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is coming

by neveres

결혼하고 첫 몇 해는 명절에 돌아가신 시조부모님 대신 시고모님 댁을 찾아가 연휴 전날 밤에 하루 자고 시댁으로 갔다가 시외가 누군가를 만난 후 친정에 들르는 코스였다.


남편의 큰고모와 둘째 고모 내외가 바로 이웃해서 살고 계신데 나는 어쩐지 이 두 분이 처음부터 편하고 참 좋았다. 시고모님 댁에 가면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서 산적 몇 개 뒤집은 게 다여도 칭찬을 받았고 점심에는 내가 좋아하는 콩비지를 넣은 국을 맛있게 끓여주셔서 첫해부터 다음 명절에도 또 와야지 했었다. 그때는 은행을 다닐 때라 고모님들 드리려고 신권도 꼭 챙겼다. 은행을 20년 가까이 다니면서 달력이니 신권이니 딱히 챙긴 적이 없는데 시고모님들께만은 꼭 천 원짜리 오천 원짜리로 두 분 각각 약소하게 십만 원씩 신권을 챙겨다 드렸다. 어르신들은 평일에도 수요예배, 금요철야, 새벽기도, 구역예배 등 다니실 일이 많다. 그런데 그때마다 만 원짜리 헌금은 부담이실 테니 그때 쓰시라고 내 딴에는 신경을 썼다. 나중에 남편의 사촌 누나가 “명절에 신권을 누가 챙겨주나 했는데”하면서 반갑게 아는 척을 해준 생각이 난다.


나에게는 어릴 적 방학 때 시골에서 놀았던 기억 같은 건 별로 없지만 고모님들 댁에 가면 어쩐지 방학에 시골 할머니(나에게 이 시골할머니는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지만 말을 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댁에 놀러 온 기분이 들었다. 마당에 잘생긴 진돗개 진돌이도(요놈은 이제 없다.) 있고 커다란 닭장에 생김새가 특이한 여러 종류의 닭들(청계, 오골계 외에 연노랑 솜털옷을 입은 것처럼 생긴 닭, 위풍당당한 수탉 등)도 있었다. 동네 어귀에는 밤나무도 있어서 밤 줍는 것도 재미있었고 아버님은 산밤도 한 보따리 주워서 챙겨주시곤 했다.


명절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나가보니 이미 고모님들과 어머님이 전거리를 펴놓고 계셨고 나도 슬쩍 끼어 앉아서 좀 거들려는 참에 내 등쌀에 일찍 일어난 남편이 마당을 서성거리자 “색시 일 시키나 보러 어슬렁거린다”고 “쟤가 이 새벽에 다 일어났다고 지 색시 고생할까 봐 저러냐”며 귀여워서(?) 어쩔 줄을 모르시고 호탕하게들 웃으셨다. 정작 고모들은 나에게 설거지도 잘 못하게 하셨다. 요즘은 명절에 시고모님들을 잘 찾아뵙지 못한다. 건강하실 때 몇 번은 더 가서 뵙고 싶다.


어머님이 친정어머니 요양병원과 친정 동생 교회가 있는 경기도로 이사를 하신 후에는 시집 근처에 있는 시외삼촌 교회 주방에서 같이 명절 음식을 했었다. 딱히 차례를 지내는 집도 아니고 큰집이라고 친척이 인사를 오는 것도 아니니 바로 이웃에 사는 시외가 식구들이랑 명절을 보내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지금 생각해 보면 차례를 지내는 것도 아니고 아버님이 장남이셔도 친가에서 작은집이 인사를 오는 것도 아니어서 딱히 우리 시집은 명절에 내가 나서서 차릴 상이 애초에 없는 건데 나 포함 5인 가족이 명절이니 얼굴이나 보자고 모여서 밥 한 끼 먹으면 그만인걸 10년이 지나서야 이걸 깨닫다니. 시집에서 나한테 어쩐다 저쩐다 할 일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도 문제가 있는 거다. 남편이 내게 일깨워주는 것들이 가끔 있는데 “안하면된다.”이다.


어쩔 때는 시이모, 혹은 시골에서 올라오신 시외삼촌 한 분쯤이 더 추가된 시외가 명절 상차림에 내가 한나절을 이것저것 거들고 전을 부쳤다. 그리고 시외가 가족들 명절 상에 앉아서 밥을 먹고 치우는 일에 또 내 손을 보탰다. 아버님은 식사 때 잠시 계시거나 혼자 집에 계시면 우리가 음식을 챙겨다 드렸다. 내가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하고 판을 깬 건 이 시외삼촌 댁 아들이 장가를 가고 나서였다.



