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졸업>에 대한 우려
드라마 <졸업>은 제목부터 의미심장했다.
졸업은 여튼 학생들과 연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졸업이란 제목을 붙여놓고 선생과 제자의 로맨스니 금단의 사랑이니 하는 떡밥을 미리 투척하는 건 상당한 호기심을 유발한다.
스물넷부터 30여년을 쉬지 않고 학교에 몸담아온 나로선 그 제목이 굉장히 원색적이었다.
이거 위험한데... 느꼈지만 학교가 아니라 학원에서 벌어지는 학원강사와 학원수강생의 이야기라 해서 일단 안심했다.
하지만 뭔가 원색적인 그 드라마에 생긴 호기심은 어느 일요일 아침 불이 붙었다.
주말이라도 쉬지 않는 남편 덕(?)에 적어도 6~7시면 기상하는 습관이 붙어 있어 비몽사몽간에 남편을 배웅하고 다시 소파에 앉아 TV를 켰더니 마침 드라마 졸업 방영 중이었다.
문제의 장면은 학교 교무실에 찾아간 스타강사 여주인공이 중간고사 시험을 출제한 국어교사와 면담을 하는 데서 시작됐다.
학원강사인 여주인공은 시험문제를 출제한 국어교사에게 끊임없이 문제의 오류를 설명하고 있었다.
국어교사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교무실의 시선은 모두 두 사람에게 집중되는 가운데,
"저기 ○○선생, 여기서 이러지 말고 저쪽으로 가서 얘기하는 게 어때요?"
교무실의 누군가 말하자 국어교사는 딱 자른다.
"아뇨! 여기서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러자 스타강사는
"저쪽으로 자리를 옮기시죠?"
"여기서 하면 안 될 이유가 있습니까?"
"여기서 계속하면 선생님 입장이 곤란해질 거 같아서요!"
"내가 왜요?"
"낡았잖아요!"
"뭐요
"낡았어요 문제가! 아시잖아요 선생님도! 요즘 수능엔 상징이니 표현법같은 거 출제 안 해요! 물론 학원에서도 상징과 비유, 표현법 가르쳐요. 여전히 학교 현장에선 선생님처럼 그런 문제를 출제하니까요!"
드라마에서 그 대사를 듣고 있는데 소름이 끼쳤다.
학원강사가 주동인물이니 자연스럽게 학교교사가 반동인물이 되는 전개였다.
국어교사 30여년 경력을 가진 내가 보면서도 왠지 주동인물인 학원강사 편이 되고, 반동인물인 국어교사에게는 적개심이 생기려는 찰나였으니까.
스타강사는 재시험을 요구하며 교무실을 떠났고, 결국 국어교사는 재시험을 결정했다.
드라마 속 국어교사는 과연 잘못된 것일까?
교과서로 학생을 가르치고, 가르친 대로 시험에 문제를 출제했다... 근데 학원 강사가 와서 낡은 문제라며 재시험을 요구한다?...
가만히 있을 사람은 없다. 실제 그런 일을 당했을 때 드라마 속 국어교사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재시험을 결정한 국어교사의 대응은 교과서에서만 시험 출제를 한다는 것이었다.
드라마에선, 학원 측 발등에 불이 떨어지는 건 물론이고 학교에서조차 학부모의 압력을 의식하여 교과서 위주 출제를 막으려고 애를 쓰는 행태를 보인다. 하지만 이건 오버다.
그 정도로 심하게 학부모를 의식해서 학원에서 보충해 줄 수 있는 문제를 출제하라고 요구하는 학교는 없다.
아무리 드라마라고 해도 그건 학교와 교사에 대한 모욕이 아니었나 싶다.
내가 다시 드라마 졸업을 본 건 역시 주말 아침이었다.
사제출격이란 원색적인 용어와 함께 수강생 유치를 위해 여주와 남주가 무료강의를 한다는 설정이었다.
무료강의에 찾아온 건 경쟁학원에서 정찰병으로 보낸 딱 한 명의 학생뿐이었다.
한 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여주는 강의를 시작했고, 박완서의 '카메라와 워커'를 수업교재로 사용했다.
이 장면에서 난 감동했다.
가르치는 방식이 정말 좋았다.
강사는 칠판에 박완서의 출생에서 사망까지 기간을 쓴다.
'박완서 1931 - 2011'
"박완서 선생이 살았던 이 시기를 보면 뭐가 생각나니?"
"광복과 전쟁이요."
