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서두에 나의 남편에게 양해를 구해 두어야겠다. 내가 아는 가장 가까운 모태신앙인 그가 이 글에 언급된다. 하지만 그에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많은 모태신앙 교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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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회 목사님 중에 믿지 않는 아버님에게 맞으면서 교회를 다녔다는 분이 계신다. 때때로 목사님이 그 시절 이야기를 하시면서 목이 메어하시곤 하는데 그 설교를 듣는 나의 곁에 모태신앙, 믿음의 삼대, 기독교 집안의 아드님, 나의 남편은 숙면 중이다.
일이 많아서 늘 늦도록 야근을 해서 피로가 누적된(남편 입장도 밝혀두는 걸로) 까닭도 있겠으나 어쩐 일인지 나의 남편은 목사님이 입만 열면 ‘내게 강 같은 평화’가 찾아와 눈이 스르륵 감기고 가끔 코도 골며 잠이 든다. 이럴 때는 세게 찌르면 ‘컥’하고 일어날까 봐 까닭 없이 다정하게 손을 살포시 잡아준다.
목사님은 이제 막 설교를 시작하려고 하는 참인데 그에게 평강이 순식간에 임한다. 모태신앙인 그에게는 ‘숙면’의 은사가 있다.
지금 등록하고 다니는 교회에 등록하기 전 로비에서 새 신자 등록 안내를 받았을 때 남편은 자신은 새 신자가 아니어서 새 신자 교육을 안 받아도 된다고 우겼다.
그는 이전 여러 교회에서 엄마 찬스, 장인 장모님 찬스로 새 신자 과정은 패스하고 바로 쌍수 들어 환영받아온 까닭도 있겠고 이미 모태로부터 자신은 믿음이 장착되어 있으니 검증은 필요 없다는 의식이 강하였다.
이런 그의 고집을 꺾어 새 신자 교육, 일대일 양육을 거쳐 지금 교회에 등록하게 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할 따름이다. 할렐루야!
남편은 따로 성경을 읽는 경우가 드물다. 이미 어릴 때부터 그에게 성경 말씀은 생활 속에 가정 안에서 넘쳐났고 어릴 때 간혹 교회에서 성경을 읽히기도 했을 테니 이미 다 아는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제는 기억 속에 희미하고 부분 부분 알 뿐이지만 그에게 성경은 좋게 말하면 익숙하고 나쁘게 말하면 지겨운 것이다.
말씀에 대한 묵상은 없고 시간이 지나 나이를 먹고 머리만 커져서 비판 의식만 생겼다. 강대상 위에 목사님보다 자신이 성경은 더 많이 안다(들었다, 혹은 접했다)는 생각에 설교시간에 어찌 잠들지 않은 날은 신나게 지적을 한다. 말씀을 통해 은혜받지 못하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어쩌면 그는 이미 은혜를 받았고 믿음도 있으니 더할 것 이 없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모태로부터 자신은 신자이고 할머니가 엄마가 그렇게 기도로 양육하였으니 기도는 차고 넘친다. 뱃속에서부터 자신은 이미 알고 믿지 않는가. ‘내추럴 본 크리스천’이다.
나는 이미 기독교인으로 나고 자랐으니 이걸로 충분하고 읽지 않아도 알고 기도하지 않아도 이미 기도가 선대로 쌓여 있으며 신앙의 유산이 든든 하여 마음만은 부자다. 그러니 설교는 목사가 입만 열어도 마음이 평안해져 잠이 솔솔 오는 것이다. 나는 안 들어도 다 아는 얘기니까. 예배당 의자가 주님 품 안같이 포근하다.
코로나 때 남편은 유튜브 예배를 틀어놓고 침대에 모로 누워 얌전히 예배를 구경했었다. 그는 전도사님 아들인데 어쩐지 그렇게 와불 같은 자세로 예배를 시청했다.
예배는 드리는 거지 보는 게 아니라고 그렇게 말을 해도 아랑곳하지 않던 그를 일으켜 현장예배로 인도한 것은 배우자의 발병이었다. 코로나 때 나는 경계성 종양 수술을 했다. 초기 암, 경계성 종양 중기라고 했다. 두 번의 수술을 받았고 현장예배가 가능해진 후에도 한참은 교회에 갈 수 없었다. 이제 자신이 누워서 예배를 시청하던 침대에는 나를 눕혀 놓고 남편은 부지런히 현장예배를 나갔다.
시어머님께 이 병으로 내가 죽지도 않았고 남편이 벌떡 일어나 예배의 자리에 나갔으니 ‘할렐루야’라고 했다.
나는 감사하게도 전이가 되지 않아 4년 차를 무사히 보내고 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다.
모태신앙이라는 감사한 조건이 남편에게 신앙의 성장을 막는 한계가 되어 온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모태신앙이야. 믿음의 삼대야. 우리 집은 기독교 집안이야.”
이걸로 족하다고 학습되어 온 것은 아닐까.
교회에서 양육과정을 이수하면서 조별 나눔을 하는데 한 성도분이 자신이 모태신앙이고 무려 구한말에 외증조할머니가 크리스천이셨다는 말씀을 하셨다. 외증조할머니라니..... 주여......
그 시절에 벌써 기독교를 받아들인 그 외증조할머니의 신앙이 너무 감격적이어서 하신 말씀인 건 알겠으나 자랑으로 들리지 않을 도리는 없었다. 그 뿌듯함이 숨길 수 없이 새어 나왔다. 시집에서 ‘믿음의 삼대’는 질리게 들어왔는데 급기야 ‘믿음의 사대’를 듣게 되다니.
물론 그 성도님은 예배시간에 졸지도 않으실 테고 양육과정을 열심히 이수중이셨지만.
언제부터인가 기독교인들에게 또 다른 ‘족보’가 생겼다. ‘믿음의 n대’ ‘기독교 집안’
이걸 무조건 의미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가 통독하다 스킵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성경의 ‘신앙의 족보’에는 의미가 있다. 단순히 이름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그 족보를 통해 주님의 약속, 역사가 이루어졌음을 알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이방의 여인들의 이름도 들어있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데 ‘이방’과 ‘여성’도 속하게 하심도 알게 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목에 힘을 주고 자랑삼아 말하는 ‘모태신앙’ ‘믿음의 삼대’ ‘기독교 집안’이라는 말이 만들어낸 ‘족보’ 속에 본인의 믿음과 신앙에 대한 열심,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교제는 빠져있는지도 모른다.
그 집안 ‘신앙의 족보’ 속에 과연 내가 있는가? 하나님은 할머니와 어머니의 기도로 나를 소개받으셨지만 나와는 초면이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