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수를 알아보는 눈

바리데기를 읽고 딸아이의 질문을 떠올리다

by 진주아지매


황석영이란 이름이 반가웠다.

'객지, 삼포 가는 길, 장길산, 아우를 위하여, 모랫말 아이들' 등 굵직한 작품이 그의 손에 탄생했고, 교과서에 실린 글만 해도 여러 편이다.


특히, '아우를 위하여'나 '삼포 가는 길'은 가르치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짧고 담백하지만 명치를 때리는 강력함.

이렇게 쓸 수 있다니... 범접 불가였다.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아직도 '아우를 위하여'의 표절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니, 그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만하다.


서점에서 <바리데기>란 제목을 본 순간, 홀린 듯 책을 집어 들었다. 언론을 통해 익히 들어온 작품의 명성 때문이기도 했고, 황석영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읽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어릴 적 딸아이에게 바리공주 설화를 들려준 적이 있다.


"왜 자길 버린 엄마.아빠를 구하러 저승까지 가?"


나는 그때 제대로 답해주지 못했다.

"착한 아이라서 글치~ "

그 정도의 한심한 대답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을 제시해 주었다.


황석영의 <바리데기>는 생명수를 구하기 위해 저승을 다녀오는 바리공주 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무속 서사의 뼈대는 같지만 결말은 다르다.


생명수를 구해 부모를 살리고 행복하게 사는 바리공주와 달리, 소설 속 바리의 삶은 끝없는 고통의 여정이다.


북한에서 태어나 굶주림과 핍박 속에 살아가다가 겨우 중국으로 탈출하고, 거기서도 살아남기 위해 다시 바다를 건너 영국으로 향한다.

한반도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세계로 확장되는 바리의 삶은 그 자체로 고통의 연속이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밑바닥 인생으로 전락하는가 싶다가 조력자를 만나고, 또 극한의 고통을 겪으며 생명수를 찾으러 갈 수밖에 없는 바리의 이야기는 읽을수록 힘겨웠다.


그 이야기는 어느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인생은 고해(苦海)라는 트로트 노랫말에 깊이 공감하던 어머니 세대의 이야기였고,

독재와 기근에 굶주리고 죽어나가는 북한 주민의 이야기이기도 했으며,

전쟁과 폭력 속에서 서로를 죽이고 상처받는 인간의 역사이기도 했다.


또한 욕망과 이기심에 뭉쳐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들에게 보내는 외침처럼 들렸다.


수없이 많은 죽음들,

그로 인해 지옥 바다에 갇혀 피 흘리고 비명 지르는 넋들.


바리는 그 넋들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운명을 짊어진다.


그런데 바리는 생명수를 구했을까.



답은 독자가 스스로 찾아야 한다.


나는 바리의 할머니가 들려준 바리공주 이야기에서 답을 찾았다.

생명수는 얻지 못했지만 생명수를 알아보는 눈을 가지게 됐다는 말에서였다.


그 눈은 세상의 고통받는 이들을 제대로 바라보는 눈이다.

그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눈이다.


그리고 그 눈을 뜨게 하는 것은 결국 마음이다. 그 마음에서 구원이 시작된다면, 그것이 바로 생명수가 아닐까.


작가 황석영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봐 달라고.


지척인 북녘 땅에는 여전히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 땅에 살 수 없어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바다를 건너 미국과 유럽으로 가지만,

탈북민이라는 이유로 타국에서도 신체의 자유와 미래의 희망이 모두 짓밟혀 또 다른 고통 속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


외면 말고 봐 달라고.


그래서 <바리데기>는 세상의 고통받는 넋들을 위로하고 저승으로 보내는, 이승의 살풀이처럼 느껴진다.

고통받는 모든 이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위로이기도 하다.


쉽게 읽히지만,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자

지옥바다에 떨어지리니.


나는 과연 타인의 고통을 돌볼 줄 아는 사람이었을까.

불바다든 피바다든 그 어딘가 내 자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면 문득 모골이 송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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