시외사촌동생의 아내(호칭도 잘 모르겠고 쓰고 보니 이건 남인데)가 생겨서 이제 내가 가서 전부칠일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명절 당일에 오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거기 더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어머님은 뭔가 민망해하시면서 내가 남편의 외삼촌의 아들의 배우자가 명절 당일에 시집에 오는지 여부를 궁금해할 리가 없는데 굳이 그렇게 변명처럼 이야기를 하셨다. “사역”때문이라고.


어머님의 조카 부부는 목회자 커플인데 이 들이 그렇게 매번 명절 당일에(요일이 매번 달랐을텐데) “사역”을 하느라 못 온다는 거였다. 그냥 “네. 참 감사한 일이네요.”라고 했지만 나는 이 말씀은 믿지 않았다. 굳이 나한테 변명을 하실 이유도 없고 이렇게 된 바에야 그 집 며느리도 안 오는 명절에 내가 그 집 주방에서 전 부치고 있는 건 뭔가 ‘볼드모트’처럼 아무도 그 집 아들 내외 이야기를 못하거나 혹은 착한 사람들이기는 하니 그 집 며느리는 안 하는 명절 음식 준비를 하는 내게 그 내외의 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변명처럼 계속하실 테니 서로 못할 짓이다. 그 무렵 어머님 허리도 안 좋아지셨다고 하시기도 해서 나는 이제 명절에 음식은 내가 내 집에서 만들어 가겠다고 당일 점심에 음식 해 들고 찾아뵙겠다고 했다. 그리고 시집에서 내가 해간 음식과 어머님이 준비하신 음식으로 명절 상을 차려서 아버님을 모시고 식사를 했다. 아버님은 내가 해간 음식 하나하나 꼭 칭찬을 해주셨고 편하게 많이 드셨다.


어머님에게 이 조카 부부가 얼마 특별한지 잘 알고 있다. 아들이 이루어 주지 않은 목회자의 꿈을 이루어준 장한 조카. 목사가 되어 목사 와이프까지 뒀고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카부부에게 아기가 생겨 이 아이와 어머님은 영상통화를 한다. 요즘은 아기도 극한 직업이다. 양가 조부모에 이제 아빠 고모와도 영통을 해야 하다니. 어머님은 명절 지나서 조카 부부가 꼭 들른다고 하시면서 어느 해인가는 김을 가져왔다고 그렇게 기특하다고 하셨다. 앞으로 명절에 김을 드려야 하나 못된 생각도 들었다.



어머님이 친정 식구들에게 각별한 것이 좀 지나쳐 보일 때도 있지만 덕분에 아들 내외에게 신경이 많이 미치지 않으시니 각자 독립적이라는 점에서는 좋은 일이다.



명절에 음식상을 내가 차리게 되니 이게 내 성미에 맞다는 걸 알았다. 어차피 옛날 명절 상에 비하면 그냥 밥 한 끼 차리는 정도다. 올 명절에는 고정 메뉴(소갈비, 전) 외에 추가 메인을 어떤 메뉴로 하나, 아니면 연휴가 기니 드라이브 겸 근교에 나가 외식을 하나 이런 고민도 한가롭기만 하다.


모두가 가능한 일이 아닌 줄은 안다. 하지만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면 주도권을 가져와 보는 것은 어떨까? 내 시간과 돈과 감정을 들여야 하는 일이라면 내 의사가 들어가야 한다. 추석 명절 지나고 시집과 남편에게 이를 갈아봤자 몇 달 후 설 명절에 또 반복이다.


바야흐로 추석 is coming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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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어머님이 미국에서 교사를 하는 친정 조카가 직장에서 무슨 좋은 일이 있었다고 또 집도 넓고 좋은 곳에 살게 되었다고 너무 좋아하시면서 말씀을 하셨다. 그즈음 엄마랑 밖에서 밥을 먹다가 무심코 “엄마 ㅇㅇ (우리 둘째 외삼촌 아들)이 장가갈 때 외삼촌이 아파트도 해주고 학원도 차려줘서 잘 사니 좋으냐”고 물어봤다. 엄마가 ‘뭔 소리야’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내가 무슨 상관이야. 내 자식이 잘 살아야지. 이거나 더 먹어”라면서 본인 몫의 초밥을 집어 줬다. 양쪽 두 엄마가 중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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