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비도 못 찾은 길, 기억은 먼저 도착함
길을 잃어 도착한 곳에서, 고3 시절 블랙리스트(?)를 만났다.
***
삼천포 드라이브 길,
생선구이 맛집에 들렀다가,
길을 잃고서야 비로소 닿게 된 곳.
주차를 하고 보니 <청널공원> 이란 글자가 보였다.
아... 오늘은 길을 잃은 게 아니라,
운명을 만난 건가 싶었다.
공원은 아담하고,
여기저기 어르신들이 모여 운동을 하거나 이야기꽃을 피우고 계셨다.
딱 동네 사랑방같은 분위기.
처음엔 그저 평범한 동네 공원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눈 아래로 바다가 펼쳐지는 순간
'옴마야!'가 절로 나왔다.
이건 풍경이 아니라 그림이었다.
아니, 풍경이 나를 찍고 있는 기분이었다.
낯선 공간이라 어색할 줄 알았는데,
벤치에 앉아 한참을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연결된 길은 또 왜 저렇게 예쁜지.
사흘째 바다가 잔잔하다고
모여앉은 어르신들 두런두런 말씀 나누시는 사이,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바다, 나랑 사귀면 안 되나... "
바다에 홀려 걷다 보니,
포토존 뒤로 한 인물의 이름이 보였다.
'삼천포의 시인... 범보 김인배... '
어라, 저 얼굴 어쩐지 낯이 익다.
기억 회로가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고,
이내 폭풍 검색.
그리고 깨달았다.
아... 고3 때 문학 가르쳐 주시던 선생님이다!
제자랑 결혼한 분이라며
여고생 사이에서는 살짝 호불호가 갈리기도 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꽤나 멋쟁이셨던 분.
그때는 몰랐다.
선생님이 소설을 쓰는 작가였다는 걸.
문득 떠오르는 한 마디.
"이 반에 조용필이한테 미친 학생이 있다던데?
조용필이가 뭐가 좋다고 그라노?"
장난 섞인 서글서글한 말투였지만,
감히(?) 나의 우상을 폄하했다는 이유로
나는 고3 내내 선생님을 마음 속 블랙리스트에 올렸다.
'아니 선생님, 조용필을 좋아할 수도 있지요!'
속으로 얼마나 투덜댔던가.
학력고사를 앞두고
가슴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던 시절,
강당 주변 국화꽃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미친 듯 사진을 찍던 나에게
불쑥 다가와
"같이 찍자~"하시며
어깨동무를 하셨던 그 장면도
아직 앨범에 남아 있다.
그때 질색하며 찍혔지만,
지금 보면 꽤 좋은 추억이다.
그리고 오늘,
선생님의 생애를 뒤늦게 알게 되었다.
2019년 1월 19일,
이미 세상을 떠나셨다는 사실까지.
철없던 여고생은 이제 중년이 되었고,
그제야 선생님의 진면목을 조금 알게 되었다.
죄송하고 그립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시절 내가 좋아했던
조용필만큼이나,
선생님 또한
누군가에게는 평생을 기억하고 싶은 덕질의 대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오늘의 나는
선생님을 다시 덕질하게 된 셈이다.
오늘의 우연이 아니었다면
나는 끝내 몰랐겠지.
삼천포에 이런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는 걸.
청널공원 덕분에
푸른 바다 덕분에
그리고 그 시절의 선생님 덕분에.
조용히 마음이 한 번 더 물결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