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체크인한 여자

남편 실종기

by 진주아지매

영하 9도를 찍던 어느 날 낮,

우리 집 보일러가 에어컨이 되고 말았습니다.


수리 기사님은 이틀 뒤에나 온다 하고, 얼음장같은 방에서 전기 매트 하나로 하룻밤을 보낸 우리는

결국 특단의 결정을 내렸죠.


"모텔을 잡자! 이러다 우리 변사체로 발견되겠다."

"..."

"와 말이 없노?"

"생각해 보자꼬!"

"뭘 생각하노! 여기서 하룻밤 더 잘 끼가?"

"얼어죽는다!"

"우짜잔 말이고?"

"꼭 모텔이어야 되냐는 거지. 우리 고장에 좋은 숙소 많잖아!"

"뭔 말인고 알겠다. 그럼 호텔로 가자!"

"그게 맞겠제? 그럼 내가 미리 가 있을 테니까 자기는 퇴근하면 호텔로 바로 와!"


겨우 말귀를 알아들은 남편이 출근한 뒤

혼자 집에 남아 있다간 냉동만두가 되고 말 거 같아서 호텔로 달려갔어요.


비수기라 로비에 손님은 저뿐인 듯 싶더라구요.

"입실을 좀 일찍 할 수 있을까요?"

"그야 되죠. 추가 요금만 내시면요."


추가 요금이란 소리에 더 묻지 않고 주차장으로 돌아가 차에 웅크리고 버텼습니다.

한 이십 분 그러고 있었나요.


여성 한 분이 다가오는 게 아니겠어요!

머리가 길고 살집이 두툼한 분인데 아는 얼굴은 아니었죠.

그녀가 활짝 미소를 짓데요.

윙크도 찡긋 하구요.


'나...나한테 왜 이래?'

당황한 제 상황은 아랑곳없이

립스틱을 꺼내 바르기 시작하더군요.

아랫입술 윗입술을 팍파- 두드리기도 하고, 고개를 돌려 자신의 자태를 점검하기도 하고...


허어 참, 그때야 깨달았죠.

저는 사람이 아니라 거울이었던 겁니다.


스타킹까지 쭈욱 당겨 판판하게 한 뒤 그녀는 유유히 차에서 멀어졌고 전 뛰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 다시 호텔 로비로 갔습니다.


"이제 입실 안 될까요? 바깥에 더 있다가 사지마비 되겠어요!"

"원래 추가요금 받아야 되는 건데... 오늘 투숙객이 별로 없으니까 그냥 입실시켜 드릴 게요. 조식은 어떻게 하시죠?"

"일행 오면 연락 드릴 게요."


남편이 조식을 먹을 확률은 0.1%였습니다. 80킬로나 떨어진 직장에 다니느라 새벽밥을 먹고 6시 30분이면 집을 나서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래도 혼자 호텔에 온 여자란 인상을 남기기 싫어 그렇게 말한 거였어요.


배정받은 객실은 긴 복도를 걸어 막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612호실.

젤 저렴한 객실을 예약한 것치곤 리버뷰가 멋지게 펼쳐진 측면 전망이라 감동이었어요.


근데 너무 조용했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체크인 1번인 것 같았고

주변 객실에선 인기척이 전혀 없었지요.

짐만 내려놓고 다시 1층으로 내려갔습니다.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일행이 늦는다네요!"

"예? 아... 예!"

"제가 혼자 온 게 아니거든요. 보일러가 고장나 집이 냉동고가 돼서 살 수가 있어야죠!"

"그러셨군요!"

"이런 곳에 여자 혼자 오면 이상하게 보고 그러잖아요. 퇴근하고 남편 올 거예요!"

"사생활 보호는 기본이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 저 고객님..."

"네?"

"뭐 더 필요한 거 있으세요?"

"아뇨오... 이제 가 볼게요!"


다시 객실에 올라갔지만 진짜 너무 심심해서 호텔 구경에 나섰습니다. 근데, 실수로 직원 전용 엘리베이터를 탄 게 화근이었습니다.

내리자마자 보인 건 로비가 아니었습니다.

계단과 닫힌 문 그리고 정적.


내려가도 계단

또 내려가도 계단


으시시해서 결국 닫힌 문을 열었습니다.


끼이익.

