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본적으로 ‘착함’을 미덕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아니다.
더욱이 공인이나 유명인이 남들의 시선 때문에 모든 순간 연기(?)를 하며 살아야 한다거나 보여지는 이미지가 모두 진짜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걸 기대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타의 모범이 될 필요는 없다 해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진상’ 일 경우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더 인상에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내가 은행 생활을 하면서 비교적 손님들과 코드가 잘 맞고 지역도 편안했던 지점은 드라마에서 전화를 받으며 “ㅇㅇ 동입니다.”하는 장면이 종종 나오는 그 ㅇㅇ동들 중에 한 동네에 있던 지점이었다.
이 지점에는 보면 알만 하신 분들을 종종 만날 수 있었지만 티 나게 갑질을 하거나 콧대가 높고 거만한 고객은 거의 없었다. 소위 있는 척, 가진 척, 잘난 척하는 류의 부자들이나 유명인들이 드문 동네였다. 대부분의 고객들은 수수하고 털털했으며 소박하고 겸손하고 교양 있었다.
한 번은 노년의 유명 여배우 분이 환전을 하러 오셨는데 후선에 있던 여자 책임자가 호들갑스럽게 뛰어(?) 나와서 “어머~~~~~~~~~~너무 영광이에요~~~”를 남발하며 하이톤으로 아부성 발언을 해대자 그 여배우분이 “영광이실 것까지는 없고..... 환율만 좀 잘해주시면 됩니다....”하고 조용히 그 호들갑을 사양하셨다. 그 겸손과 쿨함이 무척 마음에 들어 내가 해드릴 수 있는 한 최대로 환율 우대를 해드린 기억이 난다.
정작 그 책임자는 겉으로는 그랬지만 실제로 환율 우대를 해줄 마음은 없었다.
나는 이 여배우분의 드라마, 영화, 예능 대부분의 작품을 보았고 아직도 종종 과거 작품들을 다시 보곤 한다. 그러나 ‘영광’이라는 말을 내놓기보다는 그저 조용히 엔화를 저렴하게 드리는 걸로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아부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내가 사람을 잘 본 것 같다.
그리고 중견기업 회장님 사모님 중에 늘 직접 공과금을 납부하러 오시고 생활비 전반을 장부처럼 꼭 정리해서 관리하시는 분이 계셨다. 이렇게 본인도 체크하시고 은행원도 체크하면서 일을 보면 서로 실수를 줄일 수 있고 더 체계적으로 업무가 진행된다. 사모님과 나는 제법 호흡이 잘 맞았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편해져서 내 창구를 주로 이용하시면서 사모님이 수필집을 내셨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지점에도 가져다주신 것이 있었지만 내가 직접 사모님의 수필집을 구입해서 읽었다.
젊은 시절 회장님과 신혼을 보내시면서 있던 에피소드들이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아서 정다운 마음이 들었다. 신혼 때는 맞벌이로 사모님은 교사셨는데 출장이 잦으셨던 회장님이 잠든 새색시를 두고 또 일하러 가시면서 메모를 적어놓으셨다는 대목에서 촬영에 편집에 신혼 내내 나를 ‘나 혼자 산다’를 찍게 했던(요즘도 평일에는 나 혼자 산다.) 방송국 놈(PD)인 남편이 포스트잍에 메모를 적어 거울에 붙여놓았던 것이 생각나 새삼 모아 놓은 메모들을 찾아보고 어쩐지 사모님과 회장님 젊은 시절이 우리 신혼과 겹쳐져 더 친해졌던 것 같다.
한 번은 주차가 서툴러 건물 주차 관리인 할아버지에게 한 소리 듣고 글썽이며 지점에 들어선 나와 동갑인 사업하는 여자분이 창구에 와서 내가 위로 겸 이런저런 이야기로 마음을 풀어주고 재미있는 이야기 몇 마디로 웃게 해주는 걸로 인연이 됐었다.
얼마 후 그 고객이 늦은 결혼을 해서 일본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오면서 고양이 그림이 그려진 패브릭을 선물로 사다 주었다. “고양이 캐릭터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이걸로 골랐어요. 우리 둘 다 결혼 생활이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부부 고양이 그림으로...”라며 수줍게 웃으며 내민 그 선물을 나는 아직 잘 간직하고 책장에 잘 걸어놓고 있다. 너무 고마웠고 정말 잊을 수 없는 고객이다. 나 역시 그녀의 결혼 생활이 영원토록 행복하기를 그 그림을 볼 때마다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그렇게 그 동네에서 많은 고객과 친근하게 지냈고 서로에게 공감과 위로가 되어주며 좋은 기억을 많이 간직해오고 있다.
