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그리고 기억 여행

가족의 풍경

by 진주아지매

화제성 높았던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 몰아보기를 하다가

문득 눈물이 났다.

할머니가, 울엄마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여자 주인공(임솔)이 남자 주인공(선재)을 살리기 위해 몇 번이고 타임슬립[time slip]을 반복하면서 벌어지는 로맨틱 코미디다.

극 종반부, 고군분투하던 임솔은 마지막 타임슬립을 끝내고 현재로 돌아오는데,

치매에 걸려 손녀를 못 알아보던 할머니가 집으로 들어서는 임솔을 반기며 말한다.


- 이제 오냐?

- 할머니! 나 기억나?

- 그러엄! 기억하지!

- 그러면 나 잊어 버린 거 아니었어?

- 살면서 보고 듣고 느끼는 건 사라지는 게 아냐. 영혼에 스미는 거지. 머리로는 잊어도 내 영혼은 잊지 않고 다 간직하고 있제.

- 정말 그런 걸까?

- 암 그라제! 할미는 시방 기억 속에서 여행 중이여. 세 살 적 엄마 품에서 어리광 부릴 때로도 갔다가 열여덟 서방님 만날 때로도 갔다가, 그라다 우리 막둥이 그리우면 이라고 다시 돌아오기도 하는 거여.


'선재 업고 튀어'는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다.

흐음 웹툰이군...

이 말은 '별 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 습관처럼 나오는 혼잣말이다.

내로라하는 소설이나 시나리오, 극본은 수준이 높지만 웹툰은 그닥 수준 논의할 건 아니라는 생각이 강했으니까.

그런데 임솔과 할머니의 대화를 들으며 생각이 싹 달라졌다.

세상에... 저런 표현을 해내다니!


우리 할머니도 치매였다.

처음엔 표시가 나지 않다가 가끔 돈이 없어졌다며 집안을 이 잡듯 뒤지고 어머니를 의심하기도 하면서 치매 증상이 알려지게 됐다.

가끔 친정에 다니러 가보면 할머니 말수가 좀 줄어들었단 느낌이 드는 정도지 별다른 건 없었다.

소위 착한 치매였던 셈이다.

할머니가 그렇게 되자 어머니하고만 이야기를 나누고 할머니 방은 잘 들여다보지 않았다.

대화가 잘 되지 않을뿐더러 할머니의 텅 빈 눈을 들여다보는 게 싫었다.

우리 할머니가 아닌 거 같아서.



그때는 치매에 대한 편견이 심했다.

뭐 나쁜 사람이라도 된 듯이 아니, 더러운 병이라도 걸린 듯 치매를 꺼리고 그 사람을 터부시했다.

거기에 나도 편승했던 것 같다.

잘 알아보지도 못하는데 뭐... 단정 짓고 말이지.


곡기를 끊고 말문마저 닫은 채 열흘을 누워계시던 할머니 방문을 열던 날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 물 좀 드릴까예?

여쭈었지만 말하지 못하는 그 눈이 여전히 텅 비어 있어서 나는 그냥 방문을 닫고 나왔다.

며칠 뒤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나는 두고두고 그 눈이 생각나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물을 숟갈로 떠서 입에 흘려드릴 걸... 말이라도 더 걸어드릴 걸... 두고두고 후회가 됐다.


사람들의 인식이 우리 할머니 이전엔 더 심했다.

치매라는 용어조차 없었다.

대학교 때던가... 심술보도 좀 가지고 기운차게 이집저집 다니던 작은집 할머니가 이상해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툭하면 말도 없이 집을 나가 온 집안 걱정을 시킨다는 거였다.

고생 끝에 찾아내고 보면 큰 차들이 달리는 국도나 고속도로 근처에 가 있다고도 했다.

그런 이야기를 전하는 어른들은 혀를 차면서 말했다.

노망 난 할매가 애를 먹인다고.


그렇다.

예전엔 노망이 났다고들 그랬다.

노망의 사전적 의미는 늙어서 망령(늙어 말이나 행동이 정상에서 벗어남)을 부림이다.

그 말이 주는 어감이 얼마나 부정적이었던지, 노망 난 사람 곁에 가면 큰일이 나는 줄 알았다.

노망이 순화되어 치매가 되었다지만 어리석고 어리석다는 뜻이 치매니 이 역시 깊은 고민 없이 사용된 용어였던 상 싶다.

최근에는 치매대신 인지장애라는 용어를 쓴다.

병원에서도 의학용어로 통용하는 병명이니까 인지장애가 가장 바람직한 용어려니 했다.

그런데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에서 또 다른 표현을 해낸 것이다.

기억 속으로의 여행.

세 살배기도 됐다가 열여덟 새색시도 됐다가 또 현재로 돌아오기도 하는 기억 속으로의 여행.


그랬던 거구나.

할머니는 기억 속으로 여행을 다니셨던 건데 몰랐던 거구나.

오해하기만 하고 내가 우리 할머니를 멀리 했던 거구나.


울엄마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식을 알아보셨건만

왜 기억 속으로의 여행에 엄마가 함께 떠오르며 슬퍼졌는지 모르겠다.

4년 하고 3개월이 훌쩍 지났어도 잊지 못하는 자식의 마음에,

웹툰 작가의 그 기막힌 표현이 아마 위로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울엄마는 이승의 여행을 끝내고 지금은 새보다 더 자유로워져서 다른 세상 여행을 하고 있으려니

새로운 사람,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나 다시없을 찬란한 삶을 살고 계시려니

그리 생각하도록.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의 작가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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