낮인데도 어둑한 그곳엔 테이블과 의자가 가득 줄을 서 있고 천장에는 샹들리에와 조화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거든요. 게다가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호텔에 왜 이런 곳이 있는 거야... 아이고 무서버라...'

최대한 빨리 나가려다 우당탕탕 테이블에 부딪치고 의자에 패딩이 걸려 뒤에서 잡아당기고... 패닉이 오더라고요.

"아...아무도 없...어요?"

최대한 고함을 질렀지만 목소리가 쫄아서 모기처럼 가늘게 나왔죠. 어둑한 공간에 있다 보니 간이 콩알만해졌나 봐요.


"여기이 누구... 있어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지요. 이젠 부들부들 떨리는 몸과 쿵쾅거리는 심장을 움켜쥐고 거의 기다시피 입구를 찾아 살았다 싶어 힘껏 문을 밀었는데 으악! 안 열려요!

"살려주세요오! 여기 사람 있어요오오!!"


공포에 질려 되게 악악거렸던 거 같아요. 철컥 소리와 함께 거대한 문이 열리길래 바람같이 달려나갔습니다. 아니, 달려나갈라고 했죠.

"어이쿠!"

프런트에 있던 직원이 문을 열다가 저와 충돌했던 겁니다.


"고객님! 왜 거기서... 아후!"

"저긴 대체 뭐죠? 빈 테이블이랑 의자가 가득해서 꼭 귀신 나올 것 같던데!"

"고객님, 거긴 주말에만 여는 예식장입니다. 거길 왜 굳이 따고 들어가셨어요?"


직원은 한심하게 절 한번 쳐다보고 프런트로 돌아가더군요. 남자 치고 유난히 가는 그의 허리가 좀 안 좋아 보였지만 어떡해요. 제 코가 석 잔데.


이젠 진짜 객실에 있어야겠다 싶어 로비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검정 패딩에 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비닐봉지를 들고는 급하게 걸어오길래 열림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습니다.


"어이구 고맙습니다!"

우락부락한 인상에 비해 인사성이 밝더군요. 그런데 제가 6층을 눌렀는데 남자는 층수를 누르지 않는 거예요.

'뭐지? 이 남자 나를 따라오는 건 아니겠지?'

남자가 뒤에 서 있어 급불안해졌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얼른 내렸어요. 어어? 남자가 같이 내리더군요. 태연한 척 복도를 걸었지만 같은 방향으로 걸어온다는 게 뒤통수로 느껴졌지요. 이럴 때 빨리 걸으면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심호흡을 하며 걸음걸이를 조절했습니다.


'하나 둘 하나 둘... 좋아... 침착하게... 하나 둘... 근데 왜 자꾸 나를 따라오는 거 같지? 이 많은 객실 중에 굳이 이렇게 같이 걸어올 이유가 없는데?'


긴 복도를 걸으며 필사적으로 눈알을 굴려 살폈지만 인기척이라곤 없었어요.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죠.

헉! 남자가 여전히 뒤따라오고 있었습니다. 평정심이고 뭐고 이젠 신변에 대한 위협이 급박하게 느껴져 얼른 단축키부터 눌렀지요.

1번. 꾸우욱!

"아 여보! 나 객실에 다 왔거든! 얼른 문 열어줘!!"

그리곤 경보로 복도 끝까지 갔습니다.

남자도 거의 제 뒤에 바짝 따라붙었더군요.

'엄마야! 나 어떡해!!'

"여보! 여보!! 나 다 왔다니까아~ 우와악!!"

꽥 소리를 지르며 객실에 키를 갖다 대는 순간,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요?"

"저... 저 막 따라왔잖아요!"

"누가 따라와요! 방향이 같았을 뿐이지! 나참!!"

"예? 옆 방 투숙객이세요?"

"아뇨!"


남자의 목소리에 짜증이 확 실리더군요. 그리고 더 말하기 싫다는 표정으로 옆 객실로 가더라구요. 남자는 들고 온 비닐봉지를 객실 문 앞에 내려놓고 휴대폰을 켰습니다.

"주문하신 음식 놓고 갑니다. 맛있게 드십쇼!"


그는 배달기사였던 겁니다. 어안이 벙벙했죠. 나름 우리 고장 최고의 호텔인데 배달이라니...


"미안해요. 무서워서 그랬어요..."

"아이고~ 이런 일 하다 보면 오해받는 게 한두 번이라야 말이죠! 그라고요, 배달음식 필요하시면 여기로 연락 주세요."



