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방지게 굴지 말라고?

by neveres

어느 시점부터 점점 창구에 오는 고객의 연령이 나보다 낮아지더니 심지어 내 학번과 출생 연도가 같은 고객을 만나는 일이 생기는 시절이 찾아왔었다.


나이를 먹기 시작하는구나.... 싶은 순간이었다.



은행일 보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젊은 고객을 보면 은행 심부름이 어려웠던 내 어린 시절도 생각이 났고 취직해서 첫 월급으로 적금 들러온 고객을 보면 내 자식도 아닌데 그렇게 기특했었다.


한 번은 창구에 오랫동안 쓰지 않던 통장과 체크카드 관련해서 상담을 하러 온 고객이 있었다. 나이는 30대 초반이었는데 은행에서 20대 초반 손님을 타깃으로 만들었던 상품이 서비스가 마음에 들어 유지하고 있었던 고객이었다.


외국계 투자회사에 다녔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직업과 나이에 비해 상당히 귀여운 디자인의 통장과 체크카드를 들고 와서 이것저것 천진하게 묻는 모습이 친근하고 88년 호돌이, 내 외사촌동생과 동갑인지라 한참 나이 차이 나는 동생 같아서 질문에 더 세세하게 적극적으로 응대를 했던 것 같다.


이 아동틱(?)한 통장과 체크카드를 바꾸느냐 마느냐의 기로에서 역시 포기 못할 몇 가지 서비스로 인해 유지를 택하고 나가던 고객이 무슨 말 끝에 내 나이를 물어서 대답을 해주었다. 그 고객은 내게 엄지 척을 해주며 “동안이시네요!”를 외쳐주었다. 창구에서 한참들 재미있는 고객이라고 웃었던 생각이 난다.


이 고객은 이 후로도 우리 지점에 와서 은행 업무를 보고 이용 가능한 서비스를 챙기고 가끔 우리를 웃게 해 주었다. 후에 내가 같은 동네에 있는 통합된(내가 근무하던 은행은 흡수합병 되었다.) 은행 지점으로 합병 1호 교차 발령 대상 중 한 명이 되어 이동했을 때(이건 적진에 투입되는 느낌이었달까) 그 지점으로 찾아왔었다. 영국 출장을 다녀와서 은행에 업무 보러 갔더니 안 계셔서 물어보니까 발령 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힘내라고 응원해 주고 간 기억이 난다.


또 다른 30대 초반의 스튜어디스 고객이 있었는데 월급의 정말 대부분을 저축해서 은행원인 내가 다 나의 소비와 낭비를 반성하게 만들었었다. 비행을 다녀오거나 가는 길에 작은 캐리어를 끌고 은행에 와서 그렇게 부지런히 적금 상담을 받아서 알뜰하게 저축을 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저 나이에 쓰기 바빴다는 생각에 뉘 집 딸인지 잘 자랐다 싶었다. 예쁘고 똑똑한데 야무지고 알뜰하기까지 했던 그 고객은 지금 더 멋진 미래를 만들어 가고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고객과 좋은 기억도 많다만...... 역시나 오늘도 불편한 이야기를 시작해보려고 한다.


선입견과 편견이 나쁜 것임을 알지만 은행 여러 지점에서 근무해 본 결과 고객 성향이 동네에 따라 다른 것은 사실이다. 부촌도 부촌 나름 다 성격이 다르고 없이 사는 동네라고 사람들이 다 거친 것이 아니지만……물론 여기서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지하철 역 바로 앞에 있던 한 지점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지점 문으로 젊은(어린) 아가씨 한 명이 가죽 재킷을 반쯤 벗은 건지(반만 걸친 건가) 입은 건지 어깨 한쪽이 드러난 옷을 입고 비척이며 들어왔다. 차례가 되어서 내 창구에 오게 되었는데 오래전에 만들어서 거래는 거의 안 한 외화 통장을 던졌다.(정말 휙 던졌다.드문일도 아니다.)그리고 하릴없이 창구에 비치된 팸플릿들을 이것저것 뽑아서 대충보다 던져놓기를 반복했다. 이런 걸 느낌이 쎄하다고 하던가.....?


그러다가 외화 통장과 외환 거래 관련해서 두서없고 개연성 없는 질문들을 늘어놓았다. 자기도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려고 내가 말을 꺼내자 대뜸


“건방지게 굴지 말고 대답이나 해요!”


란다.



