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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영화 감상문

by 소감행

봉준호 감독의 예술성과 창의성으로 아카데미 4관왕이라는 쾌거를 거두었다.

그래서 그의 다른 작품도 보고싶어졌다. '마더'라는 작품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다, 내가 들은 의견들은 부정적인 것들이 많았다. 무섭다던가, 모성애를 왜곡시켰다던가 등등. 그래서 볼 엄두를 내지 않았었는데 이번에는 호기심과 용기가 났다.

그런데 결과는 너무도 진한 감동이었다. 굉장히, 어쩌면 기생충보다도 더 예술성이 있는 것 같다.

영화 내용은 이렇다.

읍내에사 약재상을 하는 엄마는 지적 장애가 있는 아들 도준과 살고 있다. 엄마의 삶은 온통 아들에게 집중되어 있다. 언제 어디에서 사고를 칠 지 모르는, 물가에 내놓은 아기를 둔 엄마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에서는 이 아들이 다니면서 친 사고, 그것을 해결하려는 엄마가 나온다.

어느 날 아들은 길거리에서 뺑소니 사고를 당한다. 엄마는 뛰쳐 나갔지만 달려갔지만 머리만 부족했지 다리는 멀쩡해서 뛰어가는 아들을 놓친다. 도준과 함께 차를 찾아 골프장으로 간 친구 진태. 그곳에서 그는 도준에게 하나의 불씨를 놓는다. '여자랑 자봤어?' 머리가 부족해도 본능은 살아있는 청년 도준, 그리고 자존심이 살아있는 인간 도준에게는 중대한 도전장이 된다. 도준은 엄마랑 잔다는 의미심장한 말도 남기며, 앞으로의 사건을 이어가는 둥글둥글하나 딱딱한 물건, 골프공을 열심히 주워 자기 이름을 새겨 넣는다. 여차저차 진태는 고의로 백미러를 부수고 싸우다 함께 경찰서로 간다. 그러다 오히려 도준에게 누명을 씌우고 보상금까지 물게 만든다. 진태는 다시 골프장으로 가서 골프채 하나는 훔쳐 자기 집 옷장에 숨겨둔다. 엄마는 경찰서에서 보상금을 무러주고 아들을 찾아 집으로 옴으로써 영화 속 첫 사고를 해결한다. 여기까지는 그냥 스토리이다.

얼마 후 도준은 술집으로 가서 만취하도록 술을 마신다. 그리고 진구가 말한 여자에게 집착하기 시작한다. 술집의 딸에게 다리가 예쁘다며 술값으로 골프공을 내밀다 거지처럼 쫓겨난다. 진구의 자존심은 여전히 살아있어 남은 골프공을 집어던진다. 그러다 여고생을 만나 뒤를 쫓는다. '여자'이기 때문에. 그 여고생은 할머니와 어렵게 살아가는 소녀가장 문아정이다. 보기만 해도 음산한 재개발지역 같은 곳에서 어두운 골목길에 있는 두 사람. 소름돋게 무섭다. 그리고 예상대로 무서운 일이 벌어진다. 다음 날 보니 여고생은 그 집 옥상 난간에 걸쳐져 죽어 있었다. 어느 사이코 패스가 여고생을 잔인하게 죽이고 보란 듯이 사체를 유기한 것이다. 경찰은 장소와 시간과 도준의 이름이 적힌 골프공과 목격자의 진술로 도준을 용의자로 체포한다. 마을에는 슬픈 장례식이 치러지고, 도준의 엄마는 장례식에 가서 조문하려다 오히려 비난을 받는다. 내 아들이 그러지 않았을 거라는, '마더'로서 할 말을 했기 때문이다. 여기부터는 범죄스릴러가 된다.

엄마는 아들의 무죄를 확신하고 변호사를 통해 입증하려고 하지만 의지 없고 방탕한 변호사에게 희망을 일찌감치 버린다. 대신 스스로 범인을 찾으려고 한다. 교도서에 있는 아들을 찾아가 뭐라도 기억해 보라고 간다. 그러면서 '저주받은 관자놀이' 라는 것을 하게 한다. 관자놀이를 문지르면 사라진 기억이 되살아난다면서. 먼저는 불량스러운 친구 진태를 지목한다. 그리고는 진태의 집에 잠입하여 수색하던 중 빨간 자욱이 있는 골프채를 발견한다. 진태와 여자친구가 들어와 난잡한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숨어 기다리다 아슬아슬하게 현장을 빠져나와서는 정신 없이 앞을 향해 걷는다. 그녀의 머릿 속은 혼란스럽고 스산한 바람에 흩날리는 파마머리는 더욱 혼란스러우며, 그녀의 어꺠에 걸쳐진 골프채와, 증거물 보전을 위해 씌운 비닐장갑 또한 바람에 스산한 소리를 내며 흩날린다. 깊이 진지하나 깊이 웃겨 진지할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아무 전문지식 없는 '마더'의 첫 도전인 것이다. 결국 빨간 자욱은 진태 여친의 립스틱 자욱이며, 진태에게 위자료만 물어준다.

