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리고 싶어요. 공인인증서

by neveres

나의 다른 글에서 언급했듯이, 전직 은행원인 나는 현직 세무사 사무실 직원이다.


얼마 전 세무사회에서 하는 ‘연말정산실무교육’을 받고 왔다. 기본 공제 대상으로 공제받을 수 있는 가족의 범위가 궁금하면 교재에 나온 가족 관계도 하나만 보면 된다고 강사 세무사님이 말씀하셨다.


오만 관계가 다 나와 있는데 여기서 며느리, 사위가 X표 되어있는 걸 보니 작년인가... 거래처 직원이 내 사수에게 전화해서 자꾸 자기가 시아버지의 ‘자식’이라며 증여인가 상속인가에 대해 문의했던 기억이 나서 웃음이 나왔다. 상대방의 이야기는 잘 들리지 않으나 우리 직원이 “자녀가 아니시잖아요.”라는 말을 거듭하는 걸 들으며 ‘왜 저래?’하며 웃던 기억이 난다.


연말 정산할 때도 남이라는데 상속이 웬 말인가?


이제 다시 5년도 넘게 지난 그 시절 은행으로 시간을 돌려보겠다.


연말정산 시즌에 창구에 주로 오는 고객은 직장인이 아니다. 어르신들이다. 즉, 직장인 자녀를 둔 부모님, 노인들이 은행에 찾아왔었다.


이유는 ‘공인인증서’를 발급받기 위해서였다. 정확히는 기본 공제 대상으로 부모님을 올리기 위해서(부모님 소비, 지출도 자신이 공제받으려고) 자녀가 공인인증서를 받아오라는 미션을 내려 그게 뭔지 알 수 없으나 ‘공인인증서’라고 적은 쪽지하나 들고 오만 노인들이 은행에 와서 ‘그걸’ 달라고 했던 것이다.


지금은 절차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몰라도 그 당시에는 공인인증서를 발급받으려면 본인이 은행에 와야 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공인인증서’를 발급하려고 은행에 와야 하는 이유는 은행에서 ‘인터넷뱅킹’을 가입하고 보안매체(보안카드나 OTP)를 받아서 집에 가서 컴퓨터에서 은행 홈페이지에 로그인을 하고 거기서 공인인증서를 발급받아서 컴퓨터나 USB에 저장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은행은 ‘공인인증서’가 필요한 고객에게 ‘인터넷뱅킹’을 가입시켜 주고 ‘보안매체’를 발급해 주면 그뿐이다.


여기서 혼란이 야기된다.


어르신들은 ‘공인인증서’라는 걸 받으러 왔는데 은행은 ‘인터넷뱅킹’을 가입시켜 주니 아무리 설명을 해드려도 이해도 가지 않고 뭔가 자신이 원하는 걸 해주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네들은 자녀가 받아오라고 한 그 ‘공인인증서’가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실체가 있는 물건이라고 생각한다. 그걸 안 주니 울상이 되는 것이다.


어쩌다 이걸 이해하는 고객이 있다 해도 자신은 할 줄 모르니 은행에서 해달라고 억지를 부리기 시작하는데 은행원 컴퓨터에 자기 ‘공인인증서’를 받으면 그걸 어떻게 써먹는단 말인가? USB로 그걸 받아서 줄 수도 없다. 개인정보보안 등의 이유로 이건 불가능하다. 돼도 큰일 아닌가?


이걸 다 설명해 줘도 자식한테 이득이 될 무언가를 해주러 왔는데 그걸 하지 못하는 것 같아 역정을 내기 십상이다. 듣다 듣다 자녀분한테 만들어드린(아이디도 거의 8,90% 만들어 드리곤 했었다. 영어를 모르신다기에) 아이디와 이 보안카드 들고 가셔서 같이 해달라고 하시면 된다고 하면 더 화를 냈다.



자기 자식은 바쁘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하는 할머니, 할아버지 뒤로 대기가 10~20명(그때는 내점 고객이 지금보다 많았다. 지점마다 차이는 있었지만)...... 나도 바쁘다.


요는 내 자식에게는 시간도 노력도 빼앗기 싫고 그 요구에 대해 결과물만 고이 갖다 바치고 싶으니 내 자식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당장 해내라는 말이다.


정말 되면 해줄 판인데 집에 쫓아가서 해줄 수도 없고 불가능하다.


자기 자식 연말정산 소득공제로 돈 받게 해 주고 귀찮게 하기는 싫다고 남의 자식을 들들 볶는다. 나도 엄마 불러오고싶다.



그 집 자식들은 ‘노인네가 그럴 수도 있지.’ ‘당신은 부모가 없느냐’고 말할 테지만.


일단, 나는 부모님의 지출로 내 연말정산 소득공제를 받은 적이 없다.


친정 부모님과 식사를 하고 엄마가 아빠를 쿡 찔러서 “당신이 계산해요.”하면 아빠는 꼭 현금을 낸다. 그리고 계산은 본인이 했는데 현금영수증을 내 핸드폰 번호로 한다고 하곤 했다. “너 연말정산 할 때 소득공제받으라.”고 그러면 나는 손사래를 쳤다. 몇 년 전까지도 아빠가 근로소득이 있었기도 했지만 어쩐지 효심과 별개로 그건 싫었다.


그리고 모든 자식이 연말정산 소득공제받아보겠다고 알파벳도(생각해 보니 우리 엄마, 아빠는 아이디는 잘 만들 텐데) 모르는 노인을 ‘공인인증서’라고 받아 적은(와서 말한 것도 아니고 백 프로 전화로 불러주고 이거 받아오라 했겠지) 쪽지를 들고 은행 창구에 가서 생판 남인 은행원에게 더듬더듬 은행 일을 보게 하는 건 아니다.



은행원이 그 노인들이 마냥 귀찮은 게 아니다. 속상하고 화가 나는 것이다. 그 자녀들이 말할 그 ‘그럴 수도 있는 노인네’여서 그들도 ‘부모’가 있어서.


내가 이런 마인드여서 거지꼴을 못 면하는지도 모르지만.


소득공제 그게 뭐라고 그거 받아 챙길 요량으로 ‘공인인증서’가 뭔지도 모르는 노인네를 혼자 은행에 보내서 남의 자식한테 사정하고 아쉬운 소리를 하다가 진상이 되게 하는가.


당연히 자신이 받을 혜택이니 받아야 한다면 반차만 써도 충분히 은행에 같이 와서 처리할 수 있는 일인데 자기 휴가는 반도 쓰기 싫고 소득공제는 받고 싶은 그 심보가 못되게 느껴지고 눈앞에 노인네들은 피곤하면서도 안 쓰러웠다.


자식이 뭐라고...


본인의 필요에 의해서 부모님을 관공서나 은행에 가서 일을 보게 할 요량이면 적어도 동반해서 고생은 시키지 말자. 불가피한 상황이어서 같이 가지 못하면 직원과 통화하면서 말이라도 곱게 하시라. 당신은 ‘요구’가 아니라 ‘부탁’을 하는 입장이다.



아직도 가끔 그때를 생각하면 뭘 달라는데 쥐어줄 것이 없으니 보안매체에 ‘공인인증서’라고 써서 주고 싶었던 기억이 난다.



나도 자식이지만 자식이 웬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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