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자극적인 제목에 대해 사과드린다.
저 ‘또라이’라는 말이 어떤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 대한 비하와 조롱의 의도로 사용한 것이 아니며 은행에서 공공연하게 사용하는 속어 같은 것도 아님을 밝혀둔다.
‘비 또라이’ ‘해 또라이’라는 말은 내가 어느 지점에선가 같이 일했던 동생에게 들었던 이야기로 기억한다. 내 브런치 북의 제목인 ‘신기한 진상 사전’도 그 아이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 아이와 있던 지점이 유독 정신없고 유동인구가 많으며 사건 사고가 많았던 까닭에 이런 말들이 튀어나왔던 것 같다.
비가 오면 이상한 고객이 많이 온다는 것 정도는 은행에서 종종 하는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맑은 날은 이상한 사람이 없느냐? 그럴 리 없지..... 해서 저런 말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비가 오면 심심찮게 찾아왔던 그 많은 ‘도른자’들은 거의 기억에 남는 사람이 없다. 그냥 비 오는 날은 이상한 사람이 오는 게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중 그나마 처음 있던 지점에서 만난 고객 한 명만 분명히 기억에 남아있다.
그날 그녀가 입고 온 샛노란 우비처럼 뚜렷하게.
지금으로부터 십수 년 전, 본점 근무만 해오다가 지점으로 첫 발령을 받았다. 서울 촌놈인 나는 집도 학교도 직장도 종로구, 중구를 벗어나 본 적이 없는데 첫 발령지는 서초구였다. 나는 나의 홈타운의 정서에 무척 만족하며 살아온 사람이어서 강남으로 발령 난 것이 그닥 달갑지 않았으나 같은 부서 과장님이 ‘썩어도 준치’라고 처음부터 강남영업본부로 발령 나서 잘 되었다며 축하해 주셨다.
강남이어서가 아니라 처음 발령 난 그 지점은 대로변에 있지도 않고 동네 자체도 강남에서도 비교적 조용한(?) 동네이고 고객들도 거의 오는 사람만 오는 무난한 지점이었다. 지나가다 불특정다수의 고객이 들어올 일이 거의 없고 내점 고객들이 주로 용무가 정해져 있으니 예측불가한 상황이 적다는 뜻이다.
그 지점에 근무했을 때 유독 비가 많이 왔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점 인근에 출근길 인도가 허리까지 물이 차오르기도 했고 지점장님이 학동역 사거리에 지점 차량을 버려두고 출근하신 날도 있었다.
그렇게 억수같이 비가 내리던 어느 날 오후,
일기가 좋지 않으면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야 귀찮아서라도 은행에 부러 갈 일이 없으니 지점이 한산했는데.(생각해 보니 그래서 기어코 오는 사람은 좀 이상한 사람일 확률이 높은 것도 같다.)
노란 우비를 입은 여자가 은행 문을 열고 들어왔다.
유치원 때 이후로 저런 우비를 입은 사람은 개콘에만 나오는 줄 알았는데 정말 샛노란 우비를 입고 장화를 신은 성인 여자가 지점문으로 들어서더니 번호표를 뽑아 내 자리로 왔다.
그 고객은 나에게 우리은행(시중에 그 ‘우리은행’이 아니다..... 은행원에게는 내가 다니는 은행이 모두 우리은행이니...... 이 행명은 만들어질 당시에 말이 많았다.) 통장을 주고 꼭 쥐고 있던 무언가를 내밀었다.
오 원짜리 동전 한 개와 일 원짜리 동전 한 개.
그렇게 동전 두 개를 손바닥 위에 놓고 내게 손을 내민 상태에서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동전들을 현금 접시에 놓았다.
텅 빈 객장, 창 밖에 내리는 비, 노란 우비를 입은 여자, 그리고 오원과 일 원짜리 동전. 비현실적인 순간이었다.
정신줄을 잡고 생각해 보았다. 통장을 주고 돈을 내밀면 보통의 경우 입금을 해달란 소리다. (뭐 비도 안 오고 또라이가 아니더라도 통장 던져놓고 현금 던져주고 마는 인간들도 있으니)
그 첫 지점에서는 내가 막내여서 CS리더였다. (그리고 그 후에는 내가 고참이어서 CS리더였다. 지나고 보니 그냥 나여서 그랬나 보다.) 민원이 들어오게 할 수 없으니 호흡을 가다듬고 이 상황에 내가 어떻게 응대할지 몇 초간 생각했다.
그리고 통장 정리를 해서(신분증 달라고 해서 조회할 엄두가 나지 않아) 거래가 없는 통장임을 확인한 후에 일단 동전 두 개를 들어서 두 손으로 공손하게 그녀에게 돌려주며 지금 통용되지 않는 주화라서 입금이 불가능하다고 안내해 주었다.
6원 입금하겠다고 본점 출납에 연락해서 이걸 한국은행에 5원짜리 1원짜리를 10원 단위로 만들어서 보내서 교환을 받느냐 마느냐...... 그럴 일이었을까? 아니면 통장에 6원 찍어주고 그 동전은 휴지통에 내버리고 내돈 10원을 넣었어야 했을까? 속으로 별 이상한 여자 다 봤다고 욕을 하며…… 이건 지금도 잘 모르겠다
나는 최대한 내가 너와, 너의 오원과 일원을 절대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온몸과 마음으로 표현했다. 실성했냐는 의문의 표정과 눈빛을 지우고 담담하고 공손하게.