첫 실패에 굴하지 않는 '마더'의 집착력은 대단하다. 숨진 문아정의 휴대폰을 가까스로 찾아낸 엄마는 그것을 들고 교도소에 있는 자식을 찾아간다. 아들은 엄마의 말대로 '자주받은 관자놀이'를 열심히 문지르며 교도소 생활을 재미있게 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바보짓을 보며 재소자들이 바보라고 비웃자 '바보라고 무시하면 참지 않는다.한 대 맞으면 두대 깐다!' 라는 '마더'의 가르침을 실천한다. 그러다 더 심하게 얻어 맞고, 그참에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엄마가 어릴 적 자신을 죽이려고 농약 탄 박카스를 먹인 일을 기억한 것이다. 엄마는 아목손이라는 독한 것을 타지 않아 아들이 죽지도 않고 바보만 된 것이었다. 아들은 얻어 맞은 한 쪽 얼굴을 손으로 가르고는 멀쩡한 반쪽 얼굴로 엄마를 또렷이 보며 다시를 찾아오지 말라고 소리지른다. 이는 아들의 내면을 잘 말해주는 장면이다. 바보이나 완전한 바보는 아닌. 기억을 못하나 완전한 기억상실은 아닌. 상처와 아픔을 무의식 속에 가지고 있을 수 있으며, 언젠가 떠올려 고통을 겪는 우리 보통 사람들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봉준호 감독은 우리들에게 무언가 묻는 듯 하다. 기억을 가지고 고통 속에 사는 멀쩡한 우리가 더 나을까, 아니면 기억을 잃고 세상 아픔이 없이 겉으로 보이는 바보로 사는 것이 더 나을까? 엄마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리고는 과거를 잊어버리도록 혈자리를 다급히 알려준다. '마더'의 결정은 후자가 아닐까 한다. 차라리 바보가 되라고.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자주받은 관자놀이 놀이'라고.

이런저런 어려움을 뚫고 엄마는 현장에 있던 할아버지를 찾아간다. 할아버지에게 봉사하려고 왔다고 하면서. 그 때 할아버지는 최근에 본 놀라운 사건으로 심장이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역시나 모든 아픈 기억을 잊게 해주는 혈자리에 침을 놓아드리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목격담을 말하게 된다. 할아버지는 사건 당일 현장에 있었다. 연고가 없이 외딴 곳에서 고물상을 하나 폐가를 발견해 나름의 캠핑을 즐기려던 찰나 한 여학생이 거기로 숨어들고 도준이 뒤따르는 것을 본다. 숨죽여 상황을 보고 있었다. 아무리 원조교제를 하던 여학생이더라도 바보남자는 싫었던지 그 '여자'는 도준을 '바보새끼'로만 보고 돌을 던진다. 역시 엄마가 가르쳐 준 규칙을 준수하는 도진, 받은 돌을 다시 던졌더니 여학생을 머리를 맞고 죽는다. 전화도 안 되고 어찌할 지 모르는 도준은 여학생을 누구라도 보고 도와주라고 옥상으로 끌고 올라가 난간에 걸쳐놓는다. 그리고는 잠자는 엄마, '여자' 옆에 웅크리고 잔다. 결국 그를 받아준 여자는 엄마 뿐이었다. 사람을 죽이고도 어쩔 줄 모르는 바보, 누구도 받아주지 않는 장애인, 그래도 엄마에게는 세상 소중한 보물이고 곁을 기꺼이 내어주는 존재이다. 이 사실을 듣자 엄마와 할아버지 사이에 진실공방이 이어지고, 사실을 알리려고 할아버지가 신고전화를 하려던 차에 엄마는 손에 잡히는 연장을 들고 할아버지 뒤에서 가격하기 시작한다. 내 아들은 아니라고 하면서. 엄마의 얼굴에는 피가 튀었지만 차분히 피를 닦고 현장에 불을 지피면서 증거를 인멸한다. 그러고는 스산한 바람이 몰아치는 억새풀 사이와 숲을 지나 집으로 돌아온다. 이로써 아들의 둘째 사고를 '마더'로서 해결한다.

