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마무리하며

by neveres

이제 방학 같던 하반기를 지나 슬슬 본업 모드로 돌아가야 할 상반기가 도래했다.


앞서 나의 글에서 언급했듯이 나는 지금 세무사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다.(나중에 어쩌다 내가 이일을 하게 되었는지도 이야기해볼 생각이다.) 세무사 사무실의 굵직한 세금 신고 업무가 상반기에 주로 몰려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작은 우리 사무실의 경우 하반기에는 제법 한가하고 상반기에는 "일 좀 한다."싶은 수준이다.


본업에 집중해야 하기도 하고 이제 슬슬 이야기를 정리해야 할 듯도 하여 이 연재를 이쯤에서 마무리하려고 한다. 과연 내가 상반기라고 글쓰기를 끊을(?)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지만서도...


고마운 고객들 중 일부를 이렇게 진상이라고 표현하게 되어 유감이지만 더 유감스럽게도 이 연재에서 이야기한 진상 고객들은 사실 진상 축에도 끼지 못한다. 그저 웃어넘길 수 있는 정도의 이야기만 해보았다. 마지막 글에서 이야기한 직원들 또한 그렇다. 정말 그 정도는 애교다. 실은 창구 안에 있는 '진상'들이 훨씬 버라이어티 했었다. 언젠가 차근차근 이야기해 보는 것도 좋겠다.


하지만 나에게는 고마운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다. 그랬기에 애초에 은행원이 될 생각이 일 그램도 없던 내가 무려 17년 11개월을 그곳에서 지낼 수 있었던 거겠지. 하나님이 왜 숫자라면 경기를 일으키는 수포자인 나를 수학만 보완하면 SKY 갈 수 있다는 고3담임말에 SKY는 필요 없고 수학은 더 필요 없다던 나를... 온통 아침부터 저녁까지 숫자 놀음인 은행에 보내셔서 무려 일을 '잘'해버리는 기적을 베푸셨는지 몰라도 그곳에 여러 가지 형태로 나를 지켜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전표에 도장하나 빠진 걸로 감사 나온 날 오들오들 떨던 나를 전표 숨겨서 얼른 올라오라던 지점 위층 회사 사장님은 무려 법인인감을 들고 도장 찍을 준비태세를 하고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또 뭐 빠진 거 있으면 얼른 뛰어 올라오라며 너무 겁내지 말라고 다독여 주셨던 그분이 아직도 생각난다. 그때가 첫 영업점 감사 나온 날이었다.


'독도는 우리 땅'이긴 하나 그걸 사랑까지 해야 하는 건가 싶게 '독도 사랑' 5% 적금을 오전 한나절 3일 동안 팔았던 시절이 있었다. 창구에 직원이 부족해서 쩔쩔매던 그 지점에서 대기가 수십 명에 하루에 내점 고객이 300명이 넘게 몰려들던 때, 직원들이 점심 식사를 가지 못하는 걸 보고 햄버거 세트를 잔뜩 사들고 오셔서 조용히 청경에게 건네주며 탈의실 가서 한두 명씩이라도 번갈아 먹고 오게 하라고 하셨던 할아버지 고객님도 계셨다. 주말 농장에서 고추며 상추며 잔뜩 따다가 가져다주시고 발령 나서 누가 떠나면 사모님과 같이 오셔서 칼국수로 점심 송별회를 해주시기도 했던 우리 모두에게 자상하셨던 그 고객님은 성함도 아직 기억한다.


투자 상품 판매, 관리가 주특기였던 나를 지점 이동 때마다 먼 거리도 마다하지 않고 따라와 주셨던 고객님들도 계셨다. 누군가는 이익을 내주고 관리를 잘해주어서도 있었지만 누군가는 그저 정이 들어서였다. 티세트를 들고 두 번 정도 이동한 지점으로 찾아와 주셨던 나이가 비슷한 여자 고객은 계속은 못 오지만 꼭 찾아와서 또 보고 싶었다고 잘 지내라고 인사를 해주었었다.


지점 근처 교회 여자 사무장님, 매일 마감 즈음에 들렀던 Kㅇ증권 여직원, 우연히 대학 동문후배라는 걸 알게 된 옆에 쇼핑몰 경리 여직원과는 간간히 식사도 같이 하고 사무장님과는 신앙 이야기도 곧잘 나누곤 했었다. 덕분에 창구에서도 얼마쯤은 긴장을 내려놓고 친구를 만나는 기분이 드는 날도 내게 허락되었었다.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별달리 해드린 것도 없는데 김치를 담궈다가 주셨던 할머니 고객님도 계셨고 신랑이 늦게 온다는데 혼자서도 저녁 챙겨 먹으라고 입맛 없을 때 먹으라며 오이지를 담궈다 주셨던 편의점 사모님도 계셨다. 홍콩에 거주하시는 고객 한분은 핸드폰 메시지로 상담을 도와드린 것을 고마워 하시면서 위가 탈이 난 나를 위해 보이차를 몇해간 인편에 보내 주시기도 했다. 덕분에 지금은 위에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다.


이런 고객들이 있었기에 그 살벌한 은행에서 전쟁터나 다름없는 창구에서 나름 든든하고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다. 잊을 수 없는 고마운 분들이 이 밖에도 많다.


해서 따뜻한 이야기 속에 매콤한 이야기 몇 개쯤 이렇게 꺼내어 보일 수 있었다. 나에게 더 이상 힘든 이야기가 아니니까. 더 좋은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많이 가지고 있으니까.


이제 그 온기를 기억하며 '신기한 진상사전'을 덮기로 하겠다.




저의 브런치북 '신기한 진상사전'을 읽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이야기가 혹시 읽는 사람까지 스트레스받게 할까 나름 고심해서 고른 에피소드 들인데 누군가에게 이 글들이 상처가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저 역시 어디선가는 진상이었으니까요.


백화점에서 백만 원어치 화장품을 사들고도 90도 인사를 하고 나오기도 했지만 음식배달만 좀 잘못되어도 예민보스가 되기도 하는 저 역시 누군가에게는 '진상고객'이었을 것입니다. 앞으로는 저부터 좀 더 자신을 단속해 보려고 합니다.


부가세 신고를 무사히 잘 마치고 이제 연말정산과 법인세 준비에 들어갑니다. 남은 브런치 북 하나에 대한 연재를 되도록 마무리하고 싶지만 새로운 연재는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단편적으로라도 글 쓰기를 멈추지 않겠습니다.


잊지 마시고 또 찾아와 주세요. 제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모두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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