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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영화 감상문 -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by 소감행

사람이란 수많은 한계 속에 살아간다. 사람이 살면서 겪는 한계란 무엇일까? 도저히 바꿀 수 없는 것이란 무엇일까? 그러나 정말 바꾸고 싶은 것, 그것은 무엇일까?

사뭇 철학적인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을 영화로 다룬다면 어떻게 시작하고 끝을 맺을까? 과연 영화로 다룰 수나 있을까?


이 질문에 영화적 답을 한 것이 있다면 아마 이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을 거꾸로 간다' 일 것이다.

생과 사, 시간의 흐름, 우연함 속의 필연, 삶에 닥치는 고통

이 몇 가지를 거부하거나 피해 갈 재간이 인간에게는 없다. 더욱이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이란 동물과 달라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생각해도 답이 없고, 해결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수많은 사상과 철학, 종교가 생겨나고, 그 힘을 빈다. 영화란 상업성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고, 따라서 이러한 무거운 주제를 다루기 꽤나 난감할 것이다. 그럼에도 성공한 영화가 있다. 바로 이 영화!


영화는 폭풍이 몰아치는 병동에서 인간 시간의 끝, 임종을 앞둔 환자의 희미한 눈빛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시간은 1918년, 벤자민의 시간이 거꾸로 가기 시작한 시점으로 이동한다. 선천적 맹인인 시계공에게 하나뿐인 아들이 있었다. 그 아들은 전사했고, 시계공은 아무 말 없이 시계 완성에 매달린다. 결국 아름다운 시계가 완성되고 성대한 개관식과 함께 게시되었다. 그런데 시곗바늘이 거꾸로 가기 시작한다. 그제야 말문을 연 시계공은 이유를 설명한다. 사랑하는 아들들이 전정터에서 돌아와 땅을 일구고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염원에서였다고.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많은 순간 중 이보다 더한 순간이 있을까?

벤자민은 거꾸로 가는 시계와 함께 태어났다. 단추공장 사장 2세로 태어났지만, 동시에 어머니를 잃었고, 거꾸로 가는 시간 덕에 80대 말 죽기 직전 노인의 모습으로 생을 시작한다. 그의 아버지에게 아들은 사랑하는 아내를 잃게 하고 외모마저 흉측한 괴물이었으므로 망설임 없이 버린다. 운명적이게도 그를 받아준 곳은 생의 종착지 요양원이었다. 신앙심이 좋은 요양보호사 퀴니는 아이를 주님의 자녀요 기적으로 받아들이고 굳은 의지로 기르기로 마음먹는다. 사람들의 시계와 달리 거꾸로 자라는 그는 점점 기력을 회복하고, 엄마의 사랑 속에서 정서적으로도 안정되게 성장한다. 또 하나의 역설인지 죽음만 있는 그곳에서 노인들이 지혜를 듣고 '삶'에 대해 배워간다. 또한 7번의 벼락을 맞고고 살아난 블랙개그 이야기도 듣고, 세상으로 나아갈 용기도 얻는다. 무엇보다 그의 평생 하나의 사랑인 데이지를 만나게 된다.