씩 웃으며 명함을 건넨 뒤 배달기사님이 돌아갔고 전 객실로 들어왔는데요, 왠지 진 기분이 들더라구요. 그때서야 전 봤습니다. 체크인할 때 직원이 준 안내지에 적힌,

<배달음식 가능. 냄새 퍼지지 않게 밀봉해 둘 것> 이란 문구를요. 공식 배달 가능한 호텔이라니... 전 정말 몰랐습니다.


창피해서 바깥에도 못 나가고 저녁을 쫄쫄 굶으며 객실에 갇혀 있는데 남편은 회식이라며 밤이 되어도 오지 않더군요. 할 수 없이 밤 9시쯤 혼자 로비에 내려가 조식권을 구입했어요.


"두 분요?"

"아뇨, 1인권 주세요."

"일행이 안 오셨나 봐요?"

"아... 좀 늦는다네요..."


직원분은 분명 믿지 않았을 거예요. 혼자 왔으면서 둘이 온 척한다고 생각했겠죠.

어떻게든 남편의 존재를 보여주고 싶은데 그날 남편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자정쯤에야 돌아왔어요.


"아 쫌 조용히 해! 여기가 우리 집인 줄 알아?"

"우리 여보야 있으면 우리집이지이! 여보씨~ 사랑해요오~"


집에서 하던 술주정을 호텔에서 똑같이 하고서야 남편은 잠이 들었고, 다음날 아침 6시에 기상했습니다.


"좀 늦게 출근하면 안 돼?"

"별일도 없는데 왜 지각을 해?'

"나 혼자 체크인해서 내내 혼자 있었잖아! 조식은 같이 먹어줘! 호텔에 혼자 투숙한 여자란 인상 주기 싫단 말이야!"

"내 직장생활에 지각은 절대 없다! 그기 내 신조라꼬!"


신조를 외치며 남편은 컵라면 하나 비우곤 6시 30분 아무도 없는 시간에 호텔을 나갔습니다.


또 혼자였지요.

사람들 틈에서 혼자 조식 먹는 여자만은 되기 싫어서 7시 되자마자 호텔 꼭대기에 있는 조식장으로 갔습니다.

너무 일렀던지 직원 대신 메모가 한 장 있더군요.

'화장실에 갑니다. 조식권 여기 두고 들어가세요.'

손글씨로 급히 쓴 메모 위에 조식권을 두고 조식장에 들어가니 제가 1등이었어요.

'다행이다. 누가 오기 전에 얼른 먹고 내려가야지.'


근데 음식이 아직 준비되지 않아 별 수 없이 창가에 자리를 잡고 기다렸죠. 잠시 후 인기척이 나면서 여성 한 분이 들어오더니 두 테이블쯤 떨어져 저와 마주보는 위치에 앉았는데, 보고 싶지 않아도 얼굴이 보이지 뭡니까.


헉. 긴 머리를 묶긴 했지만 살집이 두툼한 게 그 분이었어요. 어제 체크인 시간을 기다리던 차 속에서 만났던, 아니 만난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만남을 당해야 했던 그 여성... 차창을 거울삼아 윙크까지 해대던 그 분요.


그렇게도 용모 체크에 열심이더니 왜 이 시간에 홀로 조식을 먹으러 온 건지... 어쩐지 짠해지더라구요.

'우리 같은 처지구나...'


화장실에 다녀온 직원은 빵과 계란, 샐러드가 담긴 쟁반을 제게 먼저 가져다 줬습니다.

"어... 혼자 오셨네요!"


전 침묵을 택했어요.

두 테이블 건너편에선 그녀가 우릴 빤히 바라보고 있고, 직원은 눈치 없이 안 해도 될 인사까지 하고 있으니 어찌나 얄밉던지요.


뭐 그래도 조식 한 쟁반은 깨끗이 먹어 치웠습니다. 맞은편의 그녀도 꽤 잘 먹더라구요. 나올 땐 눈인사까지 했다니까요.


결국 전 체크인을 혼자 했듯이

체크아웃도 혼자 했고요,

보일러 고장수리팀 방문도 혼자 맞이해야 했습니다.

호텔이 좋다지만,

어유우~ 그래도 보일러 뜨끈하게 돌아가는 우리집이 최고더라고요.


아이고 따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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