시집 소유였으며 동네 사람들이 그 집 소작을 쳤고 곡식을 얻으러 왔다. 시집살이를 하면서 소처럼 꿍꿍 일하고 자식을 낳으니 굶고 있는 동생들에게 얼마쯤 양식도 보내 줄 수 있었다. 아들을 낳으니 시집에서 위치도 생겼고 생계 걱정 없이 살 수 있었지만 큰 소리 한번 낼 수 없는 처지 인건 변하지 않았다.
할머니에게 시집은 입혀 주고 먹여 주고 재워주고 사람 구실 할 수 있게 해주는 곳이었다. 잘난 남편과 든든한 시댁이 있기에 번듯하게 아무개 집 며느리라고 행세할 수 있었고 고방 열쇠를 틀어쥔 시어머니는 먼저 시집온 그야말로 직장 상사였다. 훗날 승진(?)하셔서 이 고방 열쇠를 갖게 된 후에도 할머니는 어쩐지 기를 펴지 못하셨다.
금이야 옥이야 키운 둘째 아들은 서울에서 대학을 나와 역시 대학 나온 교사 며느리를 데려오면서 무려 캐럿 다이아 반지를 해줬다. 사돈집은 원래가 서울 사람들이고 큰 부자였다고 했다. 할머니의 며느리는 할머니의 후임(?)으로 들어온 게 아니었다. 그렇게 할머니는 시집살이를 대물림하지 못했다..... 적어도 작은 며느리.... 우리 엄마에게는.....
나의 외할머니는 김포 땅부잣집 딸이다. 일제강점기에 여중을 나왔고 간호사를 꿈꿨으나 정신대에 끌려갈 것을 걱정한 집안 어른들은 외할머니를 서울에 사대문 안에 집을 몇 채씩 가지고 있다는 부잣집 장남에게 시집보냈다.
신랑감은 동경제대를 졸업했다고 했다. 유학까지 다녀온 신랑과 사대문 안에 있는 집문서 여럿을 늘어놓고 살집을 골라보라는 시집에 외할머니는 기죽지 않았다. 그 시절 여자가 중학교까지 배운 것도 흔치 않은 일이었고 친정도 행세하는 집이었다. 꿇고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두루마기 일곱 벌을 받고 광화문에 신혼집을 받은 외할머니의 결혼잔치는 몇 날 며칠을 궁에서 일하는 숙수를 불러다 치렀다고 했다.
친정에서 잘 배웠던 탓에 외할머니는 온 집안을 호령하며 거 궁한 살림을 관장했다. 침모, 찬모, 식모가 따로 있었지만 외할머니는 음식도 살림도 못하는 게 없으셨다.(후에 외할머니는 나에게 사람을 쓰더라도 네가 살림을 할 줄 모르면 돈 주고 부리는 사람에서 무시당한다고 하셨다.)
외할아버지가 사업이 기울어 화병으로 돌아가신 후에도 외할머니는 이층 집을 처분해 장사를 하셨고 사 남매 중 공부에 뜻이 없는 막내만 빼고 모두 대학공부를 시켰다. 나이 마흔에 과부가 되었지만 나는 외할머니가 단 한순간도 위축되는 걸 본 적이 없다.
이 전 세대의 여자들이 착하고 순종적이고 효심이 남달라서 그렇게 살았던 것이 아니다. 그녀들의 삶에는 나름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이전의 가부장제 하의 가족 관계 속의 시집살이가 어쩌면 더 납득하기 쉽다. 오는 게 있으니 가는 게 있고 참아야 하니 참는 수밖에 없었으며 버틸 이유가 있어서 버틴 것이다. 결혼 생활이던 자식이던 생계던.
‘도리’나 ‘정’에 기대어 누군가에게 희생과 노력을 ’요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이 무슨일을 할때는 다 이유가 있다.
내 친할머니가 허리가 휘게 일을 하며 시집살이를 했던건 ‘며느리 도리’ 따위의 한가한 이유가 아니었다. 그건 ‘생존’의 문제 였다.
그리고 외할머니를 통해 알게된 사실. 옛날에도 며느리라고 다 시집에서 종노릇한건 아니다. 정말 집안이 어쩌고 하는 집에서는 종부리고 살았다. 요즘은 사람 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