자, 이제 훈훈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접어두고 오늘의 주인공들의 등장이다.
여느 때처럼 평안하고 조용하던 어느 날 오후 전화 통화 한 번에 나의 마음의 평화가 산산조각이 났다.
20대 중후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분이 대리인 거래를 하러 왔는데 통장을 보니 계좌주가 이름을 보자마자 딱 알아볼 수 있었던 A전장관이었다. 대리인으로 온 여자분은 은행 등의 외부 업무나 간단한 사무를 처리해 주는 직원인 것 같았다.
이 A전장관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저서나 관직에서의 활동으로 꽤 유명 인사이고 소천하신 우리 교회 원로 목사님과도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원래 기독교인이 아니었으나 말년에 기독교인이 되어 영성에 관련된 저서도 여러 권 낸 사람이다.
그건 그렇고,
평소에 관심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사회 저명인사이니 이름을 보자마자 모를 도리가 없었는데 문제는 업무처리를 하는 도중에 일어났다.
대리인인 여직원이 통장 비밀번호를 틀리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한 번은 그저 잘못 눌렀나 보다 하고 말았는데 두 번째 시도에도 맞지 않자 그 여직원도 나도 당황하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정말 심부름 온 게 맞는 것 같은데 비밀 번호를 가르쳐 준걸 잘못 외웠거나 메모를 틀리게 해서 온 건가 싶어서 가르쳐 준 대로 누른 게 맞느냐고 물었더니....
맞단다.
이거 참 큰일이다.
세 번 틀리면 예금주가 대통령이라도 신분증 들고 본인이 내점해야 한다.(제신고 절차나 규정은 은행마다 조금씩 다르니 대리인으로 처리 가능한 매우 복잡한 절차는 존재할 수 있다.)
전화해서 다시 여쭤보시라, 한 번 더 틀리면 신분증 가지고 본인이 직접 오셔야 한다고 하니 이 직원이 사색이 되었다. 뭐 잘못하면 곤란해질 수도 있는 일이나 저렇게 사색이 돼서 떨 일인가 싶던 차에 죽지 못해 전화를 건 직원이 사정 이야기를 하는데 상대방 반응이 영 안 좋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전화를 내게 바꿔준다. 왜... 왜 나를..... 그냥 비밀번호를 다시 물어보라니까.
나도 마지못해 전화를 건네받았는데,
내가 이 사람을 잘은 몰라도 나도 대한민국 사람이니 오다가다 TV나 언론에 등장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걸 듣고 본 적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그 사람 맞나 싶게 전화기 속에서 상상도 못 할 폭언이 쏟아져 나왔다. 와~~~~~~~~~~~~~
뭐 어려운 걸 물어봤나. 통장 비밀번호가 뭐냐고!? 나 말고 당신 직원한테 알려주라는데 곧 죽어도 먼저 가르쳐 준 번호가 “맞다고!” (안 맞아. 이 양반아!) 소리소리를 지르고 상욕을 해댄다.
지금 이 순간,
원래 가르쳐준 비밀번호가 맞기를 가장 바라는 건 내 눈앞에 그 직원이고 그다음은 나 일 텐데 잘못 가르쳐준 사람이 도리어 우리한테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퍼붓고 있다니. 그래도 내가 듣는 게 낫지 그 여직원은 무려 돌아가서 이 사람을 면대해서 또 욕을 먹을 텐데.... 싶어 전화를 돌려주지 않고 고대~로 욕받이를 자처했다.
그래..... 니가 소리를 지르면 어쩔 것이며, 욕을 하면 나를 어쩔 테냐..... 나도 비밀번호 안 맞으면 인출해 줄 도리가 없다......
한참을 머리에 지진이 나게 폭풍 같은 욕설과 호통을 듣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의 그 직원을 돌려보냈다. 어쩔 수 없다고 가서 비밀번호 다시 알아오라고..... 그다음에 다시 내 자리에 오지 않아 그 후의 상황은 알지 못한다.
다만,
목사님들이 종종 이 A전장관의 이야기를 설교 중에 예화로 들 때마다 내 마음은 시험 들고 눈꼽만치도 동의가 되지 않으며 은혜는커녕 화가 차오른다. 그가 저술한 그 다수의 기독교 서적이 구역질 날 판이다. 남의 믿음을 판단할 도리는 없으나 대체 이 사람이 믿은 예수는 누구였을까 싶은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다.
그가 일평생 학자였기에 예수를 믿기보다 예수를 공부했던 것인가 싶다.
그리고 정말 그 동네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이질적인 풍경을 본 날이 있었다.
