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문
전람회 · 기억의 습작 · 1994년
이용주 · 건축학 개론 · 2012년
대학시절 한 수업에서 조각작품을 한 학기 동안 완성하여 제출하는 프로젝트가 있었다. 지금 그 작품은 남아 있지 않지만 제목이 '시간의 향기'였고, 나의 기억 속에는 남아 있다. 어떤 주제로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 몰라 고민하던 중 지나가던 길에 버려진 괘종시계를 발견하였다. 한가운데 덩그러니 매달린 시계추가 햇빛을 받으며 반짝이고 있었는데, 무엇에 이끌린 양 그것을 떼어서 작업실로 가지고 왔다. 그리고 시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추억이라는 것과 연결지은 작품을 시작하였다. 대학 시절 어린 생각이었을지라도 시간의 향기는 맡을 수 있었나 보다. 현실은 아프고 정돈되지 않은 것이지만 시간이라는 마법의 추 아래에서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변모한다. 우리 모두는 그러한 마법 속에 살아가고 있고, 각자의 가슴에 아름답게 묻어두고 있는 것이다. 특히 순수한 가슴으로 만든 기억일수록 더욱더... 현실이 아플수록 더욱더... 첫사랑에 관한 기억일수록 더욱더... 이베스 로베르트 감독의 '마르셀의 추억'이라는 영화가 그토록 가슴을 울리는 이유도, 이용주 감독의 '건축학 개론'이라는 영화가 이토록 아름다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영화 속에 흐르는 '기억의 습작'이라는 노래의 음은 가슴속에 간직한 흐릿한 기억을 소환하는 마법의 소리이다. 그리고 다시금 기억을 떠올리라고 주문을 외운다.
이젠 버틸 순 없다고
휑한 웃음으로 내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았지만
이젠 말할 수 있는 걸
너의 슬픈 눈빛이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걸
나에게 말해봐
너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볼 수만 있다면
철없던 나의 모습이 얼만큼 의미가 될 수 있는지
많은 날이 지나고
나의 마음 지쳐갈 때
내 마음속으로 스러져가는 너의 기억이 다시 찾아와 생각이 나겠지
너무 커 버린 내 미래의 그 꿈들 속으로
잊혀져 가는 너의 기억이 다시 생각날까
··········
그 꿈들 속으로
그 속으로
너에게
첫 번째 건축물, 정릉의 낡은 빈 집 : '건축학 개론'이라는 제목인 만큼 이 영화는 건축으로 시작하여 건축으로 끝을 맺는다. 건축학 개론 강의는 둘의 사랑을 싹 틔우고 키우는 중매자 역할을 톡톡히 한다. 첫 시간, 몸담고 사는 서울시를 알아보자는 의미로 지도에 통학경로를 표시하는데, 건축학도 이승민과 음대생 양서연의 운명적인 사랑이 시작된다. 둘은 같은 동네 정릉에서 같은 통학로를 다니고, 같은 곳에서 과제를 하며 친해지기 시작한다. 우연히 발견한 빈 집에서 소꿉놀이?를 하며 재미나게 논다. 그곳은 그들만의 사랑을 꽃피운 추억의 집이다. 가난한 대학생이라 대단한 것은 주지 못하지만 자기 노트를 깔개로 제공하며 호의를 베푼다. 최고의 사랑의 표현이었다. 다음 만남을 위해 서연은 집을 깨끗이 정돈하고 늦가을이지만 화분에 꽃을 심는다. 둘의 사랑이 깊어진 어느 날, 고백의 장소로 정한 승민이 첫눈 온 날 만나자는 운을 띄우지도 못하자 그의 사랑을 알아챈 서연이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한다. 그러나 그 사이 둘의 관계는 끝이 나고 서연은 첫눈을 맞으며 쓸쓸히 기다리다 '기억의 습작' CD와 플레이어를 남겨두고 떠난다. 먼 훗날에 그곳의 꽃은 피지 못했지만 서연이 남겨둔 선물을 승민은 찾아가서 간직한다.
두 번째 건축물, 서초동의 오피스텔 : 서연은 방송부 서클 선배이자 건축학도인 키 크고 잘생기고 돈 많은 서초동 남자 재욱을 흠모한다. 재욱은 대학생임에도 자가용이 있고 개인 오피스텔을 작업실로 소유할 만큼 금수저이다. 그러나 그의 집을 묘사하는 장면은 일말의 정감이 가지 않는다. 여학생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만들고 업은 다음 침대에 눕히고 욕구를 채우는 공간에 불과한 곳, 아직 앳되지만 곧 변신할 서연을 데리고 오려고 노리는 곳이다. 무엇보다 승민과 서연의 순백한 사랑을 훼방하는 빌런이 터 잡은 곳인 것이다.