하.하.하.하.하.하.하. 누가 건방 진 거니? 뉘 집 자식이야 얘는......? 싶었지만 고객은 고객인고로 묻는 말에 (사실 대답 내용이 중요치도 않은 무의미한 질문이었으니) 기계적으로 대답해 주고 보냈다. 이런 고객들은 ‘기분’을 운운하며 민원을 넣을 수도 있다.


이럴 때는 나의 표정과 행동과 말투에서 내 ‘기분’과 ‘감정’을 지운다.


사람 상대하는 일을 오래 하다 보면 혹은 서비스 교육 같은걸 주기적으로 받다 보면 속으로는 죽이고 싶어도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스킬이 생긴다. 이 경우는 웃지도 말아야 하고 경직된 것으로 보이지도 말아야 한다. 웃으면 비웃는다고 경직되어 보이면 불친절하다고 민원을 넣을 테니.


또 같은 지점에서 일할 때의 일이다.


은행 영업 마감시간 4시가 다 되어 가는데 한 청년이 지점으로 들어왔다. 내 창구에서 업무처리를 해주게 되었는데 보이스피싱 관련 무혐의 처분을 받아서 통장 지급 정지 해제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상세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보이스 피싱으로 이용된 계좌주가 무혐의를 받는 경우를 이렇게 보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때는 처음 처리해 보는 케이스여서 해당 부서에 문의를 해가면서 4시를 넘겨 지점 문은 닫고 계속 진행을 해야 했기에 고객에게 양해를 구했다. 처음 있는 일이라 시간이 좀 걸리고 있다고 빨리 처리해 주겠다고 죄송하다고..... 그랬더니..... 이 고객이....(아니 이 보이스 피싱 연루자께서)

“아~ 괜찮아요~ 뭐 이제부터 많이 해보시면 익숙해지시겠죠~.”


하더니 키들키들 웃기 시작했다. 나는 그날 창구에서 악마를 보았다.


내가 오늘자로 은행을 관둔다는 생각으로 이걸 현금접시로 확 후려치나 어쩌나 갈등되는 순간이었다.


그 통장에 몇백만 원씩 속아서 입금하고 돌려받지 못한 피해자들은 보통 대출에 허덕이고 돈이 없어서 적은 금액이라도 빌려준다니까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돈을 보냈다가 궁지에 몰린 사람들일 텐데.... 범죄에 통장을 빌려주고 몇 푼 챙겨 받았을 이 빌어먹을 자식이 킥킥 거리며 앞으로 은행에서 이런 일이 비일비재 해질 것이라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나는 현금 접시로 이 고객을 때리지 않았으며 지급정지를 풀어주고 곱게 보내 주었다. 창구에 앉은 나의 본분은 정의의 사도가 아니라 은행원이었으니까.


그리고 또 한 번은 창구 저편에서 흘끔흘끔 내 쪽을 쳐다보면서 오랜 시간 객장에 앉아있던 젊은 남자고객이 자리로 와서 이것저것 외환업무를 물어보고 가서는 민원을 넣은 적이 있다.


민원의 내용이 참으로 신박했는데 설명을 잘해주었고 서비스도 다 만족스러웠는데 “은행원치고는” 표정이 “건방지다”는 내용이었다. 외근 나갔다 들어온 남자 책임자가 직접 통화를 해서 달래 보았더니 반응이 더 기가 막히다. 웃으면서 괜찮다고 하더란다.


이쯤에서 과연 내가 서비스 마인드나 태도에 문제가 있었던가 의문이 생기는 독자라면 나는 퇴사하는 마지막 지점을 제외한 모든 지점에서 CS리더였고 내가 맡기 싫었던 순간마저도 지점장의 강권으로 그 역할을 맡아야 했던 CS리더 근 십수 년 차 베테랑이었다. 한 지점에서는 우수지점 현판을 걸기도 했다. 실적도 실적이었지만 서비스 부분도 어느 정도 자부한다는 이야기다.


내 자랑은 이쯤 하고 본론으로 돌아와서


“건방지다.”는 말은 어떤 때 누가 누구에게 할 수 있는 말인가?


은행원이니까 서비스직이기도 하니까 월급 받으면서 은행 다니는데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하던 너는 당해야지....라는 생각으로 아무 때 아무에게나 한번 저래보는 것이겠다만.



얘들아…


너희가 말하는 선입견 없고 ‘공평’한 세상에 ‘예의’도 좀 존재하면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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