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구의 이 편

by neveres

오늘은 창구 너머가 아니라 창구 이편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내가 다니던 은행이 흡수 합병되고 몇 해가 지난 시점, 내가 마지막 지점에 근무하던 때의 이야기이다.


점심 교대로 6,7개의 창구 중에 3개 창구만 직원이 남아있던 어느 날 안 그래도 점심시간이라 대기가 길어지고 있는데 창구 밖이 아니라 안쪽에서 믿을 수 없는 전화 통화가 들려온다.


“네~ 사장님~ 저번에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던 거~ ‘ㅇ데 캐슬’이요~ 나온 거 있어요?”


‘이게 무슨 소리지?’ 싶어서 소리 나는 쪽을 보니 눈앞에 대기 손님이 여러 명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데 천하태평한 우리 A대리께서 여유롭게 은행 전화로 부동산 중개업자와 통화 중이시다.


“아~ 나온 게 아직 없어요? 물건이 없어서 어떡해~? 신경 좀 써줘요~ 네?”


그때부터 나를 비롯해 대기 고객들의 시선까지 모두 그녀에게 쏠린다. 그녀는 지금 재테크 중이신가 보다. 내가 창구에 이 쪽 끝이고 A대리가 중간, 저 쪽 끝에는 B대리가 나와 같이 A대리를 어이없게 쳐다보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민망한지 내 눈을 피한다. 나는 흡수 합병된 은행 직원이고 A, B 대리는 인수 합병한 은행 직원이다. 이걸 일일이 나누냐고 하겠지만 합병으로 인원 감축 칼바람 같은 건 안 불어도 서로 간에 찬바람은 안 불 수가 없다. 물론 이건 이제 몇 년도 더 지난 이야기일 뿐 이제 남은 직원들과는 무관하다.(하겠지?)


물론 A대리 같은 직원이 내가 일했던 은행에 없던 것은 아니지만 B대리도 나도 은근히 서로 민망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나이는 B대리, A대리, 나 순으로 40대 중후반의 아줌마들이었던 고로 그냥 속으로 혀를 차고 넘어갔다.


A대리 같은 타입은 자존심을 내려놓고 신경을 무디게 하고 최대한 눈치껏 몸을 낮춰서 버티며 은행에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열심히’와 ‘잘’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거기 에너지를 쓸 마음이 없다. 밥 잘 먹고 은행에 출근 잘하면 월급에 애들 학비에 복지도 빵빵하다. 어차피 월급 받아 주말에 오픈 런으로 명품사고 골프 치러 다니면서 자존감을 채우니 평일 낮에 자존심 내려놓고 철판 깔 면 그뿐이다. 필요한 건 이런 존재를 커버할 다른 유능한 인력들이고 본인은 되도록 나서지 않고 눈에 띄지 않고 모나지 않게 구는 일이다.


이렇게 말하면 은행 날로 다닌다고 생각되겠지만 저렇게 지내기 위한 처세와 스킬도 만만치 않게 대단한 능력이다. 은행은 아침저녁 모든 화두가 실적이고 회의에 워크숍에 연수에 직접적인 푸시까지 이걸 무시하기란 쉽지 않다. 참고로 나에게는 없는 능력이다.




한 번은 외환 업무를 하러 온 고객이 A 대리 앞에 앉았다. A 대리는 나에게 메신저로 자기는 외환 업무를 잘 못하니 와서 처리하라고 한다. 가끔 이런 상황이 연출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 인수합병은행 직원들도 환장할 노릇이었던 것이 자기들은 외환 같은 거 전문으로 할 마음이 없는데 더럭 회사에서 외환전문 은행을 사버려서 갑자기 외환 업무를 주로 하는 고객을 상대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A대리같이 오십을 바라보는 직원들이 이제와 새삼 그 나이에 외환 따위 배우고 싶을 리가 있겠는가.


그 손님은 내가 다니던 은행에서 오래도록 외환 업무를 보던 분이셨다. 고객은 입금을 하러 오셨다는데 A대리가 출금 화면을 열어놓고 당당하게 나를 불렀다. 안 그래도 그전에 입금을 출금으로 잘못처리해서 다행히 전부터 안면이 있던 내가 고객한테 전화를 해서 양해를 구하고 민원 없이 넘어갔었는데 배 째라고 자기한테 못 오게 하려고 일부러 저러는 건가 싶었다.


고객은 죄가 없는데......


아직도 아침에 출근하면 영업시간 전에 책임자들 자리에서 골프 스윙 자세를 해 보이며 해맑게 웃던 그녀가 생각난다.