세 번째 건축물, 어머니의 집 : 어머니는 남편을 여의고 시장에서 순대국밥집을 하며 억척스레 자식을 키운다. 여성으로서 우아함이나 고상함은 잃은 지 오래고 억척스러운 생존력만이 남은 어머니, 냉장고도 깔끔하게 정돈하지 못하고 집에 화분 하나 놓을 줄 모르는 어머니, 아들의 첫사랑과 고뇌는 당연히 이해 못 하는 어머니가 사시는 지긋지긋한 낡은 건축물이다. 그는 어머니에게 함부로 대하며 대문을 박차고 나가기 일쑤인 생활을 결혼 전까지도 하고 있다. 그에게 이 집은 지겨운 곳이지만, 어머니는 30년을 넘게 산 곳이고 죽음까지 맞이할 곳으로 생각한다. 좋은 집이나 아파트가 의미가 없다. 어머니의 말대로 '집은 그냥 집'이다. 한평생 몸을 기대고 살다 죽음까지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기에 결코 떠나지 못하는 그런 집인 것이다. 승민에게는 어머니만큼이나 벗어나고 싶지만 또한 어머니만큼이나 애정이 묻은 집이다.
네 번째 건축물, 서연의 제주도 집 : 서연은 죽음을 앞둔 아버지를 지극하게 간호한다. 아버지와의 이별을 앞두고 다시 찾았을 때 추억이 하나씩 떠오른다. 아버지가 그녀의 성장을 기록하면 붉은 벽돌담, 어린 그녀의 발자국이 찍힌 수돗가 등. 이제 아버지의 여생을 위해 싹 다 밀어버리고 재건축을 하기 위해 건축사 팀장인 승민을 찾아간다. 승민은 건물 디자인을 설명하며 세련된 건축물을 제안하지만 서연은 결국 정이 가지 않는다며 거절한다. 증축으로 방향을 돌려 시공을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서연은 승민에게 약혼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어쩌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다는 마음을 접는다. 그리고 건축 과정에 위험을 무릅쓰고 자재를 나르며 함께 한다. 한 순간 한 순간이 그와 함께 할 수 있어서 소중하다. 승민은 그녀의 추억들을 훼손하지 않은 채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난관을 극복하며 집을 완성해 간다. 집을 완공하고 마지막으로 서연과 승민은 꽃을 심는다. 무슨 꽃인지. 봉오리만 있어 피어나지 못한 꽃이다. 15년 전 그녀가 빈 집에서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은 꽃이 '작은 설렘을 가지고 봄을 기다리며' 피어나기를 바랐건만 봉오리만 맺히고 결국 피어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집은 완성되었다. 마치 피어나지 못한 둘의 사랑처럼 말이다. 둘은 그 집에서 마지막 만남을 기념한다. 그리고 서로의 사랑을 이제사 고백한다.
"너 옛날에 약속했었잖아. 나 집 지어 준다고. 기억 안 나? 말해봐. 너 그때 왜 나한테 잘해줬었어?"
"...... 너를 좋아했었으니까."
"고백이야? 오래도 걸렸네. "
"알고 있었어?"
"내가 바보냐? 그걸 몰랐을까. 너 나한테 키스도 했었잖아. 나 자고 있을 때. 그거 내 첫 키스였는데."
"너무 늦었다. 그만 가야겠어."
"어, 그래."
"갈게."
"그래."
"아, 이것 좀 옮겨주고 갈까?"
"아니야, 내가 나중에 할게."
"몇 개 안 되는 데 뭐. 이거 어디에다 놓으면 돼?"
"아니 괜찮아. 내가 하면 돼."
대학 때 서연이 승민에게 지어주라면서 그렸던 집 그림과 승민이 서연에게 선물하려고 만든 집 모형을 발견하고는
"왜 날 찾아온 거야? 집 지어줄 사람이 그렇게 없었어? 이제 와서 굳이 왜 나한테, 나한테 뭣땜에, 왜? 어?"
"궁금해서."
"뭐?"
"너 어떻게 사는지, 지금은 어떤지 궁금했어."
"그게 이유야? 그냥 궁금해서, 그게 다야? 그래서 이딴 거 지금까지 갖고 있는 거야?"
"그래, 그래서 갖고 있었어. 내가 이거 갖고 있으면 안 돼? 나는 네가, 니가 내 첫사랑이었으니까 흐 흐 흐 "
그리고는 눈물로 얼룩진 모습으로 키스를 한다. 빈 정거장에서 어설픈 첫 키스가 아닌, 납뜩이가 설명한 그런 키스로. 승민은 결혼하여 미국으로 떠났고 아버지와 함께 집에서 살고 있는 서연에게 소포가 도착한다. 그것은 승민이 간직한 CD와 플레이어이다. 승민도 첫사랑을 소중한 간직했던 것이다.
이 집은 사랑의 추억을 소환하고 완성한 집이다. 서연에게 한 약속을 지킨 승민의 사랑이 곳곳에 깃든 집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둘만의 공간을 결코 될 수 없는 집이다. 완성된 후 둘러보는 승민의 눈길 속에는 둘이 함께 할 안방, 서연을 위한 피아노방, 둘의 자녀들이 살 이층 방, 가족이 함께 지낼 부엌과 거실과 마당과 옥상이 하나하나 소중히 스친다. 그러나 결코 현실이 될 수 없어 더욱 아련한 공간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이렇게 이룰 수 없는 소망과 그러기에 더욱 아프고 아련한 사랑이 있을 것이라고 감독은 말하고 있는 듯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나 아름다운 영화이다. 감독의 소망에 기대어 나 또한 현실을 잊고 잠시나마 시간을 거슬러 추억에 잠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