"그렇지? 박완서 선생이 경험했을 법한 대사건들 몇 가지가 딱 보이지. 광복과 전쟁, 근대화같은 것들 말이야. 이런 사회적인 변화가 가지고 온 인간사의 부조리나 병폐가 선생이 쓰는 글의 소재가 되는 거지. 유식한 말로 전쟁과 분단의 상처. 유년시절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선생의 어머니까지."
"음."
"선생이 어린 시절 아버지가 맹장염에 걸리는데 그 정도는 치료할 수 있는 시기였지. 하지만 무당과 푸닥거리에 의존하다 악화된 아버지를 달구지에 싣고 읍내에 가지만 결국 죽고 말아. 이때 가장 충격받는 사람이 누구겠니?"
"아내요."
"그래. 아내 즉, 선생의 어머니지. 원래 교육열이 높았던 어머니는 그 후 기를 쓰고 자식들을 도시로 보내 공부를 시키려고 하게 되는 거야. 자아~ 어머니는 누구와 닮았지? 바로 박완서 선생의 카메라와 워커의 어머니와 연결되지!"
잘 가르친다 싶었다.
문학 교과서나 수능 지문에서 박완서의 글은 자주 등장한다. 그래서 누구보다 열심히 책을 읽고 줄거리를 전달하면서 독서퀴즈대회를 열기도 했지만 생존 연도를 칠판에 쓰면서 동기유발할 생각은 못했다.
훌륭한 도입부였다.
내가 추구하는 수업방식이나 목표와도 흡사했다.
그런데 이 드라마가 교육에 대해 고민하는 드라마는 아니라는 점이 나를 우려케 한다.
학원 강사와 수강생의 십 년 뒤 만남과 사랑 뭐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모양이다.
거기에 학교와 학원의 갈등은 왜 등장한 것인지 모를 일이다.
그것이 교육현장에서 뛰는 교사와 학원강사가 적대적인 상대라는 걸 각인시키는 장치로 사용된다는 게 안타깝다.
학교와 학원은 적대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공생관계다.
나는 새 학년이 시작되는 3월 첫 국어시간이면 반드시 이 말을 하곤 했다.
"나는 중간층을 상대로 수업을 합니다. 상위권이라면 수업내용이 쉬워 시시하다는 생각이 들 테고 하위권이라면 어려워 따라가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 겁니다. 그래서 참고서나 문제지 하나쯤은 꼭 필요하지요. 교과서 내용을 다 이해한 학생이라면 자신의 발전을 위해 더 높은 단계의 문제지를 풀어야 될 것이고, 수업내용을 따라잡지 못했다면 참고서를 활용해 수업의 이해를 도와야 하기 때문이죠."
이때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이 학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상위권이든 하위권이든 그에 맞는 보충을 해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단순히 드라마의 재미를 높이기 위해 자극적인 설정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수능에 나오지도 않는 상징이나 표현법같은 문제는 낡은 것'이라고 단정짓는 스타강사의 말은 얼핏 보면 지극히 맞는 말같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학교가 과연 오로지 수능대비를 위해 존재하는 곳인가를!
학교는 배워야 할 것을 가르치는 곳이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교육은, 웃어야 할 때 웃을 줄 알고 슬퍼해야 할 때 슬퍼할 줄 알며 화내야 할 때 화낼 줄 아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다.
대학에 목숨 거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현실과 너무 멀다는 비판을 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해서 그 분위기를 끝까지 따라가서는 안될 일이다.
학교에서 교사는 그런 인간을 육성하기 위해 교사로서의 할 일을 계속해 나가야 할 것이며, 그것이 진지하게 지속될 때 학생은 학생답게 자란다. 학생다운 학생이 어른다운 어른이 되는 법이니 그 어른은 우리 사회를 올바르게 이끌어나갈 것이 명백하다.
이상이 드라마 <졸업>이 아쉬운 이유다.
드라마가 상업성을 띄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안다.
그래서 시청률에 의존하고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자극적인 설정과 갈등관계가 필수요소라는 것도.
하지만 세상 대다수가 상업성을 추구하고 거기에 발맞춰 따라간다면 우리 문화는 제대로 나아갈 길을 놓쳐 방향성을 상실하고 말지도 모른다. 마치 파도 속에서 키를 놓치고 표류하는 난파선처럼.
일개 드라마에 쌍심지 켠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나는 우리 교육과 문화가 함께 침몰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현실과 이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게을리하지 않는 성의, 그 성의를 포용하고 진지하게 같이 고민할 때 교육과 문화는 침몰을 멈추고 함께 수면으로 떠오를 것이다.
우리가 탄 배가, 놓친 키를 다부지게 되잡아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기대해 본다.
24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