지금 아파트 값이 천정부지로 올랐다던데. 우연히 마주치면 그때 ㅇ데캐슬 아파트 사셨냐고 꼭 물어보고 싶다.



그리고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 더 ‘기이한 이야기’를 해보자.


직원 공석이 많고 내점 손님도 많았던 한 지점에 새로 직원이 발령 나서 왔다. 직급은 대리였고 야무지게 생긴 외모에 유난히 새빨갛게 칠한 입술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 K대리.


K대리는 나에게 참 싹싹하게 잘하던 직원이었다. 그래서 같이 식사를 하고 이런저런 대화도 하면서 지냈지만 그 지나친 싹싹함이 신경 쓰였다. 하루 종일 사람을 만나고 많은 사람들을 거치며 일하는 직장에서 생긴 나름 촉이랄까. 평범한 아이는 아니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K대리는 온 지점 직원들과 부딪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트러블 메이커’가 되었다. 지점장, 나, 청원경찰 정도를 제외하고 도무지 K대리가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 따위는 없는 것 같았다. 분노조절 장애가 있는 것 같았고 순식간에 ‘관심병사’가 되어 내가 맡아 청원경찰이랑 같이 점심도 먹어주고 달래도 주고 주의도 주며 지내게 되었다.


성격 파탄 정도야 일도 아니겠다만 K대리는 나에게 은행 생활에서 잊을 수 없는 사건을 만들어준다.


어느 날 마감 시간에 외화출납을 담당하던 직원이 시재(전산과 외환화폐, 동전 실물)가 맞지 않는다고 난리가 났다. 금액도 적지 않았는데 지금 기억에 한화로 몇백만 원 정도 되는 유로가 사라진 것이었다. 직원들 개개인의 시재는 맞았기 때문에 외화시재 담당자가 물어내야 할 판이 된 것이다. 일단 시재는 개인 돈으로 채워놓고 몇 날 며칠을 찾았다.


찾아도 찾아도 도무지 발이 달렸는지 유로(500유로짜리로 기억한다.)는 찾을 길이 없었고 나와 별 친분이 없었던 외화출납 직원이 마감시간에 할 말이 있다며 지점 밖 커피숍으로 나를 데려갔다.

“언니. 아무래도 내부사람 소행인 것 같아요. 저 꼭 찾을 거예요.”

“그래. 내부에서 일어난 일인 것 같다.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면 누군지도 알겠고. 꼭 찾아내라.”


우리는 K대리에게 혐의를 두고 있었다. 외화출납 직원은 일종의 지지를 받고자 했던 것이기도 하고 자신의 의심을 확인받고 싶었던 것이기도 했을 것이다. 사고 치는 사람은 보통 그 낌새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이건 돈 욕심에 일어난 사고가 아니라는 걸 직감했기 때문에 더 조심스럽고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날 저녁 퇴근한 나에게 K대리가 문자를 보냈다. 자신이 의심받고 있다고 억울하다며 반드시 그 돈을 찾아야겠다고 했다. 일단, 알았다고 어디서 나오겠지.... 꼭 찾아보자고 답을 보냈다.

다음날, 이 구석 저 구석 여전히 찾아다니던 직원들에게 K대리가 못내 답답하다는 듯이 외화출납 직원 뒤에 있던 서식함을 찾아보았느냐고 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 서식함의 좁은 서랍을 빼냈는데 거기서 어릴 적 부채 접기 하듯이 접혀서 테이프를 붙여놓은 500유로 지폐 몇 장이 나왔다.


돈은 찾았으나 범인을 잡지 못한 외화출납 직원이 그 후로도 계속 CCTV를 돌리고 또 돌려보다가 드디어 어떤 장면을 찾아낸다. 화면 속에 외화출납 시재 서랍 앞에 쪼그려 앉은 K대리가 보이고 그녀의 손이 서랍 안으로 들어가서 뭔가 조물거리는 듯한 모습이 보이더니 서식함으로 가서 서랍을 열었다가 뭔가 만지고 다시 닫는 모습. 그런데 그 화면 어디에도 유로 지폐 실물은 잡히지 않는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소름이 끼치는 장면이다. K대리는 이 화면을 보고도 자기는 안 그랬다고 발뺌을 했고 위에서도 이때 당장 무슨 조치를 내리지 못했다.


그다음은 원화출납이었다.(얘는 왜 이렇게 출납직원 애들이랑 원수가 졌는지 원.......) 여기는 약소하게 5만 원권 6장이 사라졌다. 이때는 K대리가 모두 자신을 의심하는 것 같다며 봉투에 30만 원을 넣어서 책임자에게 곱게 건네준 것이 생각난다. 그리고 한번 당한 것이 있으니 모두 CCTV를 눈이 빠지게 돌려보다가 K대리가 원화출납 책상 서랍 아래로 봉투 하나를 밀어 넣는 것을 보고 불이 나게 책상 서랍을 빼서 그 아래 봉투를 찾아냈다. 5만 원권 6장, 30만 원이 든 봉투였다.