우연한 기회에 만난 예인선 선장 마이크 클라크는 인생 2막을 열어준다. 성실하게 일한 대가로 급여를 받고 성인이 되어갈 무렵 17살의 벤자민은 엄마의 곁을 떠나 그와 함께 세상 구경을 시작한다. 이곳저곳을 누비며 일을 하던 중 러시아 무르만스크라는 곳에 잠시 머문다. 눈이 내리는 추운 계절, '겨울 궁전'에 기거하며 클래스 선장의 팅커벨인 벌새 이야기를 듣는다. 심장은 분당 1200번, 날갯짓은 초당 80번이지만 날갯짓을 멈추는 순간 10초 내에 죽는다. 날개는 8 자 모양으로 움직이는데 이는 무한대를 의미한다. 선장에게 벌새는 기적을 불러오는 영물이고, 그래서 자기 왼쪽 가슴에 예술로서 새겨 넣었다. 그곳에서 벤자민은 자기를 처음으로 사랑해 준 앨리자베스 애벗이라는 영국인 유부녀를 만난다. 그녀는 19살에 영국해협을 헤엄쳐 건넌 최초의 여성이 되고 싶었으나 도착점을 눈앞에 두고 기상현상으로 포기하였다. 그녀 역시 시간이 거꾸로 흘러주기를 바라는 한 사람이었다. 새로운 도전의 기회가 스스로 찾아와 주기를 기다리다 고귀한 젊음을 허비한 것이 얼마나 돌이킬 수 없는 실수인가를 깨달았으나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엘리자베스의 잠적으로 둘의 비밀스러운 사랑은 끝을 맺는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습격으로 벤자민의 예인선은 해병대에 징집요청을 받는다. 수리, 구조, 예인의 임무를 맡고 선원은 미 해군으로 임명된다. 벤자민은 자발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얼마간의 순항이 이어졌다. 일본 잠수함과 맞닥뜨리기 직전 불길함을 예감한 한 선원은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은 돈뭉치를 벤자민에게 건네며 그의 아내에게 전해줄 것과 가족에게 사랑한다는 말도 함께 부탁한다. 최후를 맞이한 마이크 선장은 문신으로 새긴 벌새가 총격으로 망가진 것을 한탄하며 마지막 말을 남긴다 "현실이 싫으면 미친개처럼 날뛰거나 욕하고 신을 저주해도 돼.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받아들여야 해."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죽는다.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사람의 가장 진실한 모습들이다. 가장 진실한 사랑, 그리고 받아들임. 이 두 가지는 또 다른 메시지를 우리에게 남긴다. 받아들이기 싫은 죽음을 맞이할 때 무엇이 가장 필요하고 무엇을 남겨야 할까? 바로 사랑과 내려놓음 아닐까?

그 후 집으로 돌아온 벤자민, 원래 나이 26세, 거꾸로 된 신체 나이 약 60세에. 세상 여행에서 지친 몸과 마음의 안식을 누릴 무렵 임종을 앞둔 친부가 나타나 출생의 비밀을 밝히고 유산을 남긴다. 그 후 우연한 기회에 데이지와 만나게 된다.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노년의 그는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결국 데이지를 떠나보내고 다시 자유롭게 방랑하던 중 데이지의 사고 소식을 접한다. 교통사고인데 그 사고가 있기까지 마치 사슬처럼 연결된 사건들이 나열된다. 만약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시발점이 된 지점으로 돌아가 사고를 원천봉쇄할 수 있었을 텐데. 삶이란 상호작용의 연속이며, 그것을 막을 방법은 없다고 한 대사는 진리이다. 인과관계가 명확하지만 그렇다고 인과의 고리를 끊을 방법이 인간에게는 없다. 마치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그러나 이런 아픔이 영 이별한 것 같은 데이지와 벤자민을 연결시켜 주었다면 또 뭐라고 해야 할까? 발레리나로서의 생명을 잃고 몸부림쳤지만 그녀의 외면까지도 담담히 받아 안고 그녀 곁을 끝까지 지킨 벤자민의 사랑이 결실하였다면 뭐라고 해야 할 것인가? 이런 것을 두고 동전의 양면이라고 하나? 이 장면에서 영화는 우리에게 또 다른 질문과 함께 희망을 안겨준다.

영화는 우리는 다시 시간의 흐름 속으로 이끈다. 둘이 하나가 된 때는 둘의 시간 직선이 정중앙에서 교차하여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가 되었다. 둘에게는 너무 젋어져 여드름이 나고 철 없어질 일과 늙어갈 일이 남았지만 서로에게 빚을 지고 갚기에 감당할 각오들이 되어 있었고, 하루하루 더없이 행복을 누린다. 그때 또 하나의 시간이 시작된다. 데이지의 딸 캐럴라인이 출생한 것이다. 따뜻한 가슴으로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다는 데이지와는 달리 벤자민은 냉철한 판단을 내린다. 여자 혼자 아이 둘을 키울 수는 없는 일. 그는 유산을 모조리 정리하여 데이지와 케럴라인에게 주어 편안한 삶을 보장한 뒤 종적을 감춘다. 사랑하지만 결코 가까이 가서는 안 되기에 먼 나라로 가서 이 일 저 일로 버티며 외로움을 달랜다. 그동안 데이지는 좋은 사람과 재혼하여 캐럴라인을 기른다. 평온하던 어느 날 그녀의 앞에 벤자민이 다시 나타났고 12살 된 케럴라인과 데이지, 그의 사랑하는 두 여인을 만난다. 그리고 둘의 비밀스러운 만남이 이루어졌다. 벤자민은 늙었다고 슬퍼하는 데이지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은 영원해."

