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400만 원의 무게와 나의 위태로운 스무 살
스무 살의 봄은 설렘보다 막막함으로 먼저 찾아왔다. 전문대학교의 등록금은 학기당 400만 원이 훌쩍 넘었다. 우리 집 형편에 그건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누군가의 생존을 깎아내야만 만들 수 있는 거금이었다. 하지만 철없던 나는 엄마가 그 돈을 구해오는 것을 당연한 권리처럼 여겼다. 엄마가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자존심을 접어두며 빌려왔을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말이다.
대학 생활은 모순의 연속이었다. 전공 서적을 산다며 엄마에게 받아낸 돈으로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춤을 추러 다녔다. 해방감 뒤에 찾아오는 부채감을 잊으려 더 격렬하게 놀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엔 늘 엄마의 거친 손마디가 걸려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렇게 방황하면서도 성적표만큼은 장학금을 놓치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엄마에게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하고도 비겁한 면죄부였다.
울산까지의 통학이 힘들다는 핑계로 엄마를 또 한 번 졸랐다. 1학년 기숙사 생활이 불편하다며 기어코 자취방을 얻어냈다. 이기적인 친구들과 얽히며 마음고생을 하던 그 시절, 나 하나 편하자고 엄마의 어깨에 자취 비용이라는 짐을 하나 더 얹었던 그때의 내 모습을 도려내고 싶을 만큼 후회가 밀려온다.
가장 잔인했던 건 공부와 실습에 치여 살던 시험 기간이었다. 아빠의 빚을 독촉하는 전화가 내 휴대폰으로까지 걸려왔다. "모르는 사람이에요"라며 전화를 끊고 엄마에게 사실을 전했을 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엄마의 그 낮고 슬픈 목소리. 나에게까지 번져온 가난의 불씨를 마주하며 엄마는 얼마나 무너져 내렸을까.
남들 다 가는 해외여행 한 번 꿈꾸지 못한 채, 방학마다 1,000시간의 실습 현장을 버텨냈다. 억울함과 피로가 몰려올 때마다 나를 일으킨 건 결국 엄마였다. 등록금, 책값, 자취방 월세, 그리고 내 옷 한 벌까지... 엄마는 자신의 계절을 전부 반납하고 나의 계절을 피워내고 있었다.
마침내 국가고시 합격 소식을 들고 자격증을 손에 쥐었을 때, 나는 비로소 그 지독했던 가난의 터널 끝에서 엄마의 손을 잡을 수 있었다. 공부를 열심히 안 했다고 자책하지만, 사실 나는 알고 있다. 그 모든 방황 속에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건, 나를 위해 기꺼이 성벽이 되어준 엄마의 삶을 증명해 내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것을.