집으로 돌아와 뜻밖에도 사건담당형사를 다시 만난다. 엄마의 비극이 시작되나 싶었는데, 시청자를 깜찍하게도 속이는 재치라고나 할까? 사건의 진범이 잡혔다고 한다. 종팔이라는 또다른 장애인이다. 그에게서 아정의 혈흔이 발견되었는데 사실 아정이의 코피를 닦아주었던 선행의 결과이다. 엄마는 그 아이를 구지 면회해서는 자기 아들이 진범임을 앎에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냥 너는 엄마가 있는지만 되묻는다. 엄마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그의 인생을 확인하듯이 말이다. 엄마의 선택은 정의가 아니라 자식이기 때문이다.

모든 삶이 다시 안정을 찾고 엄마는 마을 부녀회와 함께 관광을 간다. 도준은 엄마를 위해 이것 저것 사설 비닐봉지에 넣어 챙겨준다. 엄마가 지킨 자식이 이렇게라도 보답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엄마가 할아버지를 죽인 현장에서 두고 온 침통을 내밀며 아무 데나 두고 다니지 말라고 챙겨준다. 엄마는 넋을 잃는다. 아들은 엄마와 할아버지와 침과 자신과의 관계를 모르고 단지 엄마의 소장품이 고물상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일러주는 것일 뿐이었을 텐데도. 다 잊으려 했던 것이 되살아나 엄마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앞으로 아들이 어떤 사고를 더 칠 지 기억과 함께 상상이 엄습한다. 관광버스 안에서는 오락소리 춤사위가 어지럽다. 차분히 앉은 엄마는 모든 기억을 잊는 혈자리를 찾아 침을 놓는다. 그리고는 두 손을 들고 흔들며 다른 엄마들 사이에 섞여 들어가 춤추기 시작한다. 화면이 한참 떨린다. 그러나 고요하다.

다시 엄마는 춤을 춘다. 할아버지를 살해하고 돌아오는 길 메마른 억세풀 밭에서 춤을 춘다. 그리고 눈을 가린다.

모든 장면이 지나간 후 관객의 마음도 같이 고요하고 떨리고 춤추듯 요동을 친다.

시사점은 이런 것 같다.

하나. 기억에 대해서...사람은 누구나 고통스러운 기억을 안고 산다. 그런데 고통스러울 수록 기억을 선명하여 숨쉬는 동안 항상 괴롭힌다. 그것을 잊도록 해주는 혈자리와 잊게 해주는 의사가 있다면 아마 요즘말로 대박 칠 것이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기억을 못하는 아들이 기억해야만 하는 아이러니에 처하게 된다. 아니 아들은 기억하지 말아야 하지만 초보 수사관 엄마로서는 그 아들의 기억만을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저주받은 관자놀이'라고 한 것 같다. 할아버지는 결국 기억해내다 살해를 당한다. 기억과 망각이 선택적이라면 전자나 후자나 우리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그러한 선택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봉준호 감독은 이러한 인간의 현존을 날카롭게 짚고 넘어가며 우리에게 만일 그런 선택지가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 묻고있다.

둘. 마더에 대해서...엄마는 자식을 사랑한다. 이런 자식 사랑은 숭고한 사랑, 희생적인 사랑이라고들 칭송하고 미화한다. 그런데 현실을 직시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자식을 구타하거나 심지어 살해 유기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런 경우는 범죄자에만 국한된다 하더라도 일반인에게도 비뚤어진 모성애가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학교폭력의 사태만 보더라도 자식이 잘못한 것을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용서를 대신 비는 그런 모성은 찾아보기 힘든다. 오직 내 자식만을 보이고, 내 자식이 잘못을 했어도 무조건 덮을 뿐 아니라 전가시키기에 급급하다. 심지어는 금력 권력도 동원하고, 약자에게는 더욱 가혹하게 대한다. 다 내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서는 된다 안 된다를 떠나서 그냥 내 자식을 지켜야 하기에. 이것을 누가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봉준호 감독은 관객에게 맡기는 것 같다. 마지막 장면의 오랜 떨림은 아마 자식을 감쌀 수 밖에 없는 엄마의 갈등, 모든 이의 갈등은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셋. 예술성에 대해서... 예술이란 두 말 할 것 없이 아름다움이다. 장면장면은 명화의 한 장면들이다. 배우들의 표정은 마치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듯 생생하다. 배경과 색은 아름다움과 음울함을 묘하게 조화하고 있다. 인간의 모순된 본능을 이렇게나 아름답게 승화하여 나타낼 수 있다니 놀랍다. 예술이란 또한 인간 자체이다. 어떤 위대한 영웅도, 고매한 여성도, 뛰어난 탐정도 없고 그냥 인간인 '우리'를 그렇게 잘 표현하고 있다. 날카롭게 꼬집지만 동시에 연민해 주기에 공감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예술이란 또한 천재성이기도 하다. 봉준호 감독의 떨리는 창의성과 천재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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