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이야기가 나왔을 때 아빠는 두 가지 질문을 했다. “집은? 차는?” 정말 현실적인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있는 그대로 남자친구가 집 해올 형편이 안 된다 차는 없다고 말했고 아빠는 “음...” 하면서 더 이상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집은 근무하던 은행에 은행 명의로 집을 전세 계약해서 직원에게 거주하게 해주는 복지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그걸 이용하기로 했었다. 이걸 임대차라고 불렀는데 정말 양가가 가난을 인증해야 사용할 수 있는 제도여서 직원들이 많이 사용하는 제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그 당시 일억오천만 원가량의 아파트 전세를 거저 살게 해 준다는데 부끄러움은 내 알바 아니었다.
아빠는 어느 날 남자친구를 아빠가 일하는 곳으로 불러서 한 켠에 새워두었던 유물 같은 우리 집 자가용을 가져가라고 했다. 나에게는 “마트 갈 때 타라.”고 했다. 시골 친할머니 돌아가신 날 경미한 접촉사고가 난 이후로 아빠는 운전대를 거의 잡지 않았고 원래도 운전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터라 그 차는 서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알다시피 차는 좀 굴려줘야 고물이 되지 않는 법이다. 그 녀석은 낙엽이 차체 안까지 쌓이고 어디 한 군데 성한 곳 없는 고물이었다. 준중형급 새하얀 1999년형 ‘라노스’ 차량, 내가 일종 보통 면허를 땄던 것도 왜 때문인지 수동이었던 이 차를 나중에 내게 끌고 다니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녀석은 꼴에 수동이기까지 했다.
엄마랑 백화점만 가도 가는 길부터 매장을 돌면서 다시 돌아오는 길까지 싸우는 게 일인 아빠는 딸은 시집가서 남편이랑 다정하게 마트 데이트를 하는 것이 로망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아빠는 마트 갈 때 쓰라고 그 고물 차를 무려 사위에게 주고 말았다. 엄마는 기함을 했고 새 차를 뽑아주지는 못할망정 이게 무슨 망신이냐고 사돈댁에서 뭐라고 생각하겠냐며 항의했지만 아빠의 뜻을 꺾지 못했다. 새 차를 사줄 돈은 없고(지금 생각해도 그건 오바다.) 그래도 애들이 차는 있어야지 요즘 세상에...... 그런 아빠의 강권에 못 이겨..... 그 당시 수동 운전이 서툴렀던 남편은 그 차를 받아오게 된다.
우리는 녀석에게 “꼬물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아마도 나이도 들고 엔진도 시원치 않아 잘 나가지도 않고 이미 고물이라 “꼬물꼬물”간다는 의미까지 담아 이름을 그렇게 지었던 것 같다. “꼬물이”는 겉만 새하얗고(아빠는 겉만 닦았다) 속은 성한대가 없어서 받자마자 돈 백만 원이 우습게 수리비로 나갔다. 그 후로도 녀석은 남편에게 생각지 못한 돈이 생길 때마다 넙죽넙죽 그 돈을 잡아먹었다. 정말 공돈이나 가욋돈이 생기면 어떻게 알고 차에 말썽이 나서 그 돈들은 써보지도 못하고 “꼬물이” 뱃속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그렇게 남편에게 “꼬물이”는 애증의 존재가 되었다.
“꼬물이”를 처음 본 시어머님과 시누이의 표정을 보고 난 엄마의 걱정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신했다. 차마 고맙다고 할 수 없는 그 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는..... 저거 타도 되는 거야? 뭐 이런 생각이 드셨겠지. 새 차를 뽑아주는 건 이 결혼 준비에 도움이 되는 처사는 아니었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꼬물이”를 넘긴 것도 뭘 해준 것도 안 해준 것도 아닌 이상한 상황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래도..... “꼬물이”는 신혼 때 우리와 함께 여러 곳을 갔고 아빠의 바람대로 마트에서 장 볼 때 유용하게 쓰였으며 남편의 유일한 취미였던 사회인 야구를 가능케 해 주었다. 시집 식구들도 한 번쯤은 “꼬물이”를 타서 이게 굴러가는구나를 알게 되셨고 어머님은 녀석에게 신랑의 외사촌 여동생을 라이딩하는 임무를 주시기도 했다. 그렇게 “꼬물이”는 우리의 패밀리 카가 되었다.
첫 신혼집을 이사할 무렵이었나 “꼬물이”를 더 고쳐 쓰는 것이 비용적으로 부담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인지 그제쯤은 새 차를 살 수도 있어서였는지 우리는 “꼬물이”를 떠나보냈다. 제 몫을 다해 주었던 우리 차 “꼬물이”.
남편과 나는 가끔 그냥 몇 년을 더 탈걸 그랬다며 녀석을 추억한다.
고생 많았어. 꼬물아.... 신세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