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올케에게 쓰는 편지

누군가는 끝내 웃으며 버텨야 했다

by 진주아지매

처음 어머니께 인사하러 오던 날이 생각나네.

예쁘장한 모습에 순하게 웃던 첫인상이 좋았어.

그래서만은 아니었어. 우리 식구에게 올케는 그 어떤 모습이었어도 환영받았을 거야.


그저 외모만 훤칠할 뿐 철이 없는 막냇동생과 살아갈 여자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할지 우리는 예상이 되었기 때문이야. 동생과 오래오래 살아주기만 하면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던, 그때 그 마음을 어머니와 나는 세월이 한참 지나도록 얘기하곤 했지.

*

그렇게 20년이 흘렀고, 왜 이렇게 온몸이 가렵냐며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자꾸만 긁어대시던 어머니 얼굴이 노랗게 황달로 변하며 청천벽력같은 말기암 진단이 내려졌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에 우는 것은 잠시뿐이었지. 이름난 서울의 대학병원을 찾아가고 암전문병원도 찾아다니며 갈수록 확실해졌던 건 어머니를 치료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고, 우리가 처한 현실은 4형제가 번갈아가며 간병을 해야 한다는 거였지. 게다가 더 이상 치료방법이 없으니 퇴원하라는 병원의 결정에 다시 집으로 돌아오신 어머니가 지내야 할 방은 당장 수리를 해야 할 만큼 형편없었어.

오래된 옛날 집을 40년 가까이 지키고 사셨던지라 봄에도 한기가 느껴지는 그 방에서 추위를 많이 타는 어머니는 겨울이면 늘 소쿠리를 머리에 쓰고 주무셨는데 말기암 환자가 되신 분을 그 추운 방에 모실 수는 없는 일이었잖니.

두 달 가까이 걸리는 공사를 하기로 결정하자 당장 어머니의 임시거처가 문제였지. 절실하고 열성적이던 형제들이 병구완에 조금씩 지쳐갈 때쯤이라 누구도 선뜻 어머니를 모시겠다 나서지 못하던 때 동생이 그랬지.

"집사람이 모신다 카네요. 엄마, 우리 집에 와 계세요."

"너거 집에? 내가 가 있어도... 되겠나?"

"불편하지만 않으시면 나는 엄마가 오시는 게 더 좋아요."

올케 눈치가 보여 오빠도 감히 모시겠다 못하는데 그렇게 말해주던 동생과 작은 올케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

더구나 서울에서 17년간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내고 귀향하여 가정주부가 되겠다 선언한 남편을 대신하여 가장이 되고 주 6일을 출근해야 하는 회사에 다니는 올케였기에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결정인지도 너무나 잘 알 수 있었어.

올케네서 지내던 두 달간, 어머니는 말씀하셨어.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내 먹으라꼬 나물을 매일 두 가지씩 만들어놓고 일곱 시에 출근한다 아이가. 저녁에도 일곱 시가 넘어야 퇴근하는데 얼굴 찌푸리는 걸 못 봤다. 늘 헤헤- 웃고 짜증 한 번 안 낸다. 오히려 막내 녀석이 지 마누라한테 툴툴거리고는 하지."

**

올케는 그런 사람이었어.

가시는 날까지 마음을 다해 모신 올케와 동생 마음을 나는 알아.

서울과 창원 먼 곳에 거처하는 오빠와 언니는 자주 올 수 없었고 직장에 다니는 나도 저녁시간밖에는 병구완을 할 수 없었으니까.

두 달간의 집수리 기간이 끝나 어머니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셨지만 충격으로 십 년은 더 늙어버린 아버지뿐인 어머니 곁을 동생은 자주 드나들며 다시 지켜야 했지. 그런 와중에 아이 챙기고 회사 다니느라 올케가 얼마나 힘들었을지도 난 알 수 있어. 동생과 올케, 두 사람 덕에 어머니는 남의 손 한번 빌리지 않고 5개월을 계시다 가실 수 있었던 거야.

어머니 장례를 치른 후 우리 4형제는 각자 자기 자리로 돌아가 예전의 삶을 찾으려 노력했고 그렇게 무사히 일 년이 흘러가나 했지.

하지만 갑작스런 동생의 암 발병 소식은 청천벽력같았지.

다시 서울의 유명 병원을 알아보고 림프절까지 전이되었다는 선고만을 받아들고 돌아와야 했을 때 그 기막힌 마음을 도대체 어떻게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겠니.

남편만큼이나 홀쭉해진 올케의 모습에 그만 눈물이 차오르고 말던 그날, 올케는 퀭해진 눈으로 그래도 웃어 보였지. 저는 괜찮아예- 라며.


사람이란 게 그렇더라. 절망 앞에서도 살아 있는 한 사람은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거지.

시커멓게 타들어간 얼굴로 동종 환우들의 카페에만 눈을 박고 있는 남편에게 밥상을 차려놓고 올케는 또 아침 일곱 시면 회사로 출근을 해야 했지. 고개를 수그리고 구부정한 자세로 정수기 부품을 조이고 감고, 하루 10시간이 넘는 노동으로 팔목과 어깨는 퉁퉁 부어 있었지만 가장이었던 올케는 단 하루도 그 일을 쉴 수 없었던 거야. 가족의 생활비와 동생의 병원비까지 올케의 지갑에서 나와야 했지.

남은 우리 3형제가 해줄 수 있는 건 20년 넘게 모아놓은 곗돈 통장과 퇴직금의 일부를 털어 건네주는 게 다였어. 하지만 그것만이라도 할 수 있어서 우린 감사했어. 형이라고 누나라고 있어 봐야 두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게 그것 말곤 아무 것도 없었거든.

작은 올케.

까탈스런 동생 만나 평생 고생하면서도 웃음 잃지 않고 살아준 것 어머니는 늘 알아주셨단다. 얼마나 힘들지 내 다 안다- 말씀하시곤 했지.

어머니는 가셨지만 올케 그 고생, 그 마음을 이제는 내가 안단다. 눈물 나게 힘들고 고달픈 삶인데도 헤헤 웃으며 괜찮다는 말 한마디 하며 죽을 힘을 다하고 있다는 거 내가 알고 있단다.

젊은 시절엔 동생 비위 맞추느라 동동거렸는데, 중년 들어서는 동생이 벗어버린 가장의 짐까지 짊어지고 만 올케,

그 위에 암이라는 불치병에 걸린 남편 살리겠다고 연차며 월차며 닥치는 대로 내어 사방팔방을 뛰어다니다 또 회사에 출근해 고된 노동을 해야 하는 나의 올케.

***

오늘도 큰 수술을 끝낸 동생 곁에서 여름휴가를 다 쓰고 있는 중이구나.

간병하는 사람이 제대로 잘 챙겨 먹어야 한다는 나의 말에 '잘 먹고 있어예~' 대답하는 그 목소리가 너무 애처로워서 전화를 끊고 난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미안하다. 지금쯤은 행복해야 할 때이건만 세상 최악의 고통과 마주서게 해서 미안하다.

그저 이렇게 편지로밖에 내 마음 보낼 수 없지만, 내 동생의 부인으로 살아줘서 내 어머니의 며느리로 살아줘서 너무 고맙다.

작은 올케,

힘내자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우리 앞에서 주저앉지 않고 일 년이 넘도록 기운내어 줘서 너무너무 감사하다.


23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