직원들은 지점장에게 조치를 취해달라고 항의했고 K대리는 본점에도 불려 가고 경찰에도 불려 갔으나 은행에서 정직 몇 개월 받은 것이 전부일뿐이다. 생각해 보면 은행에서 고객 돈에 손을 댄 것도 아니고 시재 실물을 자신이 절취한 것도 아니며 지폐 몇 장을 ‘숨겨’ 놓은 것 일뿐, 그 마저도 숨기는 정황이 포착된 것이지 지폐는 그 정황 증거가 되는 CCTV화면에 잡히지 않았다.


왜였을까? 가지지도 않을 돈을 왜 숨겨 놓은 것일까? 출납 직원들이 자신에게 무슨 잘못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밖에는 딱히 이유가 없었는데......


K대리는 성격이 불같고(이건 나도 그렇다) 분노 조절장애가 있어 보이긴 했지만 시중은행에 들어올 만큼 스펙도 좋고 일도 야무졌으며 머리도 좋았다.


그래... 머리는 정말 좋았던 것 같다. 아니면 저런 일을 감쪽같이 벌일 수가 없었겠지.


K대리에 대해 우리는 뒤늦은 뒷조사에 들어갔고 이전 지점이 그녀의 거주지와 우리 지점과는 동떨어진 제3의 지역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 지역 영업본부에서도 기괴한 에피소드 몇 가지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알게 된 것이 그녀는 한번 걸리면 결코 똑같은 짓을 반복하지 않았다.



우리는 K대리를 제외하고 지점장과 모여서 회의를 하기도 했는데 지점장이 “사랑으로 감싸주라.”는 개소리를 시전 하는 바람에 분위기만 엉망이 됐었다. 은행이 ‘사랑’이 꽃피는 곳이긴 하지... 만(안 좋은 의미에서) 이 괜한 소리에 지점장과 K 대리가 무슨 사이가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K대리는 정작 그 지점 청경이랑 친하고 싶어 했던 걸 나는 안다.


그리고 그 사건이 우리가 사랑으로 감싸줄 일은 아니었지만 K 대리에게 필요한 게 관심과 사랑인 건 맞았을 것이다.


다른 직원과의 다툼에서 청경이 자기편을 들어주지 않자 상처받은 표정으로 갑자기 화를 내던 그녀가 생각난다. 자기가 관심 있고 친하게 지냈으면 하는 상대가 자신을 거부했을 때, 혹은 자기편에 서주지 않았을 때(하물며 남편도 남의 편이라는 세상에 나와 무관한 이성에게 이건 무리다.) 상처받은 짐승처럼 공격적이 되었던 그녀가 나는 좀 위태로워 보였었다.


그 사건이 있고 얼마 후 나는 다른 지점으로, 좀 더 평온한 지점으로 발령이 났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이제 아예 은행을 떠난 후로 몇 해가 흘렀다.


아직도 이 사건을 같이 겪었던 K대리 또래의 동생들은 그녀를 ‘미친 X’이었다며 이를 간다. 하지만 어쩐지 나는 그녀를 떠올리면 아직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생각이 된다.


그때, 젊고 귀여운 외모의 우리 지점 청원경찰이 K 대리에게 호의 적이었다면 그녀는 마음이 평온해서 사건을 저지르지 않았을까?


누군가 그 욱하는 성격에도 불구하고(외모는 박색이랄 수 없었으니) 반해버린 젊은 남자 행원이 있어서 그녀에게 구애를 하고 흔한 은행 사내 커플(대체방이라고 부르는)이 되어서 일찍 결혼해서 안정을 찾았다면 그녀는 괴이한 소문을 꼬리표로 달고 다니지 않고 남들처럼 살았을까?


그건 모를 일이다만.


이제 세월이 흘러 돌아보며 생각하기로는 K대리가 그 외로움과 불안한 마음을 달래어줄 누군가를 만났기를 바란다. 그래서 더이상 범죄와 일탈 사이에서 줄타기 하는 삶에서 벗어났기를… 그리고 은행을 떠났기를 고객과 직원들을 위해 바래본다.



그리고,


A 대리, 그 언니는 꼭 그때 ‘ㅇ데캐슬’을 사셨길... 그렇게 돈은 재테크로 버시고 ‘월급루팡’ 은 내려 놓으셨길 바란다. 곧 정년이시긴 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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