시간과 함께 변하고 쇄하지만 영원한 것은 '벤자민'의 사랑이었다. 벤자민은 뒤돌아 가는 데이지에게 눈길을 떼지 못하지만 영원한 사랑으로 그녀를 보낸다. 소유권을 내세우거나 나만의 감정을 호소하며 그녀를 이기적이라 몰아세우지도 않는다. 오로지 그녀를 위해 줄 뿐이다.

시간은 더욱 흘러 벤자민의 신체는 소년이 되고 아기가 된다. 정신은 시간을 따라 치매에 걸리고 그토록 사랑하던 데이지도 잊는다. 너무도 슬프고 안타까운 시간 속에 있는 인간의 실체이다. 이 영화에서 아버지에게 버림받는 아기의 모습만큼이나 슬픈 장면이 바로 사랑하는 사람을 잊는 장면이 아닐까 한다. 시간은 이토록 냉정한 것이다. 이제는 데이지의 차례가 되었다. 그녀는 아기 벤자민이 자기 품속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보살핌으로써 사랑으로 감싸 안았다. 그리고 다시 데이지의 임종 장면이 이어진다. 한 인간의 교향곡 같은 인생의 끝을 알리듯 천둥 번개가 진동하고 사이렌이 울리며 사람들이 다급히 오간다. 폭풍은 절정에 달하고 창가에 벌새가 애처로이 날아들다 멀어진다. 벌새를 향해 데이지는 둘만의 사랑의 인사 'Good night, Benjamin.'을 남기고 눈을 감는다. 무한을 그리는 날갯짓을 하면서 폭풍 속을 뚫고 온 것은 벤자민이 아닐까? 벤자민의 무한의 사랑, 영원한 사랑을 가지고서. 그리고 데이지 또한 무한의 세계로 날갯짓을 시작하게 되었으리라.

영화의 끝은 홍수로 침수되는 저지대 창고 속 게토의 시계를 조명한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짧은 한 문장으로 낭독한다. 이런저런 인생이라 평범하기도 하고 조금 더 비범하기도 하고 때로는 1번도 맞기 힘든 벼락재앙을 7번이나 맞은 인생들이다. 그들의 삶은 시간과 함께 시작되고 마무리된다. 그리고 나에게도 물음을 던진다. 나의 인생은 어떠한가? 그 인생을 한 문장으로 말하여지면 무엇이 되겠는가? 시간과 함께 속절없이 흐르고 끝맺는 인생에서 무엇을 하고 있고 무엇을 남길 것인가? 이것이 아마 감독이나 작가의 물음 아닐까 싶다. 그것은 각자에게 달렸고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과제이다. 중요한 것은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인생은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것일 것이다.

영화에서 또 한 가지 우리에게 긴 여운을 남기는 것은 벌새이다. 분당 1200번씩 심장이 뛴다는 것은 그만큼 숨 가쁘면서도 열정을 다하는 사람의 심장을 가리키지 않을까? 초당 80번의 날갯짓은 그 짧은 시간이라도 잡으려는 듯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람을 말하는 것 아닐까? 무한을 그리는 날갯짓은 시간을 잡으려 하나 유한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궁극적인 염원이며 소망이 아닐까? 또한 모든 것이 변하는 세상에서 영원한 가치로 남을 수 있는 사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나타내지 않을까? 이런 가치와 열정에 상처를 입을 때 마이크 클라크 선장처럼 진짜 죽는 것이 사람이 아닐까? 폭풍같이 불가항력적인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고 사랑을 지키려고 날아드는 영물 중의 영물, 흐르는 시간 속의 영원한 가치는 바로 사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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