그녀는 한마디 말도 없이 조용히 동전을 받아 들고 통장을 챙겨서 홀연히 지점 문을 나섰다.
뭘 그리 유난이었냐고 하겠지만. 낌새가 이상하면 몸을 바짝 낮추고 긴장해야 한다. 방심하면 반드시 탈이 난다. 조용히 물러나도 민원 넣겠다 싶으면 여지없이 민원이 들어오니까.
그리고 내가 이동 발령으로 다른 지점에 있을 때의 일이다.
그 지점에서는 비가 아니라 사람이 내렸다. 내점 고객이 300~500명 가까이 되는 날도 있었다. 그리고 그 정신없는 객장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내며 들어온 한 남자를 아직 기억한다.
부러 객장을 주시하지 않아도 끊임없이 고객이 밀려 들어서 앞에 있는 사람 상대하기도 바빴던 여느 때와 다름없던 어느 날, 삭발을 한 남자가 한 손에 S모 통신사 쇼핑백을 들고 파란색 바탕에 하얀색 두 줄이 간 츄리닝 바지에 흰색 런닝셔츠를 입고 맨발로 들어섰다.
신발이 신겨져 있지 않은 그의 맨발은 발톱에 까맣게 파랗게 색칠이 되어있었다. 창구에 다가왔을 때 보니 손톱에도 마찬가지로 까만색, 파란색이 칠해져 있었는데 요즘 남자들도 한다는 그 네일아트가 아니라 ‘크레파스’였다.
어젯밤에 우리 아빠가 다정하신 모습으로 한 손에 들고 오셨다는 그 ‘크레파스’ 말이다.
그 남자는 손톱, 발톱에 크레파스를 칠 하고 왔던 것이다. 삭발에 맨발에 크레파스라니. 어떤 업무를 하러 왔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그 남자의 태도와 외모는 자기주장이 강했다.
그날 엔화로 환차익을 보겠다고 나에게 상담을 받던 S모 통신 대리점 남자 직원과 우리 지점 직원들이 언니라고 부르던 옆 골목 커피숍 여자 사장님이 자기들 대리점과 가게에도 그 남자가 왔다 갔다며 이상한 사람이었다고 ‘또라이’ 인증을 해주고 갔다.
그리고 문제는 은행 문을 닫고 마감하던 저녁에 터졌다.
하루 종일 그 몰골로 동네를 돌아다녔는지 다 저녁에 그 남자가 비척 비척거리며 지점을 찾아와 문을 열어 달라고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낮에 창구에서 확인한 결과 특별히 처리할 업무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이미 청원경찰이 퇴근한 후였으며 일이 층으로 되어있던 그 지점에 일층에는 여직원 몇 명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내가 다음날 영업시간에 다시 오시라고 문 안에서 거듭 안내를 하고 있었는데 건물 관리아저씨가 “아 은행에 볼일이 있다는데 왜 문을 안 열어 주냐.”며 눈치 없이 참견을 하셨고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실랑이가 벌어지던 차에 창구 왕언니가 그만 “아저씨 저 사람 또라이에요”라고 말해 버렸다. 손으로 머리 옆을 빙빙 돌리는 제스처를 하며......
문 앞에 주저앉아 있던 그 남자는 왕언니가 손으로 한 제스처는 보지 못했으나 말소리는 귀신 같이 듣고 말았다.
또라이에게 또라이라고 하다니.
다음 순간 그 남자가 벌떡 일어나 유리문에 머리를 부딪치고 발로 차기 시작했다. 보안 장치가 깨지고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지점 정문이 아니라 별도의 출입구였고 셔터가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투명한 유리문과 블라인드가 있었던 건 기억이 난다.) 잠금장치까지 부서지면 들어오는 건 시간문제였는데 발작을 일으키던 그 남자가 그만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발을 동동 구르며 옆에서 겁에 질려하던 동생들이 물었다.
“언니! 112에 전화해요!? 119에 전화해요!?”
나: 야! 아무거나 불러! 둘 다 불러! 119 먼저 불러!!!!!!!!!!
그리고 왕언니에게 화를 냈던 것 같다.
나 : 아! 언니 미친놈한테 미쳤다고 하면 어떡해!?
왕언니 : 야.. 아냐.... 나 그냥 손으로만 (빙빙) 이랬어...
나: 언니가 소리 내서 ‘또라이’라고 했어!!!!!!!!!
그때 언니 나이가 지금 내 나이인데...... 나도 이제 말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조절이 힘든 나이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119를 먼저 불렀는데 112가 먼저 왔고 누가 어디로 데려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명색이 은행인데 그날 지점 한쪽 입구는 보안장치가 고장 난 채로 잠금장치만 해놓고 퇴근을 했다.
다 지나간 일이고 이제는 이렇게 옛말을 하고 있다.
우비를 입은 그녀는 그 후 그 동전을 버렸을까? 간직했을까? 삭발한 그 남자는 그날 잘못된 건 아닐까? 그 후로 오지 않았는데......
돌아보니 은행 아니면 내가 저런 인간 군상들을 어디서 만났으려나 싶고 이것도 추억이라면 추억인가 싶다.
그 시절을 떠올려보면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그 모든 날에 한결 같이......
진상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