처음 보는 연세가 좀 있으신 남자분이 지점으로 바쁘게 들어오시더니 무통장 입금 전표를 내밀면서 처리해 달라고 하시는데 무언가 쫓기는 것 같이 조급해하시는 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그저 무통장 입금 한 건 해달라는 건데 왜 저렇게 안절부절이신가 하던 찰나에 입금인 주민번호를 치자 신분증을 받아서 고객확인(이 글에 구체적으로 적기는 부적절할 것 같은데 이런 업무상 절차가 있다.) 메시지가 떴다. 고객에게 이건 입금인 본인이 신분증 들고 와야 한다고 하고 그 주민번호의 주인공이 VIP실 고객이니 담당 과장님에게 메신저를 보내서 어떻게 처리할지 문의를 했다.
심부름 오신 걸로 보이는 이 어르신은 사색이 되셨고 마찬가지로 얼굴이 허옇게 질린 VIP실 과장님이 이층에서 뛰어내려왔다.
그리고 바로 그때! 지점 문을 열어저치고 웬 아줌마인지 할머니인지가 쳐들어오듯이 내 창구로 돌진해 왔다. 뭐지? 저 저돌적인 아주머니는?????? 날 잡으러 왔나? 하는 차에 대뜸 이 아줌마가 내 앞에 그 어르신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줌마 : 야! 왜 이렇게 오래 걸려!? 뭐가 이렇게 오래 걸려!?
어르신 :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저기 입금하는데 뭐 해야 할 게 있다고 은행 직원이 그래서.....
이때부터 내 자리 단말기로 전산 조작을 해주던 VIP실 담당 과장이 손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상황을 정리해 보면 이렇다. 문을 박차고 쳐들어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아줌마는 모기업 사모이고 먼저 들어와서 업무처리를 요청한 어르신은 운전기사 분이셨다. 무통장 입금증에 입금자는 그 집 딸인데 본인은 이 자리에 없고 온통 대리인들 뿐인 상황에서 본인 확인 관련 절차가 필요한 상황이 된 것이다. 업무상 절차는 쉽게 여기까지만 이야기하겠다.
기사님이 들어오시고 이 상황까지 3~5분 정도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걸 못 참고 이 사모가 뛰쳐 들어온 것이다. VIP실 과장이 식은땀을 흘리며 떨리는 손으로 단말기를 조작하는 내내 사모는 운전기사 아저씨를 잡도리하고 있었다.
아줌마 : 야! 내가 너 때문에 못살아!(엥? 자기 남편도 아니고 왜 운전기사님 때문에 못살기까지.....) 야 이 개XX야!!!!!!!!!!!!!!(오 마이 갓!) 야 이 XX! XXX아! XXXX XX야!
다시 상황을 정리해 보자. 보통의 경우, 은행은 이럴 때 대리인에게 아주 친절하게 업무처리가 불가함을 안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VIP실 과장이 이토록 벌벌 떨면서 업무 처리를 해주고 있던 건 이 아줌마가 저토록 안하무인에 적반하장으로 무장한 진상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날 이 아줌마는 은행 직원들에게는 폭언을 하지 않았다. 시기적 상황(이걸 밝힐 수 없어 안타깝다.) 때문이었음을 짐작만 할 뿐이다.
이 동네에 사모님 아닌 사람이 어디 있다고 저 난리인지 자기가 누구인지 알만 한 사람은 다 아는 데(그래서 힌트조차 쓸 수가 없다.) 망신도 저런 망신이 어디 있는가? 운전기사 님 때문에 자기가 못 사는 게 아니라 마누라 때문에 저 집 남편이 망신살 뻗쳐 운명할 판이다.
첨언하자면, 결단코, 저 무통장 입금 건은 시급하지도 중요하지 절박하지도 않은 건이었다.
VIP 고객 관리는 나의 책임이 아닌 고로 조용히 뒤로 빠져서 이 촌극을 지켜보았던 나는 은행을 퇴직한 후로도 아주 길이길이 이 사건을 이 아줌마의 정체까지 밝혀 가며 회자하고 있다. 저 진상 여편네는(더한 욕도 아깝다.) 아직 운전기사 아저씨 때문에 속 터져 죽은 것 같지는 않다.
알만하신 분이...... 우리는 종종 이런 말을 쓸데가 있다. 이건 어떤 사회적 지위와 체면에 비례해서 갖춰야 할 인격이나 상식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이 고상한 척은 안 하고 살더라도 굳이 그 천박함을 광고하고 다닐 일은 아니지 싶다.
그리고 은행은 당신 집 안방이 아니고 당신 앞의 그 직원이 종신토록 은행원은 아니다. 내일은 당신과 같은 고객일 수도 있고 심지어